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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네치아의 교훈
국가생존위해 비잔틴제국 속국까지 자처
동서 해상교역로 확보 철저한 이익추구
강력한 해군력·견고한 국익외교 철칙
해상강국의 저력, 대한민국에 큰 울림




“베네치아 사람이 먼저, 그리스도교도는 그 다음.”

베네치아 10인위원회의 한 명이 했다는 이 말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동체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삶의 모든 것이었다는 중세시대에도 국익을 최우선시 했던 베네치아의 독특한 외교 전략이기도 했다.

무역과 해운에 공화국 전체의 운명을 걸었던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마찬가지로 작은 내수시장과 높은 대외경제 의존도를 보이는 한국으로선 역사적 모델이 되는 사례다.

베네치아는 외교 전략의 제1 원칙을 해상 운송로의 확보와 원활한 무역 환경 조성에 뒀다. ‘베네치아의 만’으로 불리는 아드리아해 동쪽 해안을 시작으로 에게해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흑해에 이르는 동서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선 이미 다 쇠락할 대로 쇠락한 비잔틴 제국의 속국을 자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의 해상 방위를 떠맡는 대신 이 해역의 ‘해양 경찰’ 역할을 할 명분을 함께 얻은 것이다. 국가의 ‘자존심’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앞에 세우는 실용주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같은 원칙은 중세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당시 유럽 정세를 뒤흔든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간의 알력다툼에서 베네치아가 별 탈 없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의 배경이었다. 오히려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역은 전쟁이 없는 곳에서 더욱 꽃피운다”는 신념으로 조정자 역할을 했다.

11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격렬한 대립을 중재한 것 역시 베네치아의 세바스티아노 지아니 통령이었다.

경제적 이익을 중시하는 외교 원칙은 십자군전쟁 시기 이슬람 제국과 이후 오스만튀르크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로부터 유럽으로 향신료를 들여오는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베네치아로서는 중동과 소아시아를 지배하는 이슬람 세력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였다.

물론 베네치아가 항상 평화만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갤리선단은 사라센 해적과 맞서는 크리스트교 함대의 주력이었고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비잔틴 제국 침공에 앞장서기도 했다. 레판토 해전은 점차 강성해지는 오스만 해군으로부터 지중해 제해권을 쟁취하기 위한 위험한 모험이기도 했다. 그 결정의 중심에도 해상 무역로 확보라는 대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네치아의 독립적이고 견고한 외교 원칙에는 스스로 비축한 힘이 바탕이 됐다는 점이다. 지중해의 여왕으로 불린 함대는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정보력을 가진 외교관과 상인, 그리고 그 정보를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를 뽑기 위해 지켜온 공화주의적 전통과 제도가 있었다.

베네치아가 넘어야 했던 강대국의 압력과 거친 역사의 풍랑은 현재 한반도가 위치한 동북아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한국 역시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장기적인 국가의 이익에 따른 외교의 대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할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원호연 기자/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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