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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잉글랜드를 이겼다고?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더 게임 오브 데어 라이브스>

미국과 잉글랜드 축구, 그 질긴 인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C조 첫 경기에서는 작은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우승후보 잉글랜드와 신흥 강호 미국이 경기를 했죠. 전반 초반의 선제골로 앞서나가던 잉글랜드. 하지만 나중에 골키퍼의 어이없는 실수로 동점골을 미국에게 헌납합니다. 경기 결과는 1: 1.

그런데 당시 경기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60년 전의 경기를 떠올렸습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지금은 그래도 미국 축구가 세계 랭킹 20위 내를 왔다 갔다 하며 발전된 기량을 뽐내고 있지만 1950년에만 해도 세계최강 잉글랜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킨 것이지요.

인터넷은커녕 중계방송도 없었던 시대. 미국과 영국의 유명 신문사들은 미국이 1:0으로 이긴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잉글랜드가 미국을 10:0으로 이겼다는 기사를 낼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실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포츠의 나라입니다. 그 중심에는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같은 북미 고유의 스포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 축구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1960년대에 펠레와 베켄바우어 등 세계적인 스타를 영입하여 의욕 넘치게 시작했던 북미 축구리그(NASL)는 처참하게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미국 축구는 다시 도약을 준비했죠. 1996년 메이저리그 축구(MLS)가 10팀으로 출범합니다. 그리고 2012년 현재 18개 팀으로 늘어났죠. 게다가 시애틀 사운더스(Seattle Sounders) 같은 팀은 시애틀을 연고로 한 미식축구나 야구팀보다도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프로축구만이 아닙니다. 미국 대표팀은 2012년 2월 현재, FIFA 랭킹에서 우리보다 세 계단 앞선 3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남아공 월드컵 당시에는 14위까지도 치솟았습니다.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에게 매번 패배하기만 하던 옛날의 모습에서 벗어나 요즘 들어서는 멕시코에 근소한 우세를 점하고 있죠.
이처럼 미국 축구가 상승세를 거듭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대한 스포츠 시장과 인프라, 타고난 신체조건, 잘 정착된 학원 스포츠 문화, 각 구단들의 건전한 재정 상태 등등.

하지만 저는 다른 것에서 그 이유를 찾고 싶습니다. 사실 다른 스포츠에 가려서 두드러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미국 축구 역시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근대부터 조용히 이어져 온 미국 축구의 역사가 오늘날 미국 축구의 번영을 이끄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는 앞서 소개한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의 이변도 자리하고 있죠.

소개할 영화는 그 이변을 다룬 영화입니다. 미국이 초창기 월드컵에서 당대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던 잉글랜드를 격파한 기적 같은 이야기 말입니다. <더 게임 오브 데어 라이브스(The Game of Their Live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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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브라질 월드컵, 미국이 일으킨 기적

영화는 요즈음 미국의 어느 축구장에서 시작합니다. 미국 프로축구 리그인 메이저리그 사커(MLS) 올스타전이 한창입니다.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의 나라라는 미국에도 어느덧 축구 붐이 일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어느 노신사가 감개무량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는 맥스키밍(Dent Mcskimming)입니다. 미국 축구의 태동기인 1940~50년대부터 스포츠 기자를 해 오던 사람이지요. 축구장을 가득 메운 미국인들을 보면서 그는 “미국 축구가 언젠가는 세계를 따라잡을 줄 알았다”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맥스키밍이 젊었던 시절, 그러니까 1950년, 세인트루이스의 어느 근교 도시에 축구를 좋아하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미국인이 으레 그렇듯 야구나 미식축구 같은 경기에 열광하는데 이 청년들은 틈만 나면 잔디에서 공을 차면서 최고의 축구선수를 꿈꾸죠. 최고의 골키퍼인 프랭크 보기(Frank Borghi), 터프한 수비수인 찰리 콜롬보(Charlie Colombo), 뛰어난 공격수인 지노 파리아니(Gino Pariani)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1950년 브라질 월드컵 미국 대표팀 선수 선발에 참여하기로 결심합니다.

가족의 반대와 주변의 어려운 여건을 뚫고 미국 대표팀에 선발된 그들. 하지만 그들 앞은 난관투성이입니다.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선수들과 불화가 생깁니다. 경기 스타일이나 철학이 다른 그들은 사사건건 다툽니다. 설상가상으로 뉴욕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잉글랜드 대표팀과 친선전을 가지는데 수비 진영이 붕괴되면서 대패를 하게 되죠.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이자 스타플레이어인 스탠리(Stanley Mortensen)는 미국 대표팀을 브라질로 휴가나 떠나는 한량 취급합니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유니폼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고, 숙소도 변변찮은 곳에 묵으며, 브라질 현지에서 경기장까지 갈 항공편조차 구하지 못한 미국 팀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집니다.

하지만 미군이 도움의 손길을 뻗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자부심을 가지라며 미군 측에서 유니폼과 항공편을 제공한 것이지요. 그리고 미국 대표팀은 마침내 본선 무대에서 자신들을 무시했던 잉글랜드 팀을 다시 만납니다. 과연 미국 팀은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프랑크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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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에 기초한 미국 문화의 힘이 대영제국을 압도하다


영화의 결말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죠? 사실 이 경기는 아이티에서 이민 온 가헨스(Joe Gaetjens)의 결승골로 미국이 승리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기도 한 미국 선수들은 대개가 이민자 출신들이었습니다. 주인공인 보기는 이탈리아계 이민자였고, 공격수인 수자(Souza) 형제는 포르투갈 출신이었고, 벨기에 출신의 수비수 마카(Maca)도 있었습니다.

반면 당대 최고를 달리던 잉글랜드 축구팀은 말 그대로 호화군단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잉글랜드는 이전 월드컵까지만 해도 출전을 하지 않았습니다.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존심이 있었기에 프랑스 주도의 FIFA가 만든 월드컵을 가볍게 생각한 거죠. 축구 종주국이 빠진 월드컵은 생각할 수 없었기에 FIFA는 잉글랜드를 포함한 영연방에 끊임없이 참가를 요구했죠. 결국 영국을 구성하는 4개 나라가 따로 예선전을 치르고 그 중 두 개 나라는 월드컵에 무조건 출전할 수 있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회가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입니다.

잉글랜드는 당연히 기세등등하게 출전을 했고, 세계에 종주국의 위상을 떨치기 위해 프로 리그의 올스타들로 팀을 구성해 나왔습니다. 당연히 우승을 할 거라는 기세였죠. 마치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자랑하던 대영제국의 위용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죠.

그런 잉글랜드 앞에 무명의 이민자 출신으로 구성된 미국 팀은 보잘것없어 보였겠죠. 하지만 미국 팀은 결국 승리했습니다. 이 장면은 꽤 상징적입니다. 잉글랜드 최고의 올스타들로 구성된 선수들이 흑인까지 포함된 이민자 출신의 무명팀에게 지는 것. 영국인이 지배자로 군림했던 대영제국이 쇠망하고, 세계 각지의 이민자를 받아들여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미국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미국이 가진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죠. 넓은 국토, 개척자 정신, 민주주의 문화, 과학기술 우대, 창의성을 중시하는 교육 등등.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리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를 하는 미국 축구 대표팀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메이저리그 사커 역시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비록 후발주자이지만 유럽 리그를 무조건 따라 하지 않고, 미국의 실정에 맞게 제도를 보완해 나가고 있죠.

또한 초창기에는 주로 남미나 유럽 이민자들이 팬들이었다면 지금은 점점 다양한 사람들이 메이저리그 축구를 즐기고 있습니다. 선수 구성 역시 유럽과 남미는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다양한 출신의 선수들이 모여 독특한 리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죠.

이런 문화적 다양성의 힘이 결국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50년의 기적이겠지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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