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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철의 링딩동] 메이웨더 vs 파퀴아오, 미묘한 선악 대결의 구도
오는 5월 3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 주 라스베가스 MGM 그랜드 호텔에서 개최되는 플로이드 메이웨더(미국)와 매니 파퀴아오(필리핀)의 천문학적인 ‘전(錢)의 전쟁’은 국내도 그렇고 해외에서도 메이웨더의 승리를 예상하는 평이 훨씬 많다. 그런데 ‘누구의 승리를 원하는가?’라는 선호도 조사에서는 파퀴아오가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에도 ‘세기의 대결’이라는 명목으로 전 세계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수많은 명승부가 존재했다. 1970년대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의 헤비급 서바이벌을 거쳐 1980년대 ‘패뷸러스 포(fabulous four)’로 불리던 슈거 레이 레너드, 토마스 헌즈, 로베르토 두란, 마빈 해글러 간의 슈퍼 파이트들은 지금까지도 복싱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경기로 회자되고 있다. 경량급에서는 45전승(44KO)의 카를로스 사라테와 29전승(29KO)의 알폰소 사모라의 멕시코 동문 대결, 체급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일깨워준 윌프레도 고메스(33전 32승(32KO) 1무)와 사라테(52전승 51KO승) 전, 살바도르 산체스와 고메스 전 등이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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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퀴아오(오른쪽)에게 8회 종료 TKO로 패한 호야(2008년 12월 6일). 이 경기는 호야의 은퇴경기가 됐다. 사진출처=philippine360.wordpress.com

대부분의 빅 매치가 그렇듯이 응원하는 팬들은 양분되기 마련이다. 엇비슷한 실력과 막상막하의 업적을 쌓은 팽팽한 톱 복서 간에 자웅을 겨루는 일전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지지하는 팬들의 비율이 큰 격차를 나타낸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이 점에서 이번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경기는 좀 특별하다. 객관적으로는 메이웨더의 승리를 예상하면서도 파퀴아오가 승리하기를 바라는 팬들이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서도 압도적으로 많다. 필리핀을 포함한 동양권의 분위기야 당연히 그렇더라도 유럽, 남미뿐 아니라 메이웨더의 조국인 미국에서조차 그런 현상이 감지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메이웨더 팬들이 기분을 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대결은 마치 선(파퀴아오)과 악(메이웨더)의 대결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두 선수가 걸어온 길이나 사생활, 경기 스타일에서부터 국적까지,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두 선수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메이웨더의 영악한 이미지가 상대적 약자로 평가된 파퀴아오의 선전을 바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기대심리를 더욱 증폭시킨 영향도 크다. 메이웨더가 디지털 시대의 퍼펙트한 복싱을 구사한다면 파퀴아오는 아날로그 시대의 투사 정신을 간직한 진정한 파이터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복싱의 역사를 수놓았던 빅 매치들 중에서 한 쪽이 일방적인 지지를 받았던 경기가 예전에도 가끔 있었다. 과거에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던 대상이 스마트한 테크닉을 갖춘 핸섬한 백인 복서였다면, 지금은 필리핀 국적을 가진 동양인이라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지금처럼 선악 대결의 구도로 한 쪽이 일방적인 지지를 받았던 과거의 명승부를 2개를 돌아본다. 살짝 ‘스포’를 한다면 2경기 모두 '선'이 패했다.

#1. 아론 프라이어 vs 알렉식스 아르게요(WBA Jr.웰터급 타이틀매치, 1982년 11월 13일)
알렉식스 아르게요(니카라과)는 페더급과 Jr.라이트급, 라이트급을 차례로 석권하고 프로복싱 사상 6번째로 세 체급을 제패한 명복서다. 1982년 당시 WBC 라이트급 챔피언이던 아르게요는 ‘귀공자’라는 별명처럼 반듯한 외모와 깨끗한 매너, 출중한 실력으로 전 세계의 대표적인 호감형 인기복서였다. 게다가 세계기구가 WBA와 WBC 2개밖에 없던 당시 4체급 제패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아르게요가 그 벽을 가장 먼저 허물어 주기를 바라는 복싱팬들의 기대도 컸다.

지금은 수많은 기구가 난립하고(메이저 기구는 IBF와 WBO까지 4개만 인정) 기구마다 슈퍼챔피언, 잠정챔피언 등을 양산해서 세계챔피언의 위상이 많이 낮아졌지만 30여 년 전에는 한 체급에서 세계챔피언이 되기도 무척이나 힘든 시대였다. 체급의 벽을 넘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로 70~80년대 초반까지는 웬만한 레벨이 아니면 두 체급을 정복한다는 것도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런 시절에 훤칠한 백인 미남 복서가 세 체급을 석권했으니 미국 국적이 아니었음에도 아르게요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다.

당시 Jr.웰터급은 아론 프라이어(미국)가 WBA를, 김상현으로부터 타이틀을 빼앗아간 사울 맘비(미국)가 WBC를 점령하고 있었다. 31연승(29KO)으로 5차 방어에 성공 중인 프라이어에 비해 훨씬 낮은 평가를 받았던 맘비(당시 32승(13KO) 12패 5무) 측은 꾸준히 아르게요에게 추파를 던지며 4체급 도전을 유혹했다. 맘비를 상대로 4체급을 제패한 후 프라이어와 통합전을 가진다면 훨씬 큰 개런티가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아르게요는 맘비의 제의를 뿌리쳤다. 아르게요는 진정한 강자를 상대로 수립한 기록이야말로 훨씬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사이 맘비는 르로이 헤일리(미국)에게 타이틀을 빼앗겼고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Jr.웰터급 당대 최고의 복서 프라이어를 상대로 아르게요의 위대한 도전전이 펼쳐졌다. 경기 전 예상은 77전 72승(59KO) 5패를 기록하고 있던 아르게요가 6-4 정도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르게요의 14회 TKO패. 반 박자 빠른 타이밍으로 무수하게 펀치를 뻗은 프라이어는 경기 내내 아르게요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결국 14회에서 가공할 연타로 레프리 스톱을 끌어냈다. 이 경기는 국내에도 위성 생중계되어 많은 국내 팬들을 실망시켰는데, 다음날엔 WBA 라이트급 타이틀매치에서 고 김득구 선수가 레이 맨시니(미국)에게 같은 14라운드에 KO패하고 운명을 달리하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2주일 후인 11월 28일에는 당시 국내 유일의 세계챔피언이던 김철호(WBC S플라이급)마저 라파엘 오로노(베네수엘라)에게 6회 KO패로 6차 방어에 실패, 국내 복싱계는 무관으로 전락하고 만다. 국내 복싱팬들에게 1982년 11월은 암흑의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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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아르게요(오른쪽)는 프라이어의 벽을 넘지 못했다(1982년 11월 13일).



#.2 버나드 홉킨스 vs 오스카 델 라 호야(WBA WBC IBF WBO 미들급 통합타이틀매치, 2004년 9월 18일)
‘골든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오스카 델 라 호야(미국)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의 유일한 금메달리스트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했던 슈퍼스타다. Jr.라이트급과 라이트급을 거쳐 Jr.웰터급의 No. 1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멕시코)를 꺾고 세 체급을 제패한 뒤 퍼넬 휘태커(미국)를 상대로 웰터급까지 점령했다. 2001년 6월 하비엘 카스틸료호(스페인)에게 판정승, 레너드와 헌즈에 이어 사상 3번째로 5체급을 석권했으며, 3년 뒤에는 WBO 미들급 챔피언 펠릭스 스텀(독일)을 누르고 프로복싱 역사상 최초로 6체급을 제패했다.

당시 미들급에는 버나드 홉킨스(미국)가 10년째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고 IBF(18차 방어)에 이어 WBC(5차 방어), WBA(4차 방어) 타이틀까지 거머쥔 채 새로운 WBO 홀더인 호야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트헤비급으로도 손색이 없는 체격과 탁월한 터프니스로 미들급(72.57Kg)을 평정한 홉킨스에 비해 Jr.라이트급(58.98Kg)에서 시작한 호야의 버거운 도전은 경기 전부터 이미 압도적인 불리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어떤 상대든 피하지 않고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온 호야에게 팬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승리 확률 20% 안팎으로 냉정을 넘어 비정한 예상평이 연일 쏟아졌음에도 호야가 전 세계 대중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지금의 파퀴아오와 비슷한 부분이다. 오히려 호야의 상황이 더 나빴다. 홉킨스는 분명히 강했으나 다소 지저분한 경기 스타일로 인해 미들급 레전드였던 카를로스 몬존(아르헨티나)이나 마빈 해글러(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았고 팬들의 호감도도 좋지 않았다. 반면 복싱 스킬 외에도 매력적인 외모, 끊임없는 도전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호야가 홉킨스를 거꾸러뜨리는 기적을 연출하기를 대다수의 복싱팬들은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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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킨스의 보디블로우 한 방으로 생애 첫 KO패를 경험한 오스카 델 라 호야(2004년 9월 18일).

하지만 체급과 체격, 힘의 차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홉킨스는 초반부터 냉정하게 경기를 운영했고, 홉킨스의 페이스에 끌려가던 호야는 9회 1분 38초만에 레프트 보디블로우 한 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고통을 호소하며 생애 처음으로 링 위에서 레프리의 카운트아웃을 들은 호야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호야는 이후 재기하여 2007년 5월 메이웨더에게 1-2로 판정패하며 WBC S웰터급 타이틀을 상실하고 다음 해 12월 파퀴아오에게 8회 종료 TKO패로 무릎을 꿇은 뒤 현역에서 은퇴했다.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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