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꼬마 리버풀 팬, 유럽을 가로지르다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윌>
이스탄불의 기적을 영화화
축구팬이라면 ‘이스탄불의 기적’을 들어본 바가 있을 겁니다. 2004/05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 대 AC 밀란의 경기를 지칭하는 말이지요. 당시 전반에만 3골을 얻어맞으며 끌려가던 리버풀은 후반전에 거짓말처럼 세 골을 내리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두덱(Dudek) 골키퍼의 신들린 듯한 선방에 힘입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999년에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후반 추가 시간에 기적 같은 역전극을 펼친 ‘누 캄(Nou Camp)의 기적’이 있다면, 리버풀에는 이 ‘이스탄불의 기적’이 있는 것이지요.

앞서 살펴본 <유나이티드: 뮌헨 항공 참사>가 맨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영화 <윌>은 리버풀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역시 오랜 기간 앙숙이었던 두 팀답게 축구 영화 분야에서도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군요.


이미지중앙

영화 윌(Will: You'll never walk alone)의 포스터.

이스탄불까지 홀로 걷지 않은 소년 리버풀 서포터의 이야기

윌 브레넌(Will Brennan)은 고아원에 살고 있는 11살 꼬마입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아버지는 행방불명이지요. 윌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리버풀 축구팀입니다. 제이미 캐러거나 사비 알론소, 스티븐 제라드 같은 유명 선수뿐만 아니라 케니 달글리시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경력을 줄줄 꾀고 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힘든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고 말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살자고 하지요. 어색한 만남의 시간이지만 아버지는 윌에게 선물을 하나 줍니다. 바로 이스탄불에서 열릴 2004/05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티켓입니다. 아직 리버풀은 첼시와의 준결승을 남겨 두고 있지만 윌과 아버지는 리버풀이 꼭 결승에 올라갈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스탄불로 경기를 보러 가기로 약속을 하지요.

하지만 꿈같은 행복의 시간도 잠시, 야속한 운명이 윌 부자를 덮칩니다. 윌의 아버지는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윌은 또다시 홀로 남겨집니다. 아버지의 유품인 결승전 티켓이 쓸쓸히 윌의 곁을 지켜주죠.

리버풀은 마침내 첼시를 꺾고 결승전에 올라갑니다. 상대는 세브첸코와 카카 같은 초호화 멤버를 보유한 이탈리아의 AC 밀란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모두 잃은 윌은 슬픔에 잠겨 있죠. 그러나 친구들은 윌을 격려하며 꼭 이스탄불에 축구를 보러 가라고 권유합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윌은 몰래 고아원을 빠져나와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보스니아 출신의 알렉 주키치(Alek Zukic)를 만납니다. 주키치는 소매치기를 당해 돈을 모두 잃어버린 윌을 돌봐줍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결승전 티켓이 가짜라는 게 밝혀지지요. 절망한 윌. 하지만 윌이 그려준 자신의 모습에 감동한 주키치는 윌과 함께 이스탄불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스탄불로 가던 도중, 보스니아의 고향에 들린 윌과 주키치. 마을 사람들은 왠지 그를 차갑게 대합니다. 알고 보니 주키치는 한때 NK 사라예보 축구팀에서 뛰던 스타 플레이어였습니다. 고향에 금의환향하여 마을 어린이들에게 공을 나눠주다가 실수로 한 소년이 공을 쫓아 지뢰밭에 들어가 죽는 사건이 있었죠. 그 이후로 주키치는 축구를 그만둡니다.

아픈 사정을 간직한 윌과 주키치. 그들은 과연 이스탄불에 입성할 수 있을까요?

레전드 선수
클럽 축구는 물론 프로의 세계입니다. 프로의 세계에서 개인과 구단 간에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구단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클럽을 위해 오랜 시간동안 많은 기여를 한 선수는 기억될 가치가 있고, 또 구단과 팬들이 그를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선수들을 레전드(legend, 전설적인 선수)라고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포츠 문화에서 이런 레전드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윌>은 많은 부러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리버풀의 기적적인 승리를 한 개인 서포터의 관점에서 영화화하고, 그 영화에는 제라드(Steven Gerrard)나 달글리시(Kenny Dalglish)처럼 시공을 초월한 리버풀의 레전드들이 등장합니다. 명문 구단을 만드는 데에는 물론 자금이나 우승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퇴적된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가 아닐까요? 우리는 일종의 고고학적 단층과도 같은 영화 <윌>을 보면서 리버풀을 오늘날의 명문 구단으로 만든 요소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지중앙

명문 구단 리버풀의 엠블럼. You'll never walk alone이란 문구가 쓰여있다.

축구팬의 애국가, 클럽송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hold your head up high,
폭풍 속을 걸어가더라도 당당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어두움 속에서 두려워하지 마세요
At the end of the storm is a golden sky,
저 폭풍이 지나면 금빛 하늘이 열릴 테니까요
And the sweet silver song of a lark.
그리고 종달새의 은빛 노래가 들려오죠
Walk on through the wind, walk on through the rain,
저 거친 바람 속을 당당히 걸어요, 저 폭풍우 속에서도 전진하는 거죠
Though your dreams be tossed and blown,
비록 젖혀지고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걸어가요, 가슴속에 희망을 안고 걷고, 또 걸어요
And you’ll never walk alone,
그래, 우리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니까요
You’ll never walk alone.
절대로 혼자 걷는 게 아니니까요.

이 영화의 부제인 ‘유 윌 네버 워크 얼론(You’ll never walk alone)’은 리버풀 팬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사실 셀틱과 아약스 등 여러 명문 클럽에서도 이 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이 노래는 뮤지컬 ‘회전목마’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미혼모가 된 여주인공을 위해 불린 노래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기를 주는 특유의 노래 가사는 그라운드에서 뒤는 선수들을 위한 찬가로 바뀌어 사랑받고 있지요.

서포터들에 의해 불리던 이 노래는 리버풀의 공식 엠블럼에도 수놓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노래의 제목을 딴 영화까지도 나왔군요. ‘You will never walk alone’은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로 해석되지만 이 영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You Will never walk alone(윌 너는 혼자 걷지 않아)’로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11세의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절망적인 상황, 주인공 윌은 이제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인 리버풀의 경기를 보기 위해 유럽 대륙을 횡단합니다. 축구팬이 아닌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한심할 수도 있겠지만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를 이어 자기 고향의 축구팀을 응원하는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영화의 마지막에 윌이 경기장에서 죽은 아버지의 환영과 조우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실 리버풀 축구팀은 한때 전성기도 있었지만 요즘은 바르셀로나나 뮌헨처럼 매 시즌 우승컵을 쓸어 담지도 못합니다. 맨체스터 시티나 첼시처럼 갑부 구단주를 만나 화려한 선수 구성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유럽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 곳곳에는 이 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이스탄불의 기적에서 봤듯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끈끈한 선수 구성과 포기하지 않는 정신, 그리고 평범한 리버풀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서민적인 팀컬러가 리버풀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영화 <윌>은 그런 리버풀의 정신에 바치는 찬가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노래 ‘유 윌 네버 워크 얼론’은 이런 리버풀의 서민적이고도 위대한 정신을 집약한 노래이자 구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클럽을 대표하는 노래를 ‘클럽송(club song)’이라고 부릅니다.

리버풀 말고도 세계 여러 구단에는 클럽송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기 전 모든 서포터들이 일제히 머플러를 펼치고 웅장하게 부르는 클럽송은 경기장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지요. 유명한 클럽송들로는 FC 바이에른의 ‘FC Bayern Stern des Sudens(FC 바이에른 남부의 별)’, AS 로마의 ‘Roma Roma Roma(로마 로마 로마)’, FC 바르셀로나의 ‘Cant de Barca(바르샤의 노래)’ 등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K리그에도 유명한 클럽송이 있습니다. 인기 밴드 노브레인이 수원 블루윙즈에 헌정한 ‘나의 사랑 나의 수원’이 대표적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