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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력 잃고 좌절했던 청년…‘마음의 눈’으로 판결하는 판사 되다[우리사회 레버넌트]
생을 뒤흔든 좌절감…“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음의 눈을 뜬 것”이라는 스님 말씀…고통서 차츰 벗어나
사고 이후 로스쿨 복학…동기 도움 힘입어 법학 공부에 매진
로클럭·장애인권익보호기관 변호사 거쳐 판사 되기까지
“책임감으로 재판 임해”…장애인 위한 사법제도 개선에도 관심
“장애를 얻었지만 현재 내 삶은 예전보다 더 다채로워졌다”
김동현 판사가 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민사4부 판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우리사회 레버넌트]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청년은 밤낮으로 울었다.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곡기를 끊고 치료를 거부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 불혹의 나이가 된 청년은 이제 희망의 상징으로 불린다. 그가 슬픔과 좌절의 시간을 기꺼이 삶의 전환점으로 삼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김동현(42)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다. 그가 서른 살 무렵 겪은 좌절을 극복하고 판사가 되기까지 걸어온 인생 역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다. 헤럴드경제가 지난 5일 판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생을 뒤흔든 좌절감…“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김 판사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 아니다. 30년 동안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로스쿨에 재학중이던 무렵 불의의 의료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었다. 김 판사는 ‘의료 사고’ 내용에 대해선 인터뷰 중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괴로웠던 일이기에 사고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상처가 되기 때문으로 해석됐다. 김 판사의 시각 장애 정도는 ‘중증’이다. 중증은 앞이 거의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정도의 시각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 판사는 “당시 병원에서 의사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죠. 그동안 내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다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병실에 누워 있는데, 되게 막 가슴이 갑갑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 뒤로는 한동안 무기력하게 지냈습니다.”

김 판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고 고백했다. 여기저기 화도 내고 희망을 잃은 채 처져 있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절망감에서 헤어나올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였다.

“제가 병원에서 밥도 안 먹고 영양제도 안 맞겠다면서 계속 누워 있을 때였어요. 어머니가 제가 자는 줄 알고 ‘빨리 회복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뭘 잘했다고 밥도 안 먹고 영양제도 안 맞겠다고 이러느냐’며 누군가에게 한탄하는 목소리를 들었어요. 그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제서야 다시 영양제도 꽂아달라고 하고, 밥도 먹고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김 판사는 그와 같은 결심 이후에 다시 로스쿨에서 학업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 중에서도 이미 판사가 되신 분도 있고, 변호사가 되신 분도 있었기 때문에 저도 ‘하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로스쿨)를 다니던 중이었기 때문에 다시 복학해서 공부를 하기만 하면 제가 하려고 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던 거죠.”

“마음의 눈을 뜬 것”이라는 스님 말씀…고통서 차츰 벗어나
김동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민사부 판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김 판사는 퇴원 이후 이모의 권유로 경북 안동에 있는 ‘유하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그는 “절에 들어간 다음날 새벽부터 한달 동안 매일 같이 삼천배(三千拜)를 하며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처음에는 삼천배를 하는 데 10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밤 늦게까지 절을 하고 밤에 아파서 끙끙거리면서도 다음날이 되면 뭉친 다리를 이끌고 또 삼천배를 하는 거죠. 일단 몸이 힘들면 정신이 힘든 것은 뒷전이 되더라고요. 또 하나 깨달은 점은 ‘절을 하면 할수록 점점 좋아진다. 이 고통이 계속 가는 게 아니다’라는 느낌이었어요. 일주일째부턴 그렇게 몸이 아프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힘들기는 했지만, 아파서 못하겠다는 상태는 물론 아니었고요. 그 무렵부턴 밤마다 울지도 않게 됐고요.”

차츰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던 김 판사가 ‘평생에 걸쳐 기억에 남는 말’을 하나 꼽은 것은, 유하사 주지인 동우스님의 건넨 말 한마디였다.

“기도를 마칠 때 스님께서 ‘육신의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눈은 뜬 거다’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도 제 안에서 해석을 했고요.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을 통해 정신적으로도 ‘내가 이것도 했는데 다른 건 뭘 못 하겠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된 거죠.”

김 판사는 당시 하루에 3000번의 절, 한 달간 총 9만번의 절을 하는 과정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회복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장애인이 되고 재활훈련을 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걸 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했다.

사고 이후 로스쿨 복학…동기 도움 힘입어 법학 공부에 매진

김 판사는 당초 카이스트에서 신소재공학을 전공한 과학도였다. 다만 법학도로 진로를 급격히 변경하게 된 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되게 긴 얘기인데요. 일단 짧게 줄이면 제가 학부 때는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웃음). 그래서 학사경고 두 번 받고 잘릴 뻔도 하고, 대학원도 떨어졌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하다가 행정고시 기술직을 준비를 하게 됐고, 그것도 3년 정도 하다가 군대를 공군장교로 갔어요. 그런데 제대할 때가 되니까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고심 끝에 제가 관심있던 분야가 과학기술 정책 분야라서 그러한 일을 하려면 법이랑 경제를 알아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법 공부를 하러 로스쿨에 진학한 겁니다.”

로스쿨 2학년에 재학하던 2012년 사고로 시력을 잃은 김 판사는 복학 이후 동기들의 도움과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으로 학업에 매진해 나갔다. 그는 “공부하는 일이라든지 식사하러 가는 일, 강의실 찾아다니는 일조차도 혼자 하기 어려웠는데, 로스쿨 동기들과 후배들이 도움을 많이 줬다”고 말했다.

다만 김 판사는 당시 공부를 하는 일보다 ‘공부할 책’을 구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후천적 시각장애인인 김 판사는 “점자를 잘 못 쓴다. 그냥 엘리베이터 숫자나 읽고 명함이나 아는 정도지 점자로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며 “요즘은 점자 정보 단말기라는 기계를 통해 점자를 사용하는데, 저는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글 파일로 된 책을 구해야 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책을 쓰신 교수님들에게 연락해 파일을 받기도 하고 국립장애인도서관이나 학교에 있는 장애인학생 지원센터에서 제작된 파일을 받기도 했지만, 비용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되도록 얇은 책 한글파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방법으로 공부했다”고 설명했다.

김 판사는 이 같은 방식으로 학업을 마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로스쿨을 졸업, 2015년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로스쿨 재학 시절 공부했던 방식은 판사로서 재판 업무를 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글 파일을 컴퓨터에 설치한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이 읽어주면 이를 김 판사가 듣고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지금도 음성 변환 방법으로 업무를 해요. 업무 중에 점자로 문서를 읽는 일을 전혀 없어요. 점자라는 게 숙달하는데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학창 시절에 일찍이 점자로 공부하신 분들은 점자 사용이 능숙하신데, 저처럼 중도 실명을 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점자를 잘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특히 재판 업무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점자를 읽을 수는 있지만, 느려서 일을 할 수가 없어요.”

현재 민사항소 재판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 판사는 음성 변환을 거쳐 사안을 이해하고 판결문을 작성하기까지 비장애인인 다른 판사들보다 대략 2배 가량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판사는 “소송 기록에 사진이나 영상 같은 자료는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다른 분들한테 설명을 듣는다”며 “설명을 듣고 궁금한 점은 다시 물어보고 의문을 하나씩 해소하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김 판사는 서증 자료로 제출된 사항을 이해하기 위해 3D 펜도 이용한다고 말했다.

“눈으로 보는 대신에 손으로 만져 어떤 모양인지 파악하는데, 예를 들어 교통사고 관련 사건이라면 도로 모양이 있잖아요. 설명만 들어서는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3D펜으로 그린 종이 위의 선을 만져보면 어디쯤에서 사고가 났고, 횡단보도는 어디쯤 있고 이런 것들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훨씬 쉬워요.”

로클럭·장애인권익보호기관 변호사 거쳐 판사 되기까지
‘국내 시각장애 2호 판사’ 김동현 판사가 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판사 사무실에서 사진촬여에 응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김 판사는 법관을 지망하게 된 계기로 국내 1호 시각장애인 판사인 최영 부산지법 판사로부터 받은 영향을 꼽았다. 김 판사는 “로스쿨 재학 중에 지도교수님이 현재 스크린 리더를 만드는 김정호 이사님을 소개해 줬고, 그분이 또 최 판사님을 소개해 줘서 만날 수 있었다”며 “함께 남산에 산책 다니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법조인 업무에 적응하는 데 굉장히 많은 도움을 주셨다. 지금까지도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끔 만난다”고 말했다. ‘스크린 리더(screen reader)’는 컴퓨터나 모바일 화면의 텍스트를 읽어주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이러한 김 판사에게도 경력 법관에 임용되기 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변호사 시절이 있었다. 서울고법에서 재판연구원(로클럭),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변호사로 일한 그는 장애인권익보호기관 변호사로 근무하게 된 이유로 ‘몰랐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로클럭을 마칠 때쯤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좀처럼 취업을 할 수 없던 와중에 장애인인권센터 공고가 떴어요. 딱 ‘내 자리’인 것 같다고 생각했죠. 제가 장애인이기도 하지만, 사실 저는 장애인이어서 뭔가 차별을 받거나 장애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쁜 경험을 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회적 취약계층인 장애인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물론 장애인인권센터 변호사 업무는 녹록지 않았다. 계속해서 상담 전화를 받고, 장애인들이 처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듣고 해결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잘 안 되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이다. 김 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볼 때 굉장한 업무적 보람을 느꼈다고 추억했다.

“제가 그 당시 도와드렸던 분들은 피해 사례 종합세트 같은 분들이었는데, 특히 노동착취를 당하다가 저희 센터에 구출된 분의 민·형사소송을 진행하는 걸 도와드렸던 일이 기억에 남아요. 자립을 지원한 이후에도 계속 명의도용 피해라든가 세급체납 문제 등이 발생해 결국 한정후견 신청까지 나아갔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김 판사는 그렇게 3년여의 센터 변호사 생활을 마치고 2020년 10월 법관에 임용돼 수원지법에서 첫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책임감으로 재판 임해”…장애인 위한 사법제도 개선에도 관심

김 판사는 올해 4년차 판사로 현재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 재판부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1심 민사재판 당사자들이 항소할 경우 배당되는 사건을 심리하는 일이다. 김 판사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개별 사건마다 높은 책임감으로 임한다고 말했다.

“판결문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은데, 과연 제 스스로가 옳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부담은 늘 갖고 있어요. 그래도 어려운 사건을 심리하고 제가 쓴 판결문을 읽었을 때 ‘특별히 이상한 데가 없다’, ‘잘 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면 정말 보람이 있죠. 사건 당사자들이 항소나 상고를 안 했을 때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고요.”

김 판사는 여느 판사와 같이 ‘판사는 판결로써 말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장애인에 대한 사법 제도적 지원에 대해서 만큼은 여러 차례 법원 안팎으로도 목소리를 냈다. 특히 ‘발달장애인 진술조력제’를 보완해 장애인들을 지원하는 진술조력인 양성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도 발달장애인들이 피해를 입고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진술을 할 때 조력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조금 더 전문적인 진술조력인을 양성해 적절한 지원을 받도록 할 필요가 있다”며 “발달장애인 분들과 얘기를 해보면, 통상 10~15분 얘기해야 할 것들도 잘 못 알아들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애를 얻었지만 현재 내 삶은 예전보다 더 다채로워졌다”
김동현 판사가 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민사부 판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김 판사는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더 다양한 일에 도전하고 즐기는 다채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가 뭔가를 시도하기 전에 실패할까 두려워하는 것들이 되게 큰 데, 그런 게 막상 시도를 해보면 별 게 아니더라고요. 제 경우는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입장에서 ‘그걸 잘 못해도 어떠냐’는 생각으로 도전을 하는거죠. 그래서 ‘예전보다도 훨씬 제 삶이 다채로워졌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김 판사는 달리기 마라톤과 ‘쇼다운’이라는 스포츠를 즐긴다. ‘쇼다운’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포츠로, 에어하키 또는 탁구로 불리기도 한다. 두 명의 선수가 배트를 이용해 공을 쳐서 벽면에 부딪힌 뒤 테이블 중앙에 설치된 상대편 골 포켓에 공을 넣으면 점수를 얻는 경기다. 한국에선 2019년 제39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김 판사는 이 종목 국가대표다. 지난달에도 제44회 전국장애인체전에 쇼다운 국가대표로 출전해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개인전에선 16강까지 진출했다.

이러한 김 판사에게 있어 삶의 원동력은 거리낌 없는 도전 정신에 있었다. 그에게 인생의 바닥은 ‘사고로 시력을 잃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기꺼이 그 바닥을 삶의 전환점으로 뒤바꿔 놓았다. 인생의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김 판사만의 조언을 부탁했다.

“현재 상황이 바닥이라 생각을 하고 점점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게 우선인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면, 주변에 도와주시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잘 받고 스스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게 되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거예요. 그런 선순환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날이 분명히 올 겁니다.”

y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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