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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쉬 발음, 드뮤어룩…‘구분짓기’를 위한 상류층과 중류층의 끝없는 밀당[북적book적]
책 ‘매너의 역사’…영국사 전공 설혜심 교수 써
19세기 영국식 예절 탄생 흥미롭게 풀어내
매너는 일종의 신분 장벽…더 사소하고 복잡하게
병원 등서 지켜야 할 에티켓은 현재도 일부 유효
2024년 한국의 F·W 시즌 대세 패션트렌드로 불리는 ‘드뮤어룩’의 대표적 예시. [배우 이청아 SNS]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중간계급이 상류층의 이른 저녁 식사를 따라하기 시작하자 식사 시간을 오후 5시에서 저녁 8~9시로 옮겼다. 또한 중간계급과 지방 사람들까지도 포크를 사용하게 되자 상류층은 다른 이들이 따라올 수 없도록 포크를 왼손으로 쥐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도 발음은 옷차림처럼 쉽게 모방할 수 없고, 교정하는 일도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사회적 구별 짓기에 아주 유용한 도구다.”

매너, 에티켓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신간 ‘매너의 역사-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저자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전공인 영국사를 통해 살펴본 결과, 예절 규범들은 신분제가 크게 흔들린 19세기에 가장 촘촘하고 방대해졌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매너는 계급에 기반한 규칙의 집합체로, 계급 구성원들의 지위 보장을 절대적 목적으로 삼고 만들어졌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분위기가 격변하자 위기에 봉착한 전통적 상류계층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강화한 행동 수칙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 전반에서 계급을 벗어나는 현상이 가속화되자 상류계층은 자신들의 지배력을 정당화할 만큼의 더 우월한 예의범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사회 전체를 통합적으로 아우르고 존중감을 얻고자 했다”며 “복잡해질수록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다른 누군가는 매우 힘들게 배워야 해 구분짓기가 이뤄진다”고 분석했다.

책 표지

하지만 당시 부상하는 중산층의 상류층 ‘따라잡기’ 열망은 구분짓기의 열망에 뒤지지 않았다. 19세기 중엽부터 영국 서점가에는 정체 모를 필자가 쓴 에티켓북들이 성행했다. 상류층이 되고 싶어하는 중류층 독자를 겨냥한 에티켓책은 매우 잘 팔렸다.

특히 ‘루트리지 에티켓 매뉴얼’이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에 따르면, 거리에서 장갑 없이 눈에 띄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또 장갑은 염소 가죽 또는 소 가죽이어야지 면으로 만든 장갑은 천박하다. 낮에 끼는 장갑은 짧고 밤 행사에 끼는 장갑은 길어야 하지만 데이드레스는 긴팔 소매, 이브닝드레스는 소매가 짧아야 한다. 이런 규칙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만들어졌지만 지켜야만 상류층이 될 수 있다는 데 어쩌겠는가.

또다른 19세기 에티켓북들은 신사라면 모름지기 ‘언제나 옷을 잘 입어야 한다’와 ‘그 옷차림이 눈에 띄어서는 안된다’는 두 가지 절대 원칙을 공통적으로 제시했다. 저자는 “‘완벽한 단순함’이야말로 우아함의 본질이자 지배계급의 표지”라며 “패션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여서도 안되고 무심한듯한 편안함을 풍겨야만 했다”고 설명한다.

2024년 한국의 F/W 시즌 대세 패션트렌드로 불리는 ‘드뮤어룩’의 묘사와 너무나 흡사하다. 드뮤어는 ‘수줍고 조용한, 단정한’이라는 뜻의 단어인 ‘Demure’에서 비롯된, 단정하고 겸손하며 절제된 패션 스타일을 의미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한 분위기를 중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큼직한 명품 브랜드 로고는 없지만 핏이 재단이나 한 듯이 몸에 착 감겨야 하고, 소재가 일견 좋아보여야 한다.

아울러 18·19세기 영국 에티켓북을 연구해 분석한 저자의 통찰은 또다른 한국사회의 흥미로운 지점을 건드리기도 한다.

최근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사는 지역에 따라 매너의 정도가 큰 차이가 난다는 구분짓기 서사가 인기다. 지역과 출생과 결부된 천부적 ‘귀티’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청담동 부자는 무엇이 다를까’라는 제목을 달고, ‘청담동에선 어린 아이도 배달원이나 택배원에게 공손하게 인사한다’ 등의 좋은 매너를 칭찬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못사는 동네 배달갔을 때와 달리 청담동에 배달 가면 고생한다고 고마워하며 음료수를 주더라’는 식의 미담 댓글이 더해져 서사의 완전체를 이루는 식이다.

영국과 유럽의 에티켓을 소개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적으로 ‘청담동 귀티 서사’에 반박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꼬집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부자들의 공손한 매너는 단지 현재 한국 청담동만의 것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19세기 영국 젠틀맨 에티켓 지침 역시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대할 때는 ‘의도적 겸양’을 보일 것을 권고한다.

저자는 “실제로는 오만한데 그 태도를 감추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로, 이런 종류의 겸양은 젠틀맨의 지위나 권위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또 저자는 “상위계층은 자신들의 지배력이 하층민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반드시 권위와 친절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며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동급자들에 대한 배려 이상으로 철저해야 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동의가 있었다”고 언급한다.

한편 책은 당장 내일부터 따라해도 될 실용적인 에티켓과 매너도 여럿 소개한다. 19세기 후반부터 대형병원이 발달하기 시작한 영국에서 시작돼 내려오는 병문안 에티켓이다.

저자에 따르면, 면회객은 ▷‘환자를 조용히 응원’해야지, ‘건강한 본인처럼 기운찬 반응’을 기대해선 안된다 ▷들고갈 만한 선물은 신선한 과일, 깡통에 든 비스킷, 예쁜 옷(회복되어 퇴원하는 날 입으라고) 등이 좋다 ▷바쁜 간호사를 성가시게 만들 수 있는 큰 꽃다발은 피하라 등을 제안한다. 이미 화병에 꽂힌 꽃은 환영이다.

th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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