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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툭하면 배임죄...獨 아락도 한국선 글로벌 꿈도 못 꾼다
헤럴드경제 - 한국경제인협회 공동 기획
獨 아락, 성장·혁신 강조...공격적 사업확장
1997·2011년 배임혐의 기소 후 최종 무죄
G5 등 주요 선진국 배임 관련 처벌 낮아
국내선 경영진 처벌 빈번, 고소·고발 남발
경영계 “배임 리스크, 경영권 위축 우려”
글로벌 종합보험기업인 아락의 한 오피스에서 근무 중인 여성 직원들 [아락 인스타그램 갈무리]

#. “우리 가족(기업)을 알고,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기업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경영하라.” (아락그룹의 3대 경영 원칙)

성장과 혁신을 회사의 중요 경영 원칙으로 삼고 있는 독일의 종합보험기업 아락그룹(ARAG Holding SE)은 2023년 실적에서 전년 대비 7.9% 성장한 24억1800만유로(3조6617억원)를 기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불안 등 글로벌 불안정 여파가 이어지면서, 글로벌 보험회사인 아락은 되레 실적 특수를 누렸다. 법률·건강보험·종합보험 등 다방면에서, 지역적으로는 유럽·북미·호주로 펼쳐진 사업망이 회사의 실적 증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락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렌코 디르크센 박사

아락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렌코 디르크센 박사는 “미래는 그냥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이번 실적도 우리가 열심히 분석하고 노력한 결과에 따른 것”이라면서 “경영진은 꾸준히 변하는 상황에 따라서 함께 생겨나고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1935년 변호사인 하인리히 파스밴더에 의해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법률 보험 회사’로 설립된 아락은 현재는 세계 19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국적 보험기업이다.

처음에는 법률 보험 서비스 사업만을 영위했지만, 이후 생명보험(1965년)과 건강보험(1985년)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고, 보험과 컨설팅 사업 분야를 포괄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직원 숫자만 5070명, 지난해 새롭게 맺은 계약만 40만건에 달한다.

장수기업인 아락에는 ‘가족’과 ‘성장’이라는 경영철학이 있다. 주요 경영진은 기업의 구성원을 가족으로 인식하면서, 가족의 성장과 승리를 위해서 직접 뛰어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하도록 독려한다. 성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구체적인 실천 ‘아젠다’는 새롭게 다듬는다.

아락은 지난해 7월 영국의 법률 보험사인 다스(DAS UK)를 인수하는 빅딜을 발표하며 공격적인 사업 진출에 나선 바 있다. 영국법인 ‘아락 UK’가 앞서 14년 연속 흑자를 내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향후 추가적인 성장을 위해 다스와의 합병이 필요하다는 내부 판단에 따른 결정이다. 성장을 우선 가치로 두는 아락의 경영 철학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락의 공격적인 성장 전략은 때론 실패로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 수차례 신규 사업에 투자했다가 대규모 손실을 봤다. 급기야 1997년과 2011년에는 투자 실패에 대해 배임 혐의로 주주들에게 각각 고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은 1851년 세계 최초로 배임죄를 명문화했고, 당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배임으로 인한 경영진의 처벌이 쉬운 구조였다. 아락 케이스에 대해서도 업계에서는 “배임 혐의로 경영진에 대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하지만 독일의 연방대법원은 “신규 사업 투자는 경영자의 경영 행위로 자율성이 인정된다”며 경영진의 손을 최종적으로 들어줬고 아락은 사법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관련 업계 안팎에서는 “경영진이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기업 이익을 위해 신중히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라면 설사 기업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해도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이번 재판부의) 판결에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두 번의 아락 케이스 이후 독일에서는 ‘기업가의 공격적인 경영 판단’에 대해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 추세다.

독일은 주식법 제93조를 통해 ‘경영 판단의 원칙’을 명시하고 “업무에 관한 경영진의 결정이 적절한 정보에 근거하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뤄진 사실이 합리적 방법으로 인정될 경우 의무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고 예외사유를 두고 있다. 또 배임죄 처벌 대상으로 ‘후견인, 관리인, 재산보호인, 재단관리인, 계량인, 측량인, 부두하역인’등 행위자를 명시해 처벌받는 대상자를 제한하고 있다.

반면 독일과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배임으로 인한 경영진 처벌이 여전히 빈번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영계는 “광범위한 배임 혐의 적용에 따른 리스크는 기업인의 경영 범위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만큼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재계와 법조계에서 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법체계의 배임에 대한 처벌 대상이 광범위하고, 배임에 대한 규정수도 많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한국과 G5 주요 선진국(미국·영국·독일·일본·프랑스) 등 6개국의 법체계를 비교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배임에 대한 처벌을 ▷(일반)배임죄(형법 355조) ▷업무상 배임죄(형법 356조) ▷특별배임죄(상법 622조) 등으로 나눠서 규정한다. 이 가운데 형법상의 배임죄는 금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5년 이상의 징역, 5억~50억원일 경우 3년 이상의 징역이 특경법(특정경제범죄의 가중처벌법)상 각각 가중될 수 있다.

이는 선진국의 법체계에서 찾을 수 없는 대목이다. 실제 판례법을 따르는 미국과 영국에서는 배임죄 처벌규정 자체가 없었고, 배임 관련 소지를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사기죄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일본·프랑스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는 형법에 배임죄를 명문화하고 있지만, 처벌규정수는 비교적 적다. 한국처럼 금액에 따른 특경법 규정도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 법체계 속에서는 누구나 배임 혐의로 경영진을 쉽게 고소·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해당사자가 아니어도 배임죄 고발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경쟁자를 모함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또 고소·고발이 된 사건은 수사기관에서 검토가 이뤄져야 하므로, 이 경우 고발자가 상대 기업의 정보를 캐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아울러 경영자가 수사기관과 법정에 나가야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소환과 법적 대응 이슈가 생겨난다. 기업인의 배임 혐의 수사가 시작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이로 인한 기업의 부담이 더욱 가중되는 것이다.

과도한 ‘배임 리스크’가 기업 경영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국내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은 의료기기 제조업체 A사는 꾸준한 사업성과를 바탕으로 신규 사업인 ‘의료 경영 서비스’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등 외생적인 변수가 겹치면서 이 분야에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결국 A사는 신규사업 과정에서 인수한 계열회사로부터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당했다. 결국 사건은 불기소 처분이 났지만, A사는 경영 압박과 배임 수사를 동시에 부담해야만 했다.

한때 재계 10위권을 노리던 ‘자수성가형’ 기업가 B회장의 사례도 있다. B회장은 그룹이 경영난에 봉착하자 어려움에 처한 C계열사를 돕기 위해 우량 계열사의 자금을 이용했다가 업무상 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대법원까지 이어진 법적 다툼에서 재판부는 B회장에게 배임 혐의로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C계열사의 회생가능성을 감안했을 때, B회장이 그룹사의 자금을 지원한 것이 배임 혐의상 고의가 인정된다는 판단이었다. 세 번의 재판에서 기업의 노조와 협력업체 대표, 임직원은 B회장을 지지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지만, B회장의 유죄 판결을 막지는 못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명문화한 배임에 대한 처벌 규정 중 형법상 배임혐의 처벌 규정은 특경법 적용으로 가중처벌이 이뤄질 소지가 있다”면서 “선원은 선원법, 공무원은 공무원법이 우선적용되는 것처럼 경영자의 경우에도 회사법상 특별형법이 우선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우 기자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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