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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벌거벗은 女, ‘야수 득실’ 정글 한복판에 어쩌다…‘영감님’의 남다른 구상[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작품편 108. 앙리 루소]
마흔아홉에 전업 화가된 남자
“그림 배꼽 빠진다” 바보 취급
“나는 현대적 스타일서 최고”

<동행하는 작품>
잠자는 집시
전쟁


.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앙리 루소, '꿈', 1910, 캔버스에 유채, 204.5x298.5cm, 뉴욕 현대미술관
앙리 루소, '꿈', 1910, 캔버스에 유채, 204.5x298.5cm, 뉴욕 현대미술관
앙리 루소, 'Self-portrait of the Artist with a Lamp'
“시장님, 내 그림 사세요”
프랑스 라발시 시장님께.
저는 라발시 출신의 시민입니다. 시장님께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회화를 배운 화가입니다. 그림 한 점을 추천하오니, 부디 제 고향에서 사들여 소장해주면 좋겠습니다. 구입을 권하는 작품은 〈잠자는 집시〉고요. (…) 저의 소박한 희망이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시장님의 호의를 기대합니다.
앙리 루소 올림.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1897, 캔버스에 유채, 129.5x200.7cm, 뉴욕 현대 미술관

1898년. 루소는 들뜬 기분으로 이런 편지를 썼다.

그는 지난해 작업을 마친 〈잠자는 집시〉가 그만큼 좋았다. 화폭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두른 집시가 보인다. 평소에는 만돌린 연주로 푼돈을 벌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는 재미를 다 본 마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고 있다. 지팡이와 물항아리에 챙겨 사막을 횡단하던 그녀는 깜빡 잠이 들었고, 그대로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빠져들었다.

주린 배를 잔뜩 채우는 꿈? 끝내주는 공연을 하고 환호받는 상상? 집시의 머릿속에서 어떤 순간이 그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간 바란 장면이 펼쳐진 듯 배시시 웃는다. 이때 통통한 사자 한 마리가 다가온다. 두 눈을 크게 뜬 녀석은 그녀의 머리칼 냄새를 킁킁 맡는다. 백수(百獸)의 제왕이란 그 명성과 달리 위협적으로 보이질 않는다. 검푸른 하늘 위로는 주름진 보름달이 유영한다. 드문드문 찍힌 소금 알맹이 같은 별, 서늘한 월광을 품은 공기, 저 멀리 보이는 산맥 같은 사막 봉우리는 초현실적 기운을 더해준다. 단조로운 표현, 직관적인 구성은 시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건 망설인다.' 루소가 제목 옆에 단 부제는 애틋한 마음마저 들게끔 이끈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일부 확대)

웅장한 그림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피어난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아주 '모던'(modern)했다.

무겁지 않고 가벼우며, 진지하지 않고 순수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다만 이는 후대의 평가일 뿐이었다. 동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튀는' 작품을 괴작(怪作)으로 취급했다. 박한 점수를 주며 모욕적인 말도 서슴지 않았다. 실제로 루소는 이 그림을 완성한 해에 파리 앙데팡당 전(展)에 출품했지만, 비평가들에게 "일부러 이상한 그림을 그려 주목만 받으려고 하느냐"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한 신문은 "루소는 잠자는 공주를 그렸다. 한마디로 하품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 보는 이의 배꼽을 빼는 작품이다. 그림 속 사자도 어흥하고 비웃을 게 분명하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영광이 있기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버젓이 게재했다.

앙리 루소, 'A Centennial of Independence'

루소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늘 그랬듯 자기 그림에 엄청난 애착과 자신감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런 굴욕을 당하고도 고향 단체장에게 자신만만히 "내 그림을 사시오!"라고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지를 부친 루소는 설렘을 안고 매일 아침 우편함을 뒤적였다. 라발시장의 답장이 내일, 늦어도 모레는 올 것으로 기대하며 잠들곤 했다. 하지만 루소는 끝내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 건너 듣기로는, 그의 편지는 "내용이 너무 유치하다"는 말과 함께 그대로 버려졌다고 했다. 민망한 결과였다. 그는 이처럼 무시와 조롱, 비난과 비웃음에 거듭 절여졌다. 루소는 왜 이토록 천둥벌거숭이 취급을 받았을까. 훗날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도 각별한 대우를 받는 〈잠자는 집시〉는 왜 이렇게까지 과소평가를 받았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먼저 루소가 '어떻게' 화가가 됐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늦깎이 ‘괴짜’ 화가의 탄생
앙리 루소, 'The Football Players'

루소는 나이가 마흔 줄이 닿고서야 회화계에 뛰어든 예술가였다.

늦깎이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서른 살쯤, 폴 고갱이 서른다섯 살께 전업 화가가 된 사례와 견줘봐도 압도적으로 늦은 것이었다. 그에게 별난 점은 더 있었다. 평생 제대로 된 그림 교육을 받은 적도, 늦게나마 받을 뜻도 없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돈이 차고 넘치는 부자였는가. 좋은 가문과 든든한 뒷배를 두고 있었는가. 이 또한 아니었다. 그런 그가 괴짜 기질을 보이며 전통과 유행 중 어디도 따르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놀림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웃겨서 배를 잡게 한 ‘일요 화가’의 작품
앙리 루소, 'Child with a doll'

1844년 프랑스 라발에서 출생한 루소는 원래 화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가난한 배관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바로 돈벌이를 했다. 루소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그는 얼마 안 돼 충동적으로 남의 돈과 우표를 훔쳤고, 이는 곧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멱살이 잡힌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루소는 절도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7년간 군 생활을 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졸지에 군악대 소속 클라리넷 연주자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다 입대 5년 차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고,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이 건으로 인해 조기 제대할 수 있었다. 잡일을 전전하던 루소는 1871년에 파리의 말단 세관원으로 취직했다.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 통행료 징수 등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는 직이었다. 이때가 스물일곱 살이었다.

앙리 루소, 'The Avenue in the Park at Saint Cloud'

그간 돈이 없어 온갖 수모를 겪었다고 본 루소는 이쯤부터 부자가 되는 걸 삶의 최대 목표로 삼았다.

루소는 때마침 이웃집에 살던 화가 펠릭스 클레망이 그림으로 막대한 부를 쥐는 걸 봤다. 이를 계기로 진지하게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은 곧잘 따라 그린다고 칭찬받던 옛 시절도 떠올렸다.

루소는 이쯤부터 일요 화가라고 불리며 살았다. 이는 주중에는 일, 주말에만 붓을 쥐는 삶을 의미했다. 사실은 예술을 앞에 두고 '깔짝'거리기만 한다는 멸칭에 가까운 용어였다. 그는 놀림과 조롱 속에서 꿋꿋이 직장 근처 풍경을 그리고, 미술관을 돌며 거장의 작품을 베끼는 식으로 독학을 지속했다. 루소는 마흔한 살이 된 1885년에 기어코 살롱전 참가 꿈을 이뤘다. 그러나 결과는 낙선이었다. 미술 엘리트가 모인 이곳에서 루소의 그림은 일종의 돌연변이였다. 기본적인 색채와 비례, 명암법과 원근법마저 짓이겨버린 그의 캔버스는 고약한 장난 내지 재앙처럼 여겨졌다. 루소는 이듬해인 1886년부터는 앙데팡당 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그것도 7년간 20점을 제출했다. 폐쇄적 풍토의 살롱전에 반대한 이들이 꾸린 앙데팡당전은 개방적 분위기를 자랑처럼 내걸었다. 하지만 이곳마저 매년 들어오는 기이한 일요 화가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소의 이상한 그림을 계속 받아줘야 하는가?" 간부들이 둘러앉아 진지하게 토론까지 할 정도였다.

앙리 루소, '나, 초상-풍경', 1890, 캔버스에 유채, 146x113cm, 프라하 국립 미술관

가령 이런 그림이었다.

웬 열기구가 하늘로 떠오르고 있고, 아래에선 만국기를 건 배가 강을 가로지른다. 그 사이로는 창문 많은 건물과 육중한 다리가 장식품처럼 깔려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맞아 1889년에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앞에서 원근법을 무시한 채 거인인 양 우뚝 선 남자가 있다. 루소 자신이었다. 붓과 팔레트를 든 그는 멀끔한 정장을 입고서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여기 주인공이자 우두머리라는 듯한 모습이다. 루소의 작품 〈나, 초상-풍경〉이었다. 비평가들은 이 그림 앞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대상을 얼기설기 오려 붙인 듯한 기법에 한 번, 자기가 거장인 듯 자신감을 내보인 괴짜 화가의 기세에 또 한 번 폭소했다.

장 제롬, 'The Snake Charmer', 루소의 그림과 여러모로 아주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쯤 되면 웬만해선 더는 못 해 먹겠다며 관둘 법도 한데, 루소는 그러지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은 굳건했다. "내가 그림으로 제롬만큼 돈을 벌고 유명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루소는 종종 이런 말도 했다. 그가 말한 장 제롬은 당대 가장 잘나가는 화가였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훈장 레지옹 도뇌르, 프로이센 최고 명예 훈장인 붉은 독수리를 모두 받은 전설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루소가 단순히 거부를 향한 욕망만으로 온갖 모멸감을 견뎠다고 보기에는 설명이 부족해보인다. 루소가 예술을 놓지 않은 또 다른 이유, 그것은 그림에 몰두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위로해방감의 영향도 컸다. 어느덧 중년이 된 루소에겐 도피처가 절실했다. 이 무렵 루소는 이십 대 때 결혼한 아내와 사별한 상태였다. 슬하에 여섯 이상의 자녀를 뒀지만, 대부분은 유아기에 죽고 말았다. 그는 금실 좋고 화목한, 웃음과 눈물로 북적일 수 있던 한 가정을 통째로 잃은 상황이었다. 그런 그에게 혼을 바쳐 몰입할 수 있는 그림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단 하루도 온전히 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루소의 〈나, 초상-풍경〉 속 팔레트를 다시 보면 '클레망스'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먼저 간 아내 이름이었다.

‘르 두아니에’의 반란이 시작되다

1893년, 마흔아홉 살을 맞은 루소는 기어코 결단을 해버렸다.

일요 화가에 이어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라는 놀림조 별명까지 따라붙은 루소는 아예 전업 화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22년간 일한 직장을 관둔 그는 바이올린 과외(루소는 수준급의 악기 연주 실력도 갖고 있었다!)로 번 푼돈과 약간의 연금에 기대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앙리 루소, '전쟁', 1894, 캔버스에 유채, 114x195cm, 오르세 미술관

그리고 다음 해, 루소는 드디어 첫 대표작이라고 꼽을 만한 그림을 그렸다. 〈전쟁〉이었다.

화폭을 보면 전쟁의 여신 에니오(Enyo)를 형상화한 듯한 소녀가 칼과 횃불을 들고 있다. 길쭉한 괴물 말에 올라탄 그녀는 광기의 현장을 마음껏 누비는 모습이다. 핏빛 구름과 잘린 나뭇가지가 비극적 분위기 연출에 힘을 보탠다. 주변에는 까마귀 무리가 보이는데, 몇몇 녀석의 부리에선 피가 뚝뚝 흐른다. 널브러진 시체 더미를 쪼아먹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식은 얼굴은, 그 자체로 섬뜩함마저 안긴다.

독학 화가 루소가 작업에 앞서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 〈엡섬의 더비 경마〉 〈메두사호의 뗏목〉, 상징주의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밤〉 등을 스스로 공부한 점도 흥미롭다. 루소의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한 이 그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참상을 더욱 강렬하게 전했다. 늘 봐온 뻔한 구성과 묘사로 총칼의 광기를 전한 게 아니기에 더 깊이 뇌리에 박혔다. "루소는 이상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모르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꼭 조롱할 필요가 있는가. (…) 자신이 이해할 수 없으면 모조리 바보짓이라고 밀어두면 속은 편하다. 루소는 사회의 어리석은 편견 속 제물이 돼버렸다." 루소의 〈전쟁〉을 보고 감동한 작가 알프레드 자리는 언론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자리 등 루소보다 서른 살가량 어린 예술가들이 이 의뭉스러운 화가를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테오도르 제리코, '엡섬의 더비 경마'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페르디난드 호들러, '밤'

하지만 몇 년 뒤 루소는 〈잠자는 집시〉로 또 다시 멸시를 받았듯, 극적인 입지 변화는 없었다.

이러한 루소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그림이 있었다. 그게 바로 그의 정글 연작이었다. 1904년쯤부터 6년 가량 집중적으로 그린, 훗날 그의 정체성이 되는 시리즈였다. 루소는 동네 동물원과 식물원, 외젠 들라크루아 등 화가들의 작품을 참고해 그만의 정글을 창조했다. 가공과 편집, 짜깁기로 점철된 영역이었다. 그는 당시 떠돌던 소문과 달리 프랑스 국경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정글도 가본 일이 없었다. 그는 군인 시절 멕시코 밀림에서 참호를 팠었다는 식의 경험담을 신나게 떠들었지만,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는 당시 친교를 맺은 폴 고갱 등 화가가 이국에서 영감을 얻어오는 게 부러웠을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가란 유학과 탐험에 나서야 한다는 인식 속 "방구석에 앉아 정글을 그렸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상상만으로 빚은 그 세계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이 녹색 세상은 남쪽 나라 어딘가에 숨어있을 미지의 땅을 떠올리게 했다. 당장 맥가이버칼을 든 채 탐험하고 싶은, 그게 아니라면 모든 걸 내려놓고 그곳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했다.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덮치다'
앙리 루소, '뱀을 부리는 여인'

가령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덮치다〉 속 정글은 색종이를 잔뜩 붙인 연극 무대처럼 보인다.

영양의 목덜미를 문 사자와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는 퓨마 등은 모두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처럼 아기자기하게 느껴진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비례법과 명암법 따위 적용되지 않았는데, 외려 그렇기에 밀림은 더 환상적인 분위기를 품게 됐다. 〈뱀을 부리는 여인〉에 그려진 정글 또한 매혹적이다. 달빛이 깔린 숲에서 한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다. 뱀은 그 소리에 맞춰 춤추듯 흐느적거리며 다가온다. 그러는 동안, 큼지막한 잎이 이들에게 장난스레 물방울을 톡톡 떨어뜨릴 듯도 하다. 누구든 한 번쯤은 보고 싶은 인간과 동물, 식물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폴 세잔을 재발견한, 젊은 파블로 피카소를 후원한 화상 앙부르아즈 볼라르가 〈굶주린 사자가 영양을 덮치다〉를 200프랑에 샀다. 루소의 그림은 이 덕에 처음으로 미술시장에 입성할 수 있었다. 수완 좋은 볼라르가 움직이자 많은 이가 루소 뒤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루소는 여전히 괴짜였지만, 이제 무명 화가라곤 볼 수 없었다. '르 두아니에'의 반란이 뒤늦게 시작됐다.

“나는 현대 스타일에서 최고지요”

벌거벗은 여인이 정글 한복판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소파에 몸을 걸친 그녀는 이곳이 익숙한 듯 시선을 자연스럽게 수풀 쪽으로 두고 있다. 티치아노 베셀리오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 포즈로 있는 그녀 이름은 야드비가. 루소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성이다. 그리고 이 여인 앞에 펼쳐진 이 정글은 사실 그녀의 꿈속 공간이다. 눈을 번뜩이는 사자 두 마리와 몸을 숨긴 코끼리, 매달린 원숭이와 우아하게 자리 잡은 새, 피리를 부는 여인과 그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분홍색 뱀 등 득실대는 이들 모두가 한 무리에 속해있는 듯 조화롭다. 야자수와 오렌지 나무, 라일락과 유칼립투스, 이 밖에 기묘하게 생긴 풀과 줄기 또한 50가지 이상 녹색이 칠해진 빽빽한 밀림 속 용케도 제자리를 잡고 있다. 루소의 마지막 대작 〈꿈〉이었다. 현실과 초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그림은 놀랍도록 신선했고, 한편으로는 경이로울 만큼 정교했다. 원근법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루소가 그만의 영역에서 기어코 '아트'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앙리 루소. '꿈'(일부 확대)
티치아노 베셀리오, '우르비노의 비너스'

당시 전위 예술가들은 원시 미술과 아프리카 예술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었다.

루소는 이들에게 '아버지' 혹은 '영감님', '파리의 원시인' 등 애칭으로 받들어지기 시작했다. 루소는 이제 젊은 친구들의 변호를 받는 일을 넘어, 지지와 그 이상의 칭송까지 받고 있었다. 그렇게 화단과 미술시장 양쪽에서 주목받는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앙리 루소, '놀랐지!'

말년에 접어든 루소의 든든한 우군을 자처한 이 중 한 명이 화가 파블로 피카소다.

사실 루소가 이처럼 관심을 받은 데는 피카소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웬만한 성인 화가만큼 그렸던 피카소는 한평생 어린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피카소에게 루소의 순박한 그림은 잊히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피카소는 루소의 작품을 꾸준히 사들였다. 그의 친구와 동료 화가들에게도 열심히 홍보했다. 이러니 루소의 이름값도 덩달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피카소는 아예 그가 걸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다음 해인 1908년, 루소를 주인공으로 한 나름의 성대한 파티도 열었다. 일명 '루소의 밤'이었다. 피카소와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 아울러 여러 젊은 예술가가 참석한 행사에서 웬 커다란 모자를 쓰고 등장한 루소는 입이 귀에 걸린 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우리 둘은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당신은 이집트 스타일에서 최고, 나는 현대 스타일에서 최고지요." 이날, 뜨거운 환호에 함박웃음을 짓던 루소가 피카소를 돌아보며 건넸다는 말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당시 피카소 등 현장의 모든 이가 이 말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농담 섞인 허풍이었을까. 너희가 모두 나를 '순수한 원시인' 정도로 생각하지만, 언젠가 세상은 나를 특출난 모더니즘 화가로 칭할 것이라는 뼈 있는 지적이었을까.

앙리 루소, 'Two Monkeys in the Jungle'

파란만장한 삶을 산 루소는 〈꿈〉을 완성한 1910년, 봉와직염 등 악화로 영영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토록 바란 진짜 부자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그 무렵,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꿈〉을 완성한 예순여섯 살 나이였다. 루소에 대한 실질적 평가는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작가들은 쟁쟁한 예술가를 다 제쳐두고 루소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지목했다. 시대를 앞선 위대한 화가였다는 걸 인정한 격이었다. 그리고 루소가 피카소의 파티에서 한 말처럼, 오늘날에는 많은 이가 그를 모더니즘의 대부로 칭하고 있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참고 자료〉

앙리 루소,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마로니에 북스

붓으로 꿈의 세계를 그린 화가 앙리 루소, 안젤라 벤첼, 랜덤하우스코리아

앙리 루소, 원시, 유니온아트, 봄이아트북스

앙리 루소, 'Carnival Evening'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가끔 역사, 문학 등과 관련한 특별전도 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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