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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격랑의 동북아…韓 中 日 고차방정식> 오키나와에 한국인 위령비…일본의 양심 ‘희망의 끈’은 있다
연 500만명 참배하는 야스쿠니신사
그 옆 유슈칸선 카미카제 활약상 미화
우경화 휩쓰는 日의 현실 여실히 방증

한국인 학도병·징용자 추모비 설치
오키나와평화공원 不戰의 다짐 되새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근대 일본이 걸었던 침략과 전쟁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개의 창이 있다. 그 하나는 도쿄 중심가에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또 하나는 평화의 섬 오카나와에 위치한 평화기념공원이다. 비행기로 3시간 거리인 도쿄와 오키나와의 거리만큼 두 시설의 역사접근법은 먼 거리를 달리고 있다.

이처럼 일본 내에 정반대의 역사관이 공존하는 것은 일본이 처한 현대사의 굴곡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여전히 함께 손잡을 양심 세력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 양심 세력은 어려운 시기에 처한 한ㆍ일 관계를 푸는 것은 시민사회의 끊임 없는 교류와 이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위해 모두 바친다”, 야스쿠니 신사=메이지 유신(明治維新)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에 한 해 방문하는 일본 국민은 500만명에 달한다.

신사를 참배하는 시민의 분위기는 자못 엄숙하다. 욱일승천기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우익 청년들이 눈에 띄지만 큰소리로 구호를 외치지는 않는다. 이곳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이 잠든, 성스러운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조 히데치 전 총리를 포함한 14명의 A급 전범이 합사돼 전쟁을 미화한 것으로 비판받는 야스쿠니 신사이지만 전쟁을 찬양하는 역사 교육이 실제 이뤄지는 곳은 신사 바로 옆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유슈칸(遊就館)’이다.

1882년 문을 연 이곳은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는 한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를 천황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태평양전쟁을 ‘대동아(大東亞)’전쟁으로 칭하며 “ABCD 포위망으로 석유 등 자원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일본은 전쟁을 피하려 노력했지만 미국의 교섭 거부로 어쩔 수 없이 일으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곳에 8000여명의 전몰자 사진과 함께 전시된 유묵과 편지의 대부분은 자신의 희생이 일본과 천황의 영원한 삶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전시실을 따라 걷다 보면 제로센 전투기와 인간 어뢰 등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신사 관계자는 무기 전시에 대해 “전쟁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고 설명했지만 로비의 벽면에는 그 설명을 무색하게 하는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다. 초ㆍ중학생들이 그린 이 그림 중 상을 받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연합국 군함에 몸을 내던진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었다.

전후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이곳을 폐쇄했다. 유슈칸이 제국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 1986년 이곳을 다시 개축해 문을 연 것은 일본 대표적인 우익 인사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였다.

일사분란하게 우경화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에도 과거사를 반성하고 평화의 기반을 다져가는 양심세력이 있다. 욱일승천기가 새겨진 옷차림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일본 우익 청년단체(왼쪽)와 1만명의 조선 학도병을 기리기 위한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한국인 위령탑.

▶“평화는 확고한 신조”, 오키나와=오키나와가 일본 역사와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이곳 사람들은 오키나와를 ‘평화의 섬’으로 부르며 일본 국민의 근현대사 교육의 산증인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중국과 조선과 독립적 교역관계를 갖고 독립국가로 지내오던 류큐(琉球)왕국이 메이지 일본에 무력으로 합병된 것은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개칭된 이후 이곳은 일본 본토 방위와 동남아ㆍ태평양 진출의 최전선이 됐다.

태평양전쟁이 종전을 향해 치닫던 1945년 3~6월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는 일본 본토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면전이었다. 전황이 기울어가자 일본군 총사령부는 남아 있는 섬 주민을 강제로 동굴로 끌고 가 옥쇄를 강요했고, 방공호 안에서는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과 기아에 의한 사망이 뒤섞여 아비규환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 결과, 20만여명의 주민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오키나와현은 1975년 이들이 희생된 마부니 동굴 지역에 평화기념공원을 지어 유골을 안치하고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만행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이곳에는 일본 각지에서 수학여행차 모여든 중ㆍ고등학생들이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직접 확인하고 부전(不戰)의 다짐을 되새기고 있다.

공원 측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지만 그 이상으로 전쟁을 용납하지 않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우리 인간”이라며 “이것은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확고한 우리의 신조”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나아가야 할 평화국가의 이념을 명확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곳에는 오키나와 방어를 위해 한국에서 끌려간 학도병과 강제징용자 1만여명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도 세워져 있다.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학도병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후지키 쇼겐(91) 씨가 당시 강제징용돼 오키나와전투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조선학도병 740명의 유골을 직접 수습, 프로레슬러 역도산과 함께 12년간 모금활동을 전개해 세운 것이다.

원호연 기자/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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