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시사회 전부터 ‘아수라’에 쏟아지는 일관된 지점은 ‘악의 강도’였다. 완급조절은 불가능할지라도 변주와 탈피를 시도한 지점은 분명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수라’ 속에 충격은 존재했지만 그 충격의 동력을 이끌어 가는 ‘숨은 패’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토리 구성에서 악의 존재를 바라보는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말을 말하면서 최소한의 기준점으로 접고 들어가야 할 그 한 장의 패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지점이 강함의 온도를 유지시키는 연료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안남시장 박성배(황정민)는 힘의 권력에 취한 악의 전형성을 그려낸다. 그는 현실과 거짓을 넘나드는 완벽한 판의 놀음 속에서 자신의 악을 정당화시킨다. 정당하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기에 정당하고 그래서 옳다고 말한다. 그 모든 행동은 한 편의 연극을 바라보는 듯하다. 무대 위에 배우이자 연출자로서 그는 완벽한 판을 짜고 그 판 안에서 모든 인물을 조종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박성배의 악 자체가 어떤 식으로 해석돼야 할지가 불분명해 진다. 과장과 반복의 행동 속에서 등장하는 그의 악은 결코 영리하지 못하다. 뒤가 보이는 악의 신호는 상대방에게 준비 단계를 예고한다. 결과적으로 박성배의 악행 놀음에 속아나는 다른 인물들의 행동 패턴 자체가 설득력을 떨어트린다. 속는 것인지 속아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부호가 뒤 따르게 된다.
한도경(정우성)을 옥죄는 또 한 명의 인물 김차인(곽도원) 검사 모습은 그나마 조금 현실적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악행과 정의의 경계선에 놓고 필요에 따라 좌우로 흔들어 댄다. 스스로가 지능적이라고 자부한다. 그 자부심은 반대급부로 참을 수 없는 비열함을 숨긴다. 김차인이 선보이는 악의 변주는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 가장 저열한 민낯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미 여러 번 거듭된 동어반복이다. 관객들의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안고 끝을 보게 된다.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캐릭터는 한도경(정우성)이다. 그는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속내와 심리의 결을 토해낸다. 벗어나고 싶고 빠져 나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선보이는 행동은 허우적대는 비효율적인 패턴들 뿐이다.
이들 세 인물은 ‘아수라’의 중심축이다. 이들이 말하고 살리는 악 자체가 사실상 개념적인 부분과 표면적 혹은 표피적인 지점의 악을 말하고 있기에 강렬함은 명확하다. 하지만 악이 선(善)과 구분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교활함이다. ‘아수라’ 속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공간과 흠결 그리고 뻔히 보이는 미로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인물들은 허우적댄다. 마치 결과를 위해 스스로가 바보임을 자처하는 인물들처럼.
물론 그곳을 지배하는 박성배도 그의 손아귀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펄떡이는 한도경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자신한 김차인도 착각하고 있었다. 아니 ‘아수라’ 속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들을 미치게 만들었는지를. 개봉은 28일.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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