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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X파일>보도(報道)와 보호(保護)사이
[헤럴드경제 =원호연 기자]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피랍되는 사건이 터지면 외교부와 출입 기자들 사이에 하나의 묵계(默契)가 생깁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피랍된 우리 국민의 안위가 최우선”이라는 원칙이죠.

얼핏 들으면 아주 명쾌하고 당연한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일하는 기자로선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가 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와 ‘안전할 권리’를 한번에 충족시키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만 사흘만에 무사히 구출 되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맞은 한석우 한국무역진흥공사(코트라) 리비아 주재 무역관장 피랍사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랍계 뉴스채널 알자지라에 의해 한 관장의 납치가 기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인 20일 새벽이었습니다. 기자의 머릿 속에 2004년 이라크에서 피랍돼 살해 당한 고 김선일 씨가 떠오른 것은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에도 반군 잔존 세력과 지역 민병대 난립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리비아 정세를 생각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 관장의 피랍 사실은 바로 확인됐지만 그가 과연 안전한 상황인지, 어디에 있는지가 관심을 모았죠. 그날 대부분 언론사들의 편집 방향도 여기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기자의 당연한 책무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엔 당국자들이 처음부터 신변에 문제가 있는지 여부조차 확인해주지 않았습니다. 기자들과 당국자들 간에는 강하진 않지만 약간의 긴장감이 흐를 수 밖에 없었죠.

사실 외교부는 사건 발생 직후 이미 한 관장의 안전을 확인한 상태였습니다. 리비아 정부를 거쳐 몸값을 요구한 납치 세력으로부터 확인한 것이죠. 한 관장의 목숨을 책임진 외교부로서도 국민들에게 피랍자의 안전을 알리는 것이 “할일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알리길 꺼린 것은 우리 정부가 안전을 확인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피랍자의 안위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죠.

결국 한 관장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주되 기사는 외교부가 정하는 시기까지 쓰지 않는 것으로 타협이 이뤄졌지만 기자들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납치범들에게 정부의 구출 전략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은 가장 절묘한 문장을 지어내기 위해 ‘경쟁 아닌 경쟁’을 벌였습니다. 제 선택은 “몸값을 위해 납치했으니 인질을 쉽게 죽일 가능성은 적다”였는데 여전히 더 잘 쓸 수 있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안전여부에 대해선 이튿날 외교부가 엠바고(embargo)를 해제하면서 기사를 쓸 수 있었지만 이같은 고민은 우리 정부 대책을 전할 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납치범과 몸값협상은 없다”는 원칙을 가진 정부는 납치범들과 직접 협상에 임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나섰다는 것 자체로 납치범들이 기대를 가지고 몸값을 올려부르기 때문이죠.

이러다 보니 언론 보도도 신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무 기사도 쓰지 않는 것이지만 그랬다간 독자들이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포기했다”고 분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정부는 전직 리비아 대사인 조대식 기획조정실장을 현지로 파견해 리비아 각 정부부처와 접촉하면서 신속한 사태해결과 안전한 석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기사에는 “코트라 임직원이 현지로 날아갔다”는 설명만 있을 뿐 조 실장의 존재는 사건 해결 전까지 숨겨져 있습니다.

사건이 해결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트리폴리 내 납치 세력의 거점을 찾아낸 과정, 진압과정이 시작되기 전 한 관장의 신병을 먼저 확보한 방법은 무엇인지, 우리 정부가 현장에서어느정도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기자들은 궁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이 더이상 외교부를 압박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은 이유는 피랍사건이 이번으로 끝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의 대응을 하나하나 생중계하면 독자들은 속시원하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외교부의 대응 전략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면 이번 사건의 범인보다 더 잔인하고 더 영리한 테러범들이 언제 그 정보를 이용할지 알 수 없습니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이런 사건에서 외교부의 대응 수준이 마음에 안 찰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 자율화가 막 시작된 20년전과 똑같은 인력만으로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국민과 기업, 주재원들을 챙겨야 하는 외교관들은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더 노력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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