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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철의 링딩동] 스물 여덟 미국행을 택한 ‘복서 김강용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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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미국 데뷔전에서 승리한 김강용(왼쪽)과 상대인 에드가르도 토레스.

2015년 5월 8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2300아레나. 링에서는 상기된 표정의 한국선수가 미국 데뷔전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1라운드에서 에드가르도 토레스(미국)에게 큰 다운을 빼앗은 그는 4라운드까지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은 끝에 세 부심 모두에게 40-35의 채점을 받아들었다. 2월 23일 미국으로 건너간 지 74일 만에 거둔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승. 김지훈이 2012년 5월 25일 23전 전승(12KO)의 유망주 앨리셔 라히모프(우즈베키스탄)에게 10회 판정승한 이후 3년 만에 미국에서 한국 복서가 올린 승전보였다. 주심의 손에 승자의 팔이 들어올릴 때 김강용은 입속으로 계속 무언가를 되뇌고 있었다. ‘동철아, 해냈다. 이제 시작이다.’

복싱 입문, MVP, 그리고 방황
월드컵 4강으로 전국이 떠들썩했던 2002년의 겨울 끝자락, 중학교 1학년생이던 김강용은 살던 화곡동에 있는 강서문성길복싱클럽을 찾아 입관한다. 못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싸움을 좀 더 잘하고 싶어서였다. 타고난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는 금세 복싱에 빠져들었고 원하던 대로 학교에서도 소위 ‘짱’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링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링 밖에서의 싸움에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지도하고 곁에서 보아온 김보현 관장은 김강용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링 밖에서는 절대로 사람을 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정식으로 아마추어 대회 출전을 허락한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처음 출전한 서울시 신인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획득과 함께 최우수선수로 선정된 김강용은 전국 대회 준결승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판정으로 패하자 프로 전향을 결심했다. 2007년 1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개최된 전국 신인왕전에 출전한 김강용은 경기를 앞두고 체중조절에 실패했다. 경기 당일까지도 2.8kg이 초과된 것이다. 3차 계체량을 거친 끝에 100명이 넘는 출전 선수 중에서 가장 늦게 간신히 계체량을 통과했지만 이미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페더급 예선전에서 김재훈과 가진 프로데뷔전. 김강용은 기량에서 상대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두 번의 다운을 당하고 판정패,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4회전 경기에서 다운은 2점을 감점당하기 때문에 치명타가 된다. 세 부심의 채점은 모두 38-36. 다운 당한 두 라운드에서 4점을 빼앗겼고, 나머지 라운드에서는 포인트를 땄지만 두 번의 다운을 안고는 승리할 수가 없었다. 시합 내내 두통에 시달린 김강용은 자기관리 부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KO를 당하지 않고 판정까지 끌고 간 것이 용할 정도였다.

이후 김강용은 방황한다. 체육관에도 나가는 둥 마는 둥 가끔씩 운동을 할 뿐 목표의식이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한 태도는 한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매진하는 데 크나큰 걸림돌이었다. 화곡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08학번으로 부천대에 입학해서도 한 학기를 마친 후 중퇴했다. 보다 못한 김보현 관장은 김강용에게 해병대 입대를 제안한다. 절친한 체육관 선배인 이남준(PABA 페더급 주니어챔피언), 1년 후배 김진수(한국 슈퍼라이트급 3위), 그리고 김관장까지 모두 해병대 출신이었다. 김강용은 김관장의 권유를 받아들여 2009년 3월 1089기로 해병대에 입대한다.

제대 후 젊은 시절의 맹목적인 일탈은 끝났다. 그렇다고 특별히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 역시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아르바이트로 소일하다가 문득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시 복싱이었다. 5년 전 서울시 MVP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전한 신인왕전에서 중량 조절 실패로 예선 탈락한 경력이 전부인 1전 1패의 프로복서에 불과했으나 어느덧 그의 복싱 경력은 10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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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데뷔전에서 승리가 선언되는 순간 김강용에게는 오직 친구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신인왕 등극, 포기, 그리고 친구의 죽음

2012년 초 발표된 신인왕전 계획을 접한 김강용은 김보현 관장에게 출전 의사를 전달했고 40여 일 간 피나는 훈련 끝에 5년 만에 신인왕에 재도전한다. 김강용은 예선과 준결승에서 김성재, 최선을 잇달아 심판 전원일치의 판정으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상대로 올라온 태양체육관의 강기성은 한 방의 위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처음 맞는 6라운드 경기는 쉽지 않았지만 충분한 연습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견 없는 3-0 판정승으로 김강용은 제37회 전국신인왕전 라이트급 신인왕에 등극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국내 중(中)량급의 기대주로 급부상한 김강용.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복싱에 전념하지 못했다. 급기야 체육관을 무단이탈했고 김보현 관장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복싱에 소질이 있던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제대로 가르치려 무진 애를 썼지만 무언가 될 것 같으면 어김없이 방황하며 복싱과 멀어져갔기 때문이다. 김강용은 막상 신인왕이 되고나니 세계챔피언이 되기 전까지는 배고플 수밖에 없는 국내 현실에서 복싱에 올 인을 해도 미래가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 생겼다. 스승에게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미국에서 도전한다면 모를까 국내에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복싱을 위해 미국에 갈 엄두를 낼 수도 없었고, 결국 챔피언의 꿈을 포기한 김강용은 이후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삶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호기심도 채우고 돈도 모아보고 싶었다. 나이 먹도록 이뤄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1,000만 원만이라도 모아보자는 생각으로 일하고 저축하며 열심히 살았다. 워낙 성격이 좋아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복싱 때문에 소홀해야 했던 주변인들과의 관계에도 신경 쓰면서 김강용은 그렇게 사회에 녹아들었다. 많은 친구들 중에서도 특별히 친한 4명과는 평생 우정을 쌓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복싱은 잊혀져가고 있었다.

평범한 사회인으로 일상을 지내던 강용의 인생에 큰 사건이 생긴다. 최동철,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 올해 2월 1일이었다. 사람 좋고 친구를 좋아하던 그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먹먹한 상태에서 장례를 치른 후 무심코 먼저 간 친구와의 카톡을 보며 추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내용은 더 나이 들기 전에 미국에 가서라도 복서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평소 강용이 복싱을 포기한 것을 안타까워하던 친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 채 여전히 강용에게 복서의 길을 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복싱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친구는 평소에도 국내가 싫다면 미국에 가서 도전해보기를 거듭 권유했고, 그 때마다 강용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대답만 되풀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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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문성길복싱클럽 동료들. 오른쪽부터 김보현 관장, 황규환, 김강용, 김진수.

무작정 미국으로

‘미국으로 가자.’ 김강용은 유언이 되어버린 친구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읽으며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열심히 일해서 모아놓은 돈도 있었다. 우리 나이로 벌써 28세. 지금이 아니면 복싱에 더 도전하기도 어려웠다. 문제는 미국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도 그렇고 막막했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며 2009년 IBO 슈퍼페더급 타이틀을 따냈던 김지훈(일산주엽)의 활약을 보면서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김지훈의 에이전트이자 비즈니스 매니저였던 이현석 씨(미국명 폴 리)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서 국내 복서들의 미국 진출을 도와주던 이현석 씨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페이스북을 찾아 무작정 메시지를 보냈다. ‘신인왕을 했던 김강용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챔피언이 되고 싶습니다. 가도 되겠습니까?’ 답이 왔다. ‘올 수 있으면 오십시오. 의지가 있다면 돕겠습니다.’

일사천리로 준비를 마친 김강용은 2월 23일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이현석 씨를 만났다. 기가 막힌 쪽은 이현석 씨였다. 설마 진짜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신을 믿고 찾아온 김강용의 의지가 가상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복싱을 워낙 좋아해서 이해관계 없이 국내 선수들을 도와주던 이현석 씨는 김보현 관장과 상의 후 페스트레인복싱짐에 김강용을 등록시켜주고 숙소와 아르바이트할 직장까지 알선해줬다. 그리고 김강용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홀로 외로운 도전을 시작한 김강용은 죽기 살기로 운동했다. 아르바이트와 자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복싱만 생각했다. 트레이너인 자히르 저스티스(미국)는 갑자기 나타난 동양 선수 하나가 열심히 훈련하자 관심을 갖고 그를 도왔고, 이현석 씨도 자비를 들여 서둘러 시합을 잡아줬다. 그렇게 도미한지 불과 두 달 반 만에 김강용은 미국에서 데뷔전을 갖게 된 것이다.

선수로서의 김강용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일단 주먹 숫자를 많이 내야 한다고 스스로 진단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문성길이나 겐나디 골로프킨, 코스챠 추, 루슬란 프로보드니코프 같은 선수들처럼 끊임없이 파이팅을 펼치는 선수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국 활동과는 별도로 국내에서는 한국타이틀에 도전해보고 싶다. 김보현 관장을 비롯, 이남준, 김진수, 황규환 등 체육관 동료들은 본인이 하기에 달렸다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동안 복싱 밖의 일에 익숙하던 터라 김강용의 작심이 변하지만 않는다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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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한 선배 이남준(오른쪽)과 함께.

계속되는 도전

미국에서의 첫 경기를 인상적으로 치르자 곧바로 두 번째 스케줄이 잡혔다. 6월 30일, 원정 첫 승을 거둔 필라델피아 2300아레나에서 골든보이 프로모션이 주최하는 마이클 페레스(미국)의 논타이틀매치 오픈게임이다. 국내에서는 신인왕 출신이고 국내 랭킹에 들어갈 자격도 있지만 미국에서는 4라운드 복서일 뿐이다. 이제 진짜 도전을 시작한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친구를 위하여 다시 글러브를 낀 김강용은 다만 친구의 묘소에 챔피언벨트를 바치고 싶을 뿐이다.

김보현 관장에게 김강용은 애증의 제자다. 어린 시절부터 기쁨도 많이 줬지만 그 이상 속도 많이 끓게 했다. 김관장은 그런 그를 ‘내 새끼’라고 표현한다. “고등학교 때였는데 하루는 이 녀석이 어딘가에서 쥐어 터졌는지 얼굴이 잔뜩 망가져서 체육관에 왔더라고요. 자초지종을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맞은 것은 확실한 것 같아 물어물어 내 새끼 때린 놈을 잡았죠. 근데 강용이가 맞을 만한 친구가 아닌 거예요. 다시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랬더니 그러더라고요. ‘관장님과 링 밖에서는 싸우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맞기만 했습니다.’ 강용이가 그런 놈입니다. 미워할 수가 없죠.” [황현철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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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데뷔전을 앞두고 락커룸에서.

■ 김강용 프로필
- 출생 : 1988년 8월 19일
- 소속 : 강서문성길복싱클럽
- 신장 : 169Cm
- 매니저 : 김보현(국내), 이현석(해외)
- 스탠스 : 오소독스
- 타이틀 : 제37회 라이트급 신인왕
- 총전적 : 5전 4승 1패

■ 전적
2007.01.23. 김재훈 4회판정패 (부천) 프로데뷔
2012.02.27. 김성재 4회판정승 (완주)
2012.03.09. 최 선 4회판정승 (완주)
2012.03.23. 강기성 6회판정승 (완주)
<제37회 전국신인왕전 결승전> 라이트급 우승
2015.05.08. 에드가르도 토레스 4회판정승 (필라델피아)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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