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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몸으로 종주국 인도를 홀린 대학생
인도가 발상지인 카바디는 술래잡기, 피구, 격투기를 혼합한 형태의 스포츠다. 한국에서는 지난 해 인천아시안게임 때 소개된 정도지만 카바디는 인도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에는 마힌드라 그룹이 역사상 최초로 프로 카바디 리그를 만들었다.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 송출되는 <스타스포츠>를 통해 전 경기를 생중계하고 외국인 선수 쿼터 제도(팀당 4명 보유)를 만들며 카바디의 저변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프로 카바디 리그에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인도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리그 속에서 화려한 움직임으로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환상적인 몸짓을 보여주며 한국 카바디의 첫 아시안게임 메달을 선사했다. 그는 22살의 한국 국가대표 에이스 레이더(공격수)이자 온몸으로 인도를 홀린 젊은 청년. 이장군이다.

※ 카바디는 인도의 국기(國技)로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다. 국제대회는 주로 7인제를 사용하며 득점으로 승패를 가린다. 레이더(공격수) 한 명이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 온몸을 이용해 상대를 터치한 후 돌아오면 터치한 선수 수만큼 공격팀에 점수를 준다. 터치 당한 선수는 바깥에서 대기하다가 자기 편이 득점한 수만큼 경기장에 복귀한다. 만약 레이더가 안티(수비수)에게 잡히면 수비팀에게 1점을 주고 레이더가 아웃된다. 경기장을 벗어나면 공·수 상관없이 해당 선수는 아웃되고 상대편에 1점이 부여된다.

우연한 만남, 카바디 세계로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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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은 '대학생' 이장군을 '카바디 스타플레이어' 이장군으로 만들었다.


카바디와 이장군의 인연은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이장군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운동을 섭렵했다. 중학생 시절 축구선수를 꿈꾸기도 했었고 고등학생 때는 조정선수였던 사촌 동생의 영향으로 부산에서 포항으로 조정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조정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돌아온 이장군은 체육교사를 꿈꾸며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11년 1월. 동아대에서 훈련 중이던 이장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카바디라는 종목이 있는데 네 신체조건이 거기에 딱 적합하다.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새로운 종목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이장군은 카바디 연습장을 찾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정선수 할 때 체력훈련을 정말 강하게 했다. 한 레이스 끝나면 힘들어서 바로 토하는 일도 종종 있었을 정도다. 조정을 그만두며 운동선수를 한다는 생각은 접었다. 그래서 카바디 선수를 해보라는 제의도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직접 본 카바디는 볼수록 이장군을 끌어당겼다. 직접 뛰었고, 탁월한 체력과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이장군은 어느새 국가대표가 되었다. “카바디는 직접 해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마구잡이로 하는 줄 알았는데 모든 자세와 동작에 이름이 있고 방법이 있었다. 그 방법을 하나하나 배우며 카바디에 푹 빠졌다. 동아대에서 만났던 이상황 사무국장님이 아니었다면 카바디 선수 이장군도 없었을 것이다.”

183cm의 큰 키와 긴 팔, 축구를 하며 갈고 닦은 빠른 방향전환과 조정으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 이장군은 카바디에 딱 맞는 신체조건을 가졌고 훈련을 해온 준비된 인재였다. 상비군과 함께 연습을 시작한 이장군은 2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설레고도 무거웠던 태극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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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군은 실내 무도아시안게임을 통해 세계무대에 첫 선을 보였다.


한국 카바디의 역사는 매우 짧다. 국가대표팀이 생긴 지 겨우 11년밖에 되지 않았다. 대표팀은 국내에서 열리는 2014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많은 변화를 했다. 2012년부터 인도 전지훈련을 떠났고 훈련지에서의 인연으로 인도 카바디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자비드 샬마를 초빙해 기본기를 다졌다. “내가 처음 카바디를 접한 시기의 한국 카바디는 시작 단계에 있었다. 전문코치가 없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디오나 영상을 보면서 따라 하고 있었다. 그러던 2012년부터 매년 인도 전지훈련을 떠나났고 거기에서 만난 샬마 코치도 한국으로 왔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2013년 인도 전지훈련을 잊을 수 없다. 국가대표인 우리가 인도 현지 팀과의 친선경기에서 완전히 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인도가 카바디 종주국이긴 해도 지역팀에게 패했다는 사실에 큰 좌절감과 종주국과의 수준 차이를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진짜 열심히 운동했다.”

이장군은 인천 아시안게임의 리허설과 같았던 2013 인천 실내 무도아시안게임을 통해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인이었던 내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경기 시작 전 아나운서의 소개를 받으며 입장하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첫 상대는 우리나라처럼 카바디 신생국가인 투르크메니스탄이었다. 카바디 강호인 인도, 이란전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려 했지만, 데뷔전이라는 사실에 전력을 다했다. 대회를 앞두고 당했던 허리 부상을 잊고 온몸을 던졌다.” 한국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동메달이라는 소중한 성과를 남겼다.

첫 대회를 무사히 마친 이장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인도에서 사상 최초로 프로리그가 열린 것이다. 리그협회는 각국의 카바디 협회에 공문을 보내 드래프트에 참가할 선수를 모집했다. 한국은 이장군을 비롯한 김성렬(이상 벵갈 워리어스), 엄태덕(파트나 파이어리츠), 홍동주(다방 델리)의 훈련 영상을 인도에 보냈고 모두 입단에 성공했다. 프로리그는 선수들의 성적을 바탕으로 카테고리를 나눴는데 A급을 받은 국가대표 주장 엄태덕을 제외한 세 선수는 B급을 받았다. 이장군은 “내가 B급 선수가 아니라는 걸 직접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조용히 칼날을 갈았다.

한국에서 온 레이더, 온몸으로 인도를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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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카바디를 대표하는 '인도 4인방' 김성렬, 홍동주, 엄태덕, 이장군 (왼쪽부터)


리그 초반, 이장군은 경기장 안팎으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통역사가 없어 의사소통이 힘들었고 향이 강한 인도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다. 경기장 안에서는 텃세에 시달리며 출장기회도 잡지 못했다. “리그는 규모와 명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인 선수를 의무적으로 보유하라는 조항을 만들었다. 하지만 종주국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몰라도 텃세가 있었다. 마치 들러리 서는 느낌이었다. 리그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를 데려왔지만 정작 경기는 인도선수들만 했다. 간혹 경기장에 들어가도 우리를 배제한 채 플레이했다.”

힘든 인도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함께 바다를 건넌 김성렬과 한국 음식 덕분이었다. “함께 인도로 건너간 (김)성렬이 형의 도움이 정말 컸다. 영어를 잘하는 형이 내 입이 되어줬다. 그리고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형의 존재가 정말 크고 고마웠다. 인도로 떠날 때 혹시나 싶어 싸간 한국 음식도 큰 도움이 되었다. 라면과 참치가 없었으면 제대로 먹지 못해 진짜 힘들 뻔했다. 특히 군대에서 애용하던 '맛다시'는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2014년 7월 31일(현지시각). 프로 카바디리그에 지각변화가 일어난 날이다. 인도선수만 가득했던 리그에 외국인 선수가 최초로 선발 출장해 베스트 레이더(경기 MVP)까지 받은 것이다. 이장군이 마침내 포효한 것이다. 이날 그의 활약에는 김성렬의 조언이 큰 힘을 발휘했다.

“그날 경기가 리그에서 첫 선발게임이었다. 전날 연습 도중 텃세에 짜증이나 거칠고 과감한 플레이를 많이 했는데 그게 감독에게 통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외국인 선수 최초 선발출장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바디는 수비할 때 선을 넘지 않도록 서로 손을 잡아준다. 그런데 우리 팀 선수들이 내 손을 잡아주지도 않고 공격할 때도 자기들끼리만 했다. ‘내가 여기에 왜 있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 성렬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하지 마! 코치 말 듣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원래 하던 대로 해!'라고 말해줬다. 그 말에 긴장도 풀리고 다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침 우리 팀에 레이더가 모두 아웃되어 내게 공격기회가 몰렸다. 자신감을 갖고 지독하리 만큼 뛰었다. 그리고 경기 끝나고 리그에서 내게 베스트 레이더 상을 줬다. 처음에는 ‘외국인 선수가 조금 눈에 띄었으니 주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 기록을 보니 내가 그날 가장 많은 점수(8득점)를 올렸더라. 진짜 내가 잘해서 주는 상이구나 싶었다.”

이날 경기를 계기로 이장군은 승승장구했다. 다음날 열린 경기에서 15득점을 올리며 2경기 연속 베스트레이더가 되었다. 이장군에게 꾸준히 선발기회가 주어졌고 이장군도 기대에 부응하는 활약을 이어나갔다. 팀과 리그에서도 이장군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TV를 틀었는데 스타 레이더라는 영상에 내가 나왔다. 처음에는 이상하기도 하고 내가 저기 왜 나오나 싶었다. 인지도를 느낀 건 거리를 돌아다닐 때였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사진과 사인을 부탁했다. 사인도 안 만들어놔서 당황했지만, 요령껏 해줬다.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눈에 띄게 높아진 인지도만큼 놀랄만한 기록도 남겼다. 팀은 8팀 중 7위에 그쳤지만 총 55포인트를 따내며 이 부문 19위에 올랐다. 이는 외국인 선수 1위, 팀 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리그 창립자인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은 “카바디 리그의 슈퍼스타가 될 것”이라는 극찬을 보냈다.

아쉬웠던, 그러나 잊지 못할 인천 아시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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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카바디 대표팀은 인천에서 사상 첫 메달을 목에 걸었다.


프로리그를 마치고 돌아온 뒤 연이어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인도에서 소중한 경험을 쌓고 돌아온 이장군은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레이더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건 다시 오기 쉽지 않은 기회다. 프로리그를 경험하며 인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털어냈고 많은 정보도 알아왔기에 잘하면 금메달까지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자마자 국내에 남아있던 선수들에게 인도선수들의 장·단점을 알려주며 대회를 준비했다. 진짜 이 악물고 열심히 했다.”

조별예선에서 일본(44-17)과 말레이시아(38-32)를 꺾은 한국은 준결승에서 그토록 벼르던 인도를 만났다. 전반전을 12-14라는 비슷한 점수로 마쳤지만, 후반전에 크게 밀리며 25-36으로 석패했다. “인도를 정말 이기고 싶었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반전 끝날 때까지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다. 승패를 가른 건 경기경험이었다. 실력은 비슷하지만, 경기를 자기 쪽으로 끌고 오는 능력에서 밀렸다. 심판도 사람이니 실수를 하는데 인도가 그런 부분을 캐치해 자기 쪽으로 잘 끌고 갔다. 사실 종주국에 대한 편파판정도 있다. 인도가 애매한 플레이를 해도 우기면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화가 많이 난다.”

“실내 무도아시안게임에서도 동메달을 땄었기에 아시안 게임에서 메달 색깔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도 한국 카바디 사상 아시안 게임 첫 메달이고 더욱 큰 대회였기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로는 태극기가 꼭대기에 걸리지 못했고 애국가도 부를 수 없었다는 생각에 시상대에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카바디만 계속 할 수 없는 슬픈 현실,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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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학생으로 돌아온 이장군은 희망찬 앞날을 준비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카바디 스타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비인기 종목을 좀 잘하는 대학생일 뿐이다. 한국 카바디는 아직 발전 단계에 있다. 전국체전 종목에 포함되지 않아 실업팀이 없고 국가대표 외에는 선수생활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다. 가장 잘하는 것만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비인기 종목 선수의 슬픈 현실이다. “대학 졸업 후 카바디를 계속하고 싶다. 하지만 실업팀이 없어 국가대표선수만으로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은 체육교사를 해보고 싶어 대학원 진학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대학생 이장군은 학교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학생회에 들어 학과 일을 도맡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지난해 “너 같은 후배를 만들어 봐라”는 교수의 제안을 듣고 카바디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가 속한 동의대 팀은 지난해 열린 대학스포츠제전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급히 결성한 팀으로 거둔 놀랄만한 성적이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이장군은 새로운 꿈을 가졌다. “후배들을 국가대표로 만들어 함께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나가고 싶다. 4, 5명 정도 눈에 띄는데 체격도 좋고 힘도 좋아 기대된다. 지금 함께 뛰고 있는 형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금메달에 도전하고 싶다.”

오는 6월, 이장군은 다시 한 번 인도를 홀리러 간다. 2년 주기로 열릴 예정이었던 카바디 프로리그가 큰 인기에 힘입어 올해도 열리게 된 것이다. 모든 선수는 2년 동안 한 팀에서 뛰어야 하기에 이장군은 올해도 김성렬과 뱅갈 워리어스로 활동한다. “6월부터 리그가 시작된다고 들었다. 올해는 개인 성적도 중요하지만, 팀 성적을 끌어올려 플레이오프에 꼭 나가고 싶다. 지난해에는 지는 경기가 많아 팀 분위기도 좋지 않았는데 이를 바꿔보고 싶다.”

12억 3,000만 명으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 그들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스포츠 카바디에서 한국을 알리는 무명선수. 작은 격려와 박수 정도는 아낄 필요가 없어 보인다. [헤럴드스포츠=차원석 기자]

이장군 스타레이더 영상 링크 = https://youtu.be/1CDM6hSmNdM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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