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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질 사회] ② “병이 병을 낳는다”…‘갑과 을’ 사이 더 악독해진 甲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인 ‘갑질’이 국적기를 타고 세계로 날았다. 최근 대한항공 조현민 전 전무의 ‘물벼락 갑질’과 관련해 외신들이 이를 ‘갑질(Gapjil)’이란 단어 그대로 소개한 것. 1980년대 ‘재벌(Chaebol)’이란 말이 영어사전에 등재된 데 이어 ‘갑질’까지 오르게 생겼다. ‘갑질’은 권력의 상하관계로 발생하는 부당 행위를 일컫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 뉴스빅데이터팀이 공개한 ‘뉴스빅데이터로 보는 신조어’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5년간 보도된 ‘갑질’ 관련 기사는 2만5075건에 달하는데, 이때 갑질의 주체는 대기업과 재벌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직장은 물론, 가족과 친구 등 일상 관계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갑질’ 바이러스에 감염된 대한민국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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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을들이 '갑질'로 상처받고 있다(사진=공익광고협의회)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손예지 기자] #호텔 예약 사무원으로 약 1년간 근무한 정수현 씨(26.여)를 가장 괴롭힌 것은 VIP 고객이 아니라 그들의 비서였다. VIP 고객은 비서가 대신 호텔 이용을 예약한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서들이 자신이 VIP 고객인 듯 ‘갑질’을 일삼는다. 하루는 전직 국회의원의 비서가 고위급 미팅이 있다며 자주 이용하던 객실 예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날짜의 예약은 이미 끝난 상황. 사정을 설명하자 비서는 “이 분이 누구신지 아냐”는 고성으로 시작해 “높은 사람을 바꾸라”고 억지를 부렸다. 난리 끝에 결국 기존 예약고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객실을 바꿨다. 이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 씨는 억울했다. 고위급 인사 아래 그의 비서이든 자신이든 ‘을’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째서 ‘을’에게도 ‘갑질’을 당해야 하냐며 토로한다.

#김지혜 씨(28.여)는 국내 항공사 하청업체를 통해 인천공항 지상직 승무원으로 4년간 일하다 지난해 퇴사했다. 이로써 회사에는 그의 동기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됐다. 모두가 김 씨에 앞서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사유는 하나다. 회사의 ‘갑질’이다. 진상 고객의 ‘갑질’은 댈 것도 아니다. 김 씨는 2~3일 동안 하루 17시간 일하고 1~2일 쉬는 생활을 반복했다. 업무 특성상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체력이 달리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업무 중 발목을 삐었다. 발목이 붓고 아파 구두를 신고 버티는 게 불가능했다. 조퇴를 신청하기 위해 담당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담당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대신해줄 사람이 없으니 기다려보라”고만 했다. 결국, 그날 김 씨는 예정된 근무 시간을 모두 채운 뒤에야 퇴근했다.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닌데, 아플 때 쉴 수 없는 직장이라니. 김 씨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3년 차 고등학교 교사 송민희 씨(31.여)는 수업에 들어가기가 두려워졌다. 올해부터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책임교사를 맡게 됐는데, 최근 위원회가 열렸다. 학생 4명이 SNS에 특정 학생을 비난하는 글과 댓글을 연달아 게시한 일이 문제가 됐다. 심의 결과 학교폭력이 인정됐다. 그러자 가해 학생 부모들이 들고 일어섰다. 송 씨의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하기 시작했다. 밤까지 계속되는 전화에 수신을 거부하자 다음 날 아침 학교까지 찾아왔다. 학부모들은 교무실 한 가운데서 송 씨에게 반말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교감이 학부모를 설득해 겨우 돌려보내고 송 씨는 수업에 들어갔다. 가해 학생들이 있는 반이었다. 송 씨는 두려워졌다. 제자들과 학부모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교권침해위원회를 통해 회의를 소집할 수도 있지만, 제자들을 생각하니 선뜻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 송 씨의 설명이다.

‘갑질’의 상처로 몸과 마음이 병든 을들의 모습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병이 병을 낳은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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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석 심리행동변화연구소장은 '갑질'이 나르시시즘,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관련 있다고 봤다(사진=픽사베이)


■ ‘갑질’도 병이다

‘뉴스로 보는 사이다 심리학’(이남석 저 | 다른)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이남석 심리변화행동연구소 소장은 갑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자신의 힘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과,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이다.

이 소장은 “전자는 상대가 자신에게 굴복할 때 쾌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권리와 능력이 있는 대신 상대에게는 의무와 열등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소수 권력 계층의 갑질이 여기에 해당한다. 후자에 대해서는 “평소 스트레스를 참다가 화풀이 대상으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이 부류의 경우 ‘갑질’을 처음 한 뒤에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기반성이나 사회적 처벌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잘못을 반복할 위험성도 높다. 이 소장은 이를 ‘노출 불안’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타인에게 들킬까 걱정하는 심리다. 갑과 을 사이에 낀 ‘중간자’들이 더 악독한 갑을 자처하는 이유다.

이 소장에 따르면 일반적인 ‘갑질’은 세상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나르시시즘’과도 관련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 모든 ‘갑질’ 횡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반사회적 인격 장애’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정신 장애를 말하는 용어다. 흔히 알려진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 등의 성향이 여기 속한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는 아직 완치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꾸준히 치료하면 상태를 완화할 수는 있다. 이에 이 소장은 “자기 과시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심리) 치료가, 노출 불안을 겪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갑질 사회①] “재벌가만이 아니다”… ‘갑질 바이러스’ 퍼진 한국
[갑질 사회②] “병이 병을 낳는다”…‘갑과 을’ 사이 더 악독해진 甲
[갑질 사회③] “당당히 맞서라”…사이다 캐릭터는 대리만족일 뿐?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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