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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햄릿’으로 첫 연극 도전한 루나 “죽음의 트라우마까지 겪었지만…연기에 오히려 도움” [인터뷰]
f(x) 출신 루나, 햄릿 연인 오필리어役
순수한 사랑 빠지다 광증으로 생 마감
“오필리어의 깊은 슬픔 표현하려 노력”
가수 겸 배우 루나.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버지의 명령으로 만나지 못했던 햄릿 왕자님을 석 달 만에 만났다. 그의 옷차림과 표정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안쓰러운 그를 나는 붙잡지 못했다. 그를 그토록 지독히 괴롭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를 지켜주고 싶다. 지금 이 성안에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나의 ‘오필리어 일기’ 중)

장장 170분에 달하는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 11시 30분.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치면 자정을 훌쩍 넘긴다. 그 때부터 루나는 ‘오필리어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짧게 끝나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한 시간 넘게 오필리어를 놓지 않는다.

“그날 그날의 무대에서 기술적으로 어떤 것을 잘 됐고, 무엇이 더 나았는지, 어떤 장면에서 집중이 잘 됐는지, 집중이 되지 않았던 부분의 문제를 찾아요. 오필리어를 연기할 때 도움이 될만한 음악도 듣고요.”

늘 그랬듯이 루나(31)는 이번에도 열심이다. 연습생을 시작한 열세 살 때부터 2세대 K-팝 그룹 f(x) 시절을 지나 지금까지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작부터 달랐다. 첫 연극 ‘햄릿’을 만나서다.

어느덧 공연 한 달차. 매일 무대에서 사랑하고 아파하며 울부짓는다. 최근 공연에 한창인 서울 종로구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에서 만난 루나는 “매일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라고 했다.

K-팝 그룹 출신이다 보니 ‘노래’ 없는 루나의 연기엔 물음표가 따라왔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햄릿’의 오필리어는 꿈이었다. 대학에서 연기(중앙대 공연예술학부)를 전공한 그는 “현대극보다는 고전에 더 관심이 많았고, 오필리어는 여배우라면 무조건 하고 싶은 작품”이라며 “하지만 이렇게까지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일지 몰랐다”고 돌아봤다.

가수 겸 뮤지컬 배우 루나가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오필리어가 되기 위해 루나는 매일 매일 슬픔의 강으로 더 깊이 뛰어 든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연습 과정은 그에게 만만치 않았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종일 울었어요. 매일 울다 보니 목도 쉬고 몸도 망가지는데 목표는 오직 하나였어요. ‘이걸 무조건 해내자’, ‘표현해내자’는 마음이었죠.”

루나의 오필리어는 부단한 노력 위에 만들어진 캐릭터다. 순수한 사랑에 빠지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자, 광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한없는 슬픔에 던져진 지독한 비극 속 주인공이다. 짧고 강력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그는 모범생처럼 파고 들었다. ‘광증’의 실체를 알기 위해 안젤라 애커만과 베카 푸글리시가 쓴 ‘트라우마 사전’을 탐독했고,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도 받았다.

“사실 오필리어의 감성과 상황을 따라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제게도 그런 (죽음에 대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트라우마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을 연기로서 캐릭터에 녹여내고 (관객들을) 설득하는 게 어려웠어요. 나도 이런 경험이 있는데, 이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달리 행동할 수 있을지 열어두고 생각해봤어요.”

배우로서 자책이 들던 순간도 있었다. 오필리어의 슬픔을 온전히 체화하지 못하던 어느 날, 손진책 연출가로부터 “너의 슬픔이 그 정도냐”는 피드백을 받았다. “매일 울고 또 울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난 정말 이것밖에 해내지 못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때 정신을 바짝 차렸어요. (웃음)”

루나의 오필리어는 1인 2역에 가깝다. 순수한 영혼을 그린 1막을 지나면 광증으로 내몰린, 전혀 다른 오필리어가 나온다. 그는 오랜 시간 무대 위에 머물지 않지만, 순식간에 관객을 처절한 슬픔 안으로 잡아끈다. 관객에게 방심할 틈도 주지 않는다.

첫 도전은 성공적이다. 대배우들의 ‘연기 차력쇼’와 같은 무대에서 루나는 주눅들지 않고 제 몫을 온전히 해내고 있는 것. 특히나 ‘햄릿’ 현장은 전무송(83), 이호재(83), 박정자(82), 손숙(80), 김재건(77), 정동환(75), 김성녀(74), 남명렬(65), 박지일(64) 등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의 존재에 연극계 거장 손진책 연출가의 호된 트레이닝 덕에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가수 겸 뮤지컬 배우 루나가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루나는 하지만 “선생님들이 많은 연극이라고 부담은 없었다”고 했다. 햄릿을 연기하는 강필석은 첫 연습부터 루나에게 “겁이 없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연습생을 시작했고, 할머니와 함께 자란 환경 덕이다. 루나는 “어른들에게 배우고 혼나는 건 언제나 익숙하다”며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매일 존경심이 들고, 대사 한 줄 한 줄에서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K-팝 그룹에서 배우로, 지난 15년간 루나는 매순간 바쁜 삶을 살았다. 그의 이름에도 루나의 삶이 녹아있다. 루나의 이름은 그의 ‘춤 스승’인 리아킴이 지어줬다. “새벽 4시까지 잠을 안 자고 연습하니 밤에도 빛나는 달 같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그는 “치열했고, 참 힘든 20대를 보냈는데 30대가 된 지금은 내 인생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고 했다.

“언젠가 잠시 이 길 위에서 멈춰선 적이 있었어요. 회의가 들었던 것 같아요. 루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지도, 내게 주어지는 일들, 제게 관심 없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거친 말들 때문이었어요. 브레이크가 걸렸을 때 다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됐던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었어요. 한 번 뿐인 나의 삶을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은 너무나 행복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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