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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베리아반도 나비의 날갯짓이 조선에 폭풍우를 몰고 오다’ [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동해해전 [러일전쟁사료관 제공]

‘동전 한 닢 가치도 없는’ 일본국채

1900년 중국의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군대를 주둔한 러시아가 조선에까지 손길을 뻗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6일 부산 앞바다에서 러시아 선박 2척 나포, 8일 육군 12사단 인천 상륙, 해군 우리우함대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코레츠호 공격, 중국 뤼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함대 기습 등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러일전쟁은 불붙기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재계 인사들에게 ‘전쟁의 70%는 경제이고 나머지 30%는 전투다. 전쟁의 승패는 금융과 재정에 달려 있다’며 전쟁자금 확보를 독려했다. 재정을 책임지는 일본 대장성은 전쟁에 소요되는 비용을 청일전쟁 당시 1억5000만 엔의 3배인 4억5000만 엔으로 잡았다. 세부 내역은 5000만 엔은 증세, 내국채 발행 2억 엔 그리고 외국채 2억 엔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일전쟁에서 임시군사비 특별회계 지출만으로도 15억 엔에 이르렀다. 주먹구구식 전쟁예산 편성이었다.

영국으로부터 최신예 함정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영국 파운드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해외채권 발행은 전쟁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일본정부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일본은행 부총재를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해외채권 발행 책임자로 임명했다. 고레키요는 당면 목표 1000만 영국 파운드화(1억 엔 상당) 외채 모집을 위해 뉴욕 경유 런던을 향해 요코하마항을 출발했다. 뉴욕에 도착하자 한통의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에서의 외채 모집은 기대 난망. 정금은행 신용도는 동전 한 닢 가치도 없음’ 요코하마정금은행(일본의 외국환은행) 런던지점장이 보낸 내용이었다. 영국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시장에서 일본이 내놓은 국채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런던의 공채시장에서 러일전쟁 판세가 러시아 측에 유리하다는 분위기가 작용한 결과였다. 러시아의 GDP는 일본의 3배, 인구도 3배나 많았으며 당시 유럽에서 황색인종에 대한 경계심 ‘황화론’이 횡행하던 시절이기도 했던 만큼 유럽 금융가에서의 러시아 우세 전망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의 사촌인 독일 황제 빌헬름2세는 러시아가 발행한 2억3000만 루블의 외채를 받아 주었고 프랑스는 러시아에 파리 금융시장을 개방해주면서 측면 지원을 했다. 러시아의 기세는 등등했다. 일본으로서는 실로 암울한 상황이었다. 런던에 도착한 고레키요 일행은 런던의 국제투자 금융권 관계자들을 접촉하면서 1000만 파운드 외채 발행에 나섰다.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홍콩상하이은행 런던 지점장 카메론 씨(데이비드 카메론 전 영국 수상의 고조부)였다. 그의 도움으로 영국 퍼스은행과의 신디케이트 방식으로 500만 파운드 공채발행 문제는 타결되었다. 이는 목표치 1000만 파운드의 절반에 불과했다. 이것도 일본과 동맹관계인 영국정부가 암암리에 협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1941년 리비우에서 남성과 젊은이들에게 쫒기는 유태인여성 [일본위키피디아 제공]

박씨를 물고 온 유태인

고레키요가 나머지 500만 파운드 자금조달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어느 날, 그는 지인 아서 힐 씨가 주최하는 만찬회에 초대받았다. 그의 테이블 옆 자리에는 국제투자은행계의 거물 쿤·로브컴퍼니(리먼 브라더스의 전신) 대표 제이콥 시프가 앉아 있었다. 그는 고레키요에게 일본에 대해 이것저것을 캐물으며 큰 관심을 보였다. 다음날 아침, 퍼스은행의 파트너 알렉산더 샹드 씨가 고레키요 숙소의 문을 두드렸다. “어제 당신이 만났던 시프 씨가 일본국채에 투자하겠다면서 나머지 500만 파운드를 미국에서 전부 소화시켜 주겠다고 한다”라며 희소식을 전했다. 극적인 반전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영국 선데이타임즈는 ‘일본은 금융조달 전쟁에서 러시아를 무찔렀다’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런던 시장에서 일본 공채 가격은 급등했다. 고레키요는 후에 그의 자서전에서 “일본은 제이콥 시프가 내린 결단 덕분에 일본은 죽다 살아나게 되었다. 하늘이 내려준 천우신조였다”라고 적었다. 그는 행운의 박씨를 물고 온 제비였다. 그 이후 시프는 뤼순항 점령, 봉천전투, 동해해전 등 러일전쟁의 주요 고비마다 고레키요와 협의하면서 전쟁 기간 중 5차례에 걸쳐 총 8억 2000만 엔(8200만 파운드)의 추가 공채 발행을 소화시켜 일본의 전쟁 승리를 막후에서 견인했다. 전쟁이 끝난 후 메이지 일본국왕은 그를 초대하여 일본 최고의 훈장인 훈1등욱일대수장을 수여했다. 왜 그는 일본을 지원했을까?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디아스포라

제이콥 시프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하여 미국에 건너온 독일계 유태인이며 뉴욕의 유태인기업가모임 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유태인 권익 보호와 지위 향상에 앞장선 인물로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러일전쟁 1년 전인 1903년, 키시너우(현 몰도바 수도)에서 러시아 관리들의 선동 하에 자행된 유태인 박해 및 학살 ‘포그롬’(유태인 사냥의 뜻)에 분노하여 이를 계기로 반러시아 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적의 적’ 일본은 그들의 동지였다. 그를 중심으로 유태계 기업가들은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의 전시국채를 구입하는 등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해군이 동해해전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태인들은 뉴욕 맨하탄 건물 곳곳에 일장기를 게양하며 축하하기도 했다. 유태인 제이콥 시프의 결정적 공헌에서 기인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일본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대한제국에게는 재앙이었다. 러일전쟁 결과 조선반도는 일본의 전리품이 되고 만다. 일본은 가츠라·테프트 밀약과 포츠머스강화조약 등을 통해서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조선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자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에 파견하여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외교권 등을 박탈한다. 그리고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우리민족 치욕의 역사다.

이베리아반도에서의 1492년 8월 2일과 3일은 우리 역사에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2일은 카톨릭왕국 스페인이 유태인 추방령을 내려 집단적 디아스포라(유랑)가 시작된 날이고, 3일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해 출항, 대항해시대를 연 날이었다. 그로부터 각각 100년 후, 400여 년 후에 조선반도에는 폭풍우가 몰려오는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임진왜란)과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이 그것이다. 동아시아에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 조총을 전래하고 화약과 탄환 원료를 제공하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유태인 박해와 디아스포라는 러시아로 옮겨가 재연되는데 이는 미국 거주 유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러일전쟁에서 유태인의 일본 지원으로 이어지며 조선땅이 일본 식민지가 되는데 크게 작용한다. 1492년 8월 이베리아반도에서 날아오른 나비 두 마리의 날갯짓이 일본에는 훈풍이 되었고, 조선에는 폭풍우를 몰고 왔다.

다음 회에는 ‘닭을 기르지 않는 마을’이란 제목으로 몽골의 일본침공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여 올리고자 한다.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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