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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철의 링딩동] 아시아 최다방어의 세계챔피언 박지현
2002년 11월 16일, 국내 최초로 여자 한국타이틀매치가 벌어졌다.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김주희를 누른 이인영은 1년 뒤 최초의 여자 세계챔피언에 등극하고 이후로 4~5년간 여자복싱은 국내 프로복싱의 부활을 견인할 새로운 흥행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무분별한 세계타이틀전의 양산은 암초가 돼 길을 막았고, 여자복싱은 권투인들이 스스로 파놓은 덫에 걸려 금세 수그러들었다.

세계타이틀전이라는 허울로 포장해 지자체의 후원을 받기 위한 프로모터들의 상술이 문제였다. 국내부터 내실을 튼튼히 다진 후 세계로 가는 단계를 밟아야 함에도,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들을 내세워 무분별하게 세계타이틀전을 주최한 결과였다.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국내 랭커의 숫자와 세계챔피언의 숫자가 비슷해지는 기현상이 초래되었다. 지난 13년간 한국타이틀매치보다 세계타이틀매치의 경기 횟수가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복싱의 사상누각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여자복싱의 세계타이틀전이 난무하게 되자 복싱팬들의 원성은 고스란히 여자복서들에게 돌아갔다. 때론 세계타이틀전이라 하기에 민망한 경기들도 있었고 상대 선수의 수준이 함량미달인 경우도 많았다. 그로 인해 뛰어난 실력을 갖춘 선수도 도매급으로 폄하되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프로모터, 이차적으로는 타이틀매치를 승인한 세계기구, 그리고 프로모터의 욕심을 제지하지 못한 KBC에 있다. 그리고 아무런 죄 없는 선수들이 직접적인 성토의 대상이 되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자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시합이 잡히면 링에 올랐던 대다수 여자복서들은 쌓은 업적보다 훨씬 무거운 상처를 마음에 새긴 채 링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10년째 꿋꿋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선수가 있다. IFBA(국제여성복싱협회) 스트로급 세계챔피언 박지현(인천대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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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BA 스트로급 세계챔피언 박지현.

탁구 유망주에서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으로
박지현은 2006년 5월 정읍에서 공진(중국)을 꺾고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현재 그녀는 아시아 여자복서 중 최다인 15차 방어에 성공 중이다. 2위는 WBC 아톰급 챔피언 고세키 모모(일본)가 진행 중인 14차 방어. 21살의 나이에 챔피언이 되어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꽃다운 청춘을 바친 값진 결과물이다. 국내 여자복싱의 전성기부터 조금씩 쇠락해가는 과정 동안 많은 여자 선수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박지현은 꾸준히 정상을 지키고 있다.

1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박지현은 운동신경이 남달리 뛰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한 탁구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곧바로 여러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이어졌다. 전국대회 3위권의 성적을 거두며 탁구 유망주로 성장한 그녀는 군포에 있는 흥진고등학교를 거쳐 인천전문대학교에 탁구 특기자로 입학하게 된다. 대학교 1학년이던 2004년 12월경, 같은 사회체육과에 다니던 친구와 함께 인천대풍체육관에 입관하여 복싱을 시작했다. 운동을 워낙 좋아했고, 순발력 향상에 도움을 주기 위해 취미 삼아 시작한 복싱은 그녀의 청춘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운동신경이 좋고 습득이 빠른 그녀가 재목감임을 한 눈에 알아본 이정국 매니저는 곧바로 그녀를 한국권투위원회 프로테스트에 출전시켰고, 복싱에 입문한 지 불과 22일 만에 프로복서 라이센스를 취득했다.

2005년 4월 2일, 복싱 입문 4개월도 안 되어 가진 프로데뷔전에서 박지현은 고경희에게 1회 KO승을 거두었고, 3연속 KO승으로 단숨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1년 후 세계 정상에 등극한 뒤 15차 방어에 이르기까지 도전자 중 만만한 상대는 거의 없었다. 전 세계챔피언 홀리 두나웨이, 조디 에스퀴벨 등 미국 도전자만 5명이었고, 박지현에게 KO패한 헝가리의 지명도전자 크리스티나 벨린스키 역시 전 세계챔피언이었다. 7차 방어 상대였던 이케야마 나오(일본)는 46세인 현재 WBO 동급 세계챔피언이다. 뤄 유지에(중국), 가미무라 사토코(일본), 주제스 나가오와(필리핀) 등 아시아권 도전자들도 대부분 세계타이틀 도전 경력이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방어의 횟수도 대단하지만 도전자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그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만만한 선수들을 상대로 쌓은 모래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박지현이 자신의 기록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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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챔피언에 등극한 2006년 공진(중국)과의 경기.

탁구코치가 세계챔피언...
20대 시절을 링에서만 보낸 박지현은 우리 나이로 서른이던 2014년 한 해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작년 5월부터 문산초등학교 탁구부 코치 선생님으로 임명된 것도 변화의 하나다. 대학 시절 취득한 자격증과 탁구선수로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복싱 외에 가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있었어도 정식으로 직장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집이 있는 인천에서 문산까지는 1시간 반 정도의 먼 거리여서 평일에는 문산여고에 있는 선수 합숙소에서 지내며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11월의 15차 방어전이 확정되자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합숙소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인천에서 문산까지 출퇴근하며 직장과 훈련을 병행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방어전 일정과 학생들의 대회 일정도 겹치는 바람에 휴직을 요청할 상황도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방어전을 한 달 정도 앞두고는 후두암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셨다. 14차 방어전을 끝내고 당초 4월로 예정되었던 15차 방어전이 계속 연기되면서 심적으로도 지친 상태에서 부친의 별세, 그리고 1년이 넘는 공백까지, 모든 여건은 최악이었다.

9년 동안 세계타이틀전을 준비하면서 이렇게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던 적도, 준비했던 훈련을 모두 소화해내지 못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멕시코의 도전자 아나히 토레스는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2-1 판정으로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수잔나 워너(미국)와의 5차 방어전 이후 2-1 판정도 처음이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 경기를 치른 탓에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매니저에게 리턴매치를 요청했다. 안정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면 완벽하게 상대를 제압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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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챔피언 홀리 두나웨이(미국)와의 지명방어전. 2009년 2월 28일.

그녀를 지탱하는 긍정의 마인드
박지현에게 기록된 2패는 체중에 그 원인이 있다. 그녀의 체급은 스트로급으로 남자 최경량급인 미니멈급(47.6Kg)보다 한 체급 아래인 여자 최경량급이다. 한계체중은 46.27kg. 이화원과의 슈퍼플라이급(52.16kg) 경기와 개성에서 치른 플라이급(50.8kg) 경기는 본인 체급을 훨씬 많이 웃돌았다. 원래 살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이라 평상시에도 48kg을 유지하는데, 선수층이 두텁지 않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계약체중이 50kg을 넘는 경기에 응하게 되었다. 4~5kg의 벽은 컸고 체중에서 오는 힘의 차이를 절감하며 판정패를 당했다. 이런 경험은 결과적으로 복서 박지현의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되었고, 본인의 체급에서는 아직까지 패한 적이 없다.

박지현은 사실 작년까지만 선수생활을 하고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 신체적으로 그만 둘 나이가 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스스로에게 완벽히 만족할 수 있는 레벨에 아직 도달했다고 판단되지 않아서 지금 은퇴하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완성된 복서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 되었을 때, 복싱 팬들에게 더 이상 보여드릴 것이 없을 때 글러브를 벗고 싶었다. 그게 올해가 될지, 내년이 될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 다만 나이에 밀리고 타의에 의하여 은퇴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최고일 때 스스로 그만둘 생각이다. 지금은 매 경기 재미있고 완벽한 경기를 하는 것이 목표다. 방어의 횟수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경기 내용으로 복싱팬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스스로도 뿌듯한 경기를 펼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햇수로 10년간 챔피언의 자리를 지키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복싱계 풍토도 많이 알게 되고 가끔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푸념이나 원망보다 고마움을 먼저 생각한다. 프로모터도, 후원자도 가끔은 약속을 어길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만큼 자라난 스스로를 돌아보며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인 것을 이해하는 까닭이다.

‘때문에’보다는 ‘덕분에’를 먼저 생각하는 긍정의 마인드는 10년간 변함없이 챔피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그녀만의 동력이 되었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는 박지현은 글러브를 벗으면 아기자기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천생 여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호기심이나 팬심이 아닌 진심이 통하는 남자, 특히 송일국 같은 남자라면 언제든 오케이다. 아시아 여자복서로 최다 방어의 기록을 계속 써내려가고 있는 박지현이 당당한 챔피언으로, 좋은 선생님으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며, 폄하된 여자복싱의 기둥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월 16일로 예정된 16차 방어전. 그녀에게는 지금 따뜻한 격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헤럴드스포츠 복싱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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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챔피언이 되면서 딸(박지현)이 복서가 된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오른쪽). 이후 어머니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 박지현 프로필

- 생년월일: 1985년 8월 1일
- 소속: 인천대풍체육관
- 신장: 162cm
- 매니저: 이정국
- 스탠스: 오소독스
- 전적: 22전 20승(5KO) 2패

■ 전적
2005.04.02. 고경희 1회KO승 (대전) 프로데뷔
2005.05.29. 이미영 3회KO승 (통영)
2005.07.10. 오수현 3회KO승 (서울)
2005.10.27. 이화원 8회판정패 (서울) <한국 여자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
2006.01.15. 니쟈 아얀방 5회KO승 (서울)
2006.05.20. 공진 10회판정승 (정읍)
2007.02.18. 치안 윌린 10회판정승 (태안)
2007.10.19. 김혜성 6회판정패 (개성)
2008.10.25. 뤄 유지에 10회판정승 (부평)
2009.02.28. 홀리 두나웨이 10회판정승 (서울)
2009.07.25. 조디 에스퀴벨 10회판정승 (서울)
2010.02.06. 수잔나 워너 10회판정승 (문경)
2010.05.01. 가미무라 사토코 10회판정승 (아산)
2010.08.15. 이케야마 나오 10회판정승 (고성)
2011.05.01. 크리스티나 벨린스키 6회TKO승 (군포)
2011.07.16. 쑨 쿤얀 10회판정승 (제천)
2011.12.11. 조디 에스퀴벨 10회판정승 (거제)
2012.05.12. 쑨 쿤얀 10회판정승 (옥천)
2012.08.25. 아나 아라졸라 10회판정승 (부천)
2013.03.24. 주제스 나가오와 10회판정승 (군산)
2013.10.05. 주제스 나가오와 10회판정승 (인천)
2014.11.29. 아나히 토레스 10회판정승 (인천)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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