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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계 “장기적 투자집행 어려워져 사업 경쟁력 악화” 우려
충실의무대상, 회사서 주주로 확대방안 반발
장기투자 중시하는 대주주 지배권 위축 우려
단기이익 요구하는 주주 소송 남발도 불가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12일 오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정책 세미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 논란에도 금융당국이 재차 추진의지를 밝히면서 재계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기업들은 이사가 단기이익을 우선시하는 주주들에 충실할 경우 장기적인 투자 집행이 어려워져 사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충실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사를 겨냥한 주주들의 소송이 남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러한 반발에도 정부와 국회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12일 자본시장연구원·한국증권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지배구조 정책 세미나’에서 “쪼개기 상장 같이 회사나 특정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상법 개정 여론은 지난 2020년 LG화학이 물적분할로 신설한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하면서 대두됐다. 당시 LG화학 주가 하락으로 기존 주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소수주주 보호 차원에서 이사 충실의무 확대방안이 거론됐다. 이사의 의무를 명확하게 규정해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으나 임기만료로 폐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원장이 기업 밸류업 정책의 일환으로 이사 충실의무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힌 가운데 22대 국회 들어서도 상법 개정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정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주주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이사에게 주주 보호의무를 추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해외에도 존재하지 않는 입법을 추진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내비치고 있다. A기업 관계자는 “전 세계 선진국들 중 이사 충실의무 확대를 적용한 곳이 없는데 왜 지금 법안을 개정하려고 하는지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게 연구용역을 의뢰해 발표한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전제로 하는 이사의 충실의무 인정 여부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모범회사법과 영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 주요 국가들의 회사법은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로 한정하고 있다.

통상 일반 주주들이 배당확대 등 당장의 이익분배를 요구하는 반면 대주주(회사)는 투자재원 확보를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상법 개정안이 경영상 혼란을 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B기업 관계자는 “배당과 투자를 놓고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할지 혼란이 예상된다. 통상 제조업 기반의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확대로 기업가치 상승에 주력해 왔는데 자칫 투자재원을 배당재원으로 돌리라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단 한 명의 주주라도 불만을 제기하는 경우 결론을 낼 수 없어 기업의 의사결정이 느려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C기업 관계자는 “이사로서는 합병이나 지배구조 개편, 대규모 투자 등 중장기적인 투자를 두고 어떤 주주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지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사가 상호 충돌하는 회사와 주주의 의견을 완벽히 합치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향후 잦은 소송에 시달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사가 대주주의 의견을 반영해 업무를 집행할 경우 일반 주주로부터 책임 추궁을 받게 되고, 반대의 경우 대주주가 이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모든 주주의 이익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은 이상적”이라며 “이사는 다양한 주주들로부터 충실의무 불이행을 빌미로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고 회사는 이에 대비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임원배상책임보험을 들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도 “상법 개정안을 통해 주주들의 권한이 강해진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로 인해 기업의 경영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고 주주들이 소송을 남발할 부작용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이날 보완장치로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에 명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사가 주의를 다했다면 주주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배상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강제가 주식회사의 ‘자본 다수결 원칙’에 위배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한 회사가 이사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보수를 지급하는 위임계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도 주주가 아닌 회사로 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주가가 상승하고 주주들에게 배당을 확대하려면 결국 이윤이 많이 창출돼야 한다. 이는 규제가 아니라 기업 경영권 보장으로 실현된다”고 말했다.

김현일·정윤희·한영대·김민지 기자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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