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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여자 축구의 위대한 시작 - 이준석의 킥 더 무비<그레이시 스토리>

세계 최강 미국 여자 축구, 하지만 1978년엔…

이제 막 강호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미국 남자 축구와 달리 미국 여자 축구는 이미 세계 최강입니다. 여자 월드컵 2회 우승과 올림픽 3회 우승을 자랑합니다. 1999년 미국 여자 월드컵은 미아 햄과 같은 슈퍼스타를 탄생시키며 여느 남자 월드컵 못지않은 뜨거운 열기와 관중 동원을 이루어 냈습니다.

하지만 미국 여자 축구가 옛날에도 이렇게 강했던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여자들은 축구를 할 수 없다’는 편견은 다른 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미국 여성들이 축구를 즐기고, 세계 최강국에 오르게 되었으니 분명 선구자들은 있었겠지요. 이 영화는 바로 그 선구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그레이시 스토리(Graci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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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남학생들 속에서 축구를 하는 여학생의 이야기

때는 1978년, 장소는 미국 뉴저지입니다. 그레이시는 남자 형제들 사이에 홀로 낀 여고생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아끼는 오빠가 있지요. 그레이시의 오빠는 축구선수입니다. 자상하면서도 리더십이 있는 오빠를 그레이시는 자랑스러워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오빠는 축구 경기가 있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면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죠.

충격을 받은 그레이시. 그녀는 오빠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직접 축구선수의 길을 가고자 결심합니다. 하지만 1978년 당시는 ‘여자 축구’라는 개념조차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자들밖에 없는 축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하겠다는 그레이시를 모두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결국 삶의 갈피를 잃고 방황하는 그레이시. 학업 성적도 떨어지고, 친구들과 함께 파티와 술에 탐닉하며 대학생들과 데이트를 하는 등 방탕한 생활에 빠집니다. 이를 보다 못한 그레이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학교 측에 그레이시의 축구부 입단을 요구하고 결국 청문회 끝에 그레이시는 축구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여학생을 단순히 데이트 상대로나 생각하는 축구부의 남학생들은 그레이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녀에게 거친 몸싸움을 걸고, 일부러 반칙을 해 코뼈를 부러뜨리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포기하려는 그레이시. 하지만 그레이시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간호사였던 그레이시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도 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간호사까지가 내 한계였어. 하지만 넌 꿈을 잃지 않도록 해라.”

결국 그레이시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의 길을 택합니다. 남학생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체력을 보강하고, 한때 축구선수였던 아버지에게 기술을 전수받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요한 경기에서 주전으로 선발됩니다. 처음 뛰게 된 경기에서 그레이시의 상대편 선수들은 거친 파울로 그레이시를 위협합니다. 하지만 그레이시는 몸싸움을 이겨내고 화려한 드리블로 결국 결승골을 뽑아냅니다.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축구부 남학생들은 물론, 시기하거나 한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여학생들까지 그녀에게 달려들며 승리를 만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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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슈.

‘엘리자베스 슈’의 실화로 미국 여자 축구 리그의 시작을 알리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모델이 된 사람은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슈(Elisabeth Shue)입니다. <라스베거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에 니콜라스 케이지와 같이 출연했던 배우입니다. 또한 본 영화에서 그레이시의 어머니로 출연하기도 했죠. 그녀는 학창 시절 실제로 남자 축구팀에서 뛰었던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의 활약이 바탕이 되어 미국 여자 축구 리그가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여자 축구 최강국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사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는 유달리 여성 문제를 다룬 것들이 많습니다. 축구장에 출입할 수 없는 이란 여성들의 처지를 그린 <오프사이드>도 그렇고, 이 영화 <그레이시 스토리>도 그렇습니다. 또 <슈팅 라이크 베컴>도 인도계 영국 집안의 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지요.

가장 남성적이고 거친 것으로 알려진 스포츠 축구. 하지만 서서히 여성 축구의 위상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에 들어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분야가 여성들에게 개방되면서 여성 인권이 향상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여성 문제를 다룬 축구영화가 많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남성은 육체적인 면에 강하고, 여성은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에 강하다’라는 생각이 꼭 진리는 아니라는 점도 요즘 부쩍 강조되고 있습니다.

물론 성별에 따른 차이는 존재하고 그 차이가 차별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서로 존중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여성 운동 선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감성적인 면에 뛰어난 남성 헤어디자이너나 미술가, 요리사들이 이제는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닌 것처럼요. 이 영화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런 가치들이 어떤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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