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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질에도 살아남은 ‘신인류의 모델’...최고가 미술품 된 사연
현대미술의 개념 바꾼 앤디 워홀
1964년작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20세기 미술품 중 최고가격 낙찰
총알에도 살아남아 희소성 커져
대중·순수미술 간 경계 허물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 앤디 워홀의 작품이 걸려있는 모습

“신사 숙녀 여러분, 앤디 워홀(1928~1987)의 작품이 판매됐습니다.”

월요일이었던 2022년 5월 9일(현지시간) 밤, 미국 뉴욕 맨해튼 크리스티 경매장.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20세기 미술품 역사상 가장 비싼 작품이 낙찰된 순간이었습니다. 경매사가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기다렸다는 듯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죠.

수수료를 포함해 무려 약 2500억원(1억9500만달러)이라는 ‘어마무시한’ 금액에 낙찰된 이 작품은 바로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작품을 향한 과열된 분위기를 보여주듯 당시 경매에서 입찰 가격은 0.1초마다 서울 아파트 한 채 값(100만달러·약 13억원) 정도씩 치솟았습니다. 마침내 작품의 새 주인이 된 사람은 세계 최대 갤러리를 운영하는 당시 일흔일곱의 전설적인 미국의 아트 딜러 래리 가고시안이었습니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샀는지 아니면 데이비드 게펜(엔터테인먼트업계 거물인 영화 프로듀서), 스티브 코헨(미국프로야구 뉴욕 메츠 구단주이자 헤지펀드업계 거물), 레너드 로더(에스티 로더 회장) 같은 억만장자이면서 메가 컬렉터인 이들 중 한 명을 위해 구매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확인됐죠. 뉴욕에서 홍콩까지 무려 19개 도시에 지점을 낸 ‘갤러리 제국’ 가고시안 갤러리의 위상은 가히 짐작이 어려울 정도라는 겁니다. 실제로 가고시안 갤러리가 한 해 벌어들인 매출이 1조원 정도인데요. 한 해 동안 한국에서 팔린 미술품을 다 합쳐도 이만큼이 안되거든요(가고시안은 여전히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9월 ‘프리즈 서울 2024’ 개막과 함께 국내 첫 전시를 열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이 즈음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왜, 워홀이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이 이렇게나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엔 무척 복합적이지만,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바로 ① 초강대국을 꿈꾼 미국의 시대정신이 담긴 상징적인 작품이자 ② 특별한 사연이 얽혀 작품이 명성과 희소성을 갖게 됐으며 ③ 독특한 작품의 생산 방식 때문입니다. 워홀에게 ‘최초’라는 단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데요. 여기에 작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까지 더해졌으니,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할 수밖에요.

앤디 워홀이 제작한 ‘샷 마릴린’ 시리즈

우선 이 작품은 미국 배우 마릴린 먼로(1926~1962)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1964년에 워홀이 제작한 ‘샷 마릴린’ 시리즈 구성 작품 중 하나입니다. 간단히 보면, 워홀은 먼로가 주연을 맡아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영화 ‘나이아가라’(1953)의 포스터 사진을 선택한 뒤, 판화의 한 기법인 실크스크린으로 작품화한 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제 작품에는 아무 감정적 의미가 없다”까지 말하는 워홀인데요, 사실 그의 예술은 기존 미술이 가진 엄숙주의를 완전히 깨부순 것이기 때문이죠. 1950~1960년대 초반 섹스 심벌이자 세기의 아이콘을 모티브로 한 이미지를, 직접 붓질로 그린 것이 아닌, 홈이 있는 판에 잉크를 묻혀 인쇄하는 판화 기법으로 작품을 여러 점 생산한 것이니까요. 그가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타파한 미술 운동인 ‘팝아트’ 작가로 분류되는 것는 이러한 배경에서죠(일부 작품은 판화 위에 채색을 더해 그 자체로 희소성을 갖도록 기존 예술의 의미를 전복시키기도 했고요).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볼까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먼로는 대량 소비시대에 만들어진 신화적 상품, 그 자체였습니다. 슈퍼스타가 된 먼로는 당시 세계대전을 겪으며 초강대국으로 거듭난 미국인이 염원한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이었거든요.

무엇보다 ‘꿈의 공장’인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등장한 먼로는 워홀의 예술관을 구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이미지였을 겁니다. 최고의 부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먼로를 우상으로 여겼죠. 마치 누구나 똑같은 품질의 코카콜라를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겁니다. 대중문화의 산물인 먼로가 가진 이미지는 그만큼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던 건데요.

특히 워홀이 먼로를 모티프로 차용한 타이밍이 핵심이었습니다. 워홀은 먼로가 36세 젊은 나이에 의문스럽게 생을 마감한 뒤에 그를 모델로 선택했거든요. 먼로의 물리적 죽음을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상징화해버린 겁니다. 실제로 먼로의 사후 명성은 생전의 인기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본 워홀의 이러한 결정은 시대의 경향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는 그의 탁월한 감각이었고요. 작품 주제로 먼로를 선택한 결정적인 요인이 분명 여배우의 성적 매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당대 유명한 섹시 금발 배우는 리타 헤이워드였고, 먼로는 사망한 지 훨씬 뒤에야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앤디 워홀의 ‘샷 세이 지 블루 마릴린’을 구매 한 미국의 아트 딜러 래 리 가고시안

그런데 워홀의 최고가 작품으로 낙찰된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은 좀더 특별합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작품이거든요. ‘샷(shot)’이라는 작품 제목은 사실 행위예술가 도로시 포드버가 워홀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벽에 먼로의 작품들을 겹쳐 세워달라고 말한 뒤, 갑자기 권총을 발사한 사건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워홀의 ‘샷 마릴린’ 시리즈는 각기 다른 다섯 가지 색으로 제작됐는데, 당시 난데없는 총질로 두 점의 작품에 총알이 관통됐습니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단 세 점만 남은 ‘샷 마릴린’ 시리즈라서, 제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도 구할 수조차 없는 희소한 작품인 건데요.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에서 받은 영감을 미학으로 그려낸 워홀은 작품의 생산 방식도 그의 예술관과 궤를 같이 합니다. 광고 전단이나 상표를 제작하는 상업용 인쇄 방식인 실크스크린 기법을 순수미술에 도입한 겁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창작물을 확대 재생산한 최초의 예술가가 바로 워홀입니다.

그의 혁명적인 작업 방식에 미술계는 발칵 뒤집어졌죠. 한마디로 그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우리가 흔히 알던’ 작가가 아니었으니까요. 워홀은 1962년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캔버스에 대량으로 복제하는 거대한 작업실을 마련해 운영했는데, 이곳을 ‘팩토리(factory)’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미술 작품을 공장에서 찍어 생산해낸다는 그의 도발적인 접근은 미국 물질주의 문화를 반영한 작가의 집착이었죠.

이렇게 제작된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은 현대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바꾼 워홀의 독창적인 작업 중에서도 총알을 피한 평판 높은 작품이었던 겁니다.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를 풍부하게 해 경매를 성공적으로 이끌고자 했던 크리스티의 작품 설명을 좀 더 살펴볼까요.

경매 당시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가리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잇는 작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작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크리스티의 마케팅 수사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이 20세기 후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를 매우 워홀다운 방식으로 끝없이 재생산한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죠.

“회화에 관한 내 본능은 말한다. 만일 네가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당연하다. 네가 결정하고 선택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더 많이 판단하면 할수록, 더 잘못되고 만다.”

생전의 앤디 워홀

상업예술에 등장하는 인물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순수예술로 인정받길 바랐던 워홀, 그는 어쩌면 지극히 경험에 기반한 직감을 따랐던 걸까요.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사업을 잘하는 것은 최고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워홀은 “패션은 예술보다 상위에 있다”고도 한, 그러니까 기존 미술계가 가진 권위를 완전히 뒤엎은 살아있는 신화였습니다. 그의 존재 이후, 예술이 이전의 예술과 다른 양상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분명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 건데요.

실제로 워홀은 “미래에는 백화점은 미술관, 미술관은 백화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며 소비주의와 물질주의를 낙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요즘 그런 공간이 많아졌습니다. 보편적으로 쓰여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없는 ‘아트 마케팅’ 역시 순수미술과 상업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워홀의 예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고요.

다만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습니다. 총에 맞고 힘겨운 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순간에도, 이후 담낭 수술 합병증으로 세상을 뜬 마지막 순간까지도, 워홀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은 인상을 풍겼거든요. 엄밀히 말하면 그는 ‘냉정한 관찰자’에 가까웠죠.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사물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그것들을 당신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자신만의 ‘레이더’로 잠재된 기대를 발견해 이를 기록하는 수단으로서 예술을 사용했던 작가, 그는 시대의 욕구를 반영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개념을 만든 ‘신인류’ 중 한 명인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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