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죽은 아내 돌려주세요” 꽃미남의 눈물 호소…‘비장의 무기’ 꺼낸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오르페우스 편]
리라를 든 음유시인영웅
음악으로 세이렌 맞서고
명계王 하데스까지 홀려
“뒤돌아보지 말라” 경고
끝내 참지 못하고 결국…
불행한 결과-비참한 최후
귀도 필립 슈미트, 오르페우스(좌)·에우리디케(일부 확대)
.
편집자 주
어렵고 헷갈리는, 그럼에도 실생활 곳곳 녹아있어 알아두면 좋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시즌제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나눠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걸출한 예술가와 풍부한 예술작품으로 몰입을 돕겠습니다. 각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이번 기사는 평소보다 약간 더 깁니다. 더 많은 에피소드, 더 풍부한 예술가와 작품을 소개하고픈 마음 탓이라고 생각해주시고,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편안한 연휴 보내세요.
연인을 찾기 위해 저승으로

"자네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곳 저승까지 올 수 있었는가?"

"하데스 신이시여. 지금은 어떻게가 아닌, 왜 왔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명계(冥界)의 신 하데스오르페우스를 앞에 두고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하데스는 불쑥 찾아온 오르페우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이 뜻밖 손님은 출중한 미모의 사내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불세출의 용사도, 손꼽히는 전략가도 아닌 게 분명했다. 그가 쥐고 있는 것 또한 칼도, 창도, 방패도 아닌… 악기 리라(lyra)였다. '혹시, 다른 신의 가호를 받는 건가?' 하데스는 이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요. 왜 왔는지 말해보세요." 이번에는 하데스의 부인이자 씨앗의 여신, 페르세포네가 오르페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무릎 꿇은 오르페우스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오르페우스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죽은 제 아내, 에우리디케를 데려오기 위해 왔습니다."

하데스는 이 말을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신 중의 신인 제우스가 부탁해도 들어주기 힘든 요구였다. "자네는 대체 누구를 믿고 그러는가?" 하데스가 기어코 역정을 냈다. 그런데…. "자네, 지금 뭐 하는가?" 하데스는 오르페우스를 향해 되물었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그의 기다란 손가락 펴보였다. 그러고선 리라의 줄을 천천히 뜯었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와 에우리디케 사이의 사랑 이야기였다. 하데스는 그의 음악을 막지 못했다. 제지하기에는 너무도 구슬픈 가락이었다. 그의 옆에 앉은 페르세포네는 벌써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곳 저승에서 벌을 받는 모든 죄인도 넋을 잃었다. 끝없이 바위를 굴려야하는 시시포스는 털썩 주저앉아 귀를 기울였다. 무한히 허기짐을 느껴야하는 탄탈로스는 눈앞에 과일과 물이 있는데도 먹는 법을 잊었다. 잔혹한 복수의 여신들도 태어나 처음으로 통곡하고 있었다.

피에르 마르셀 베로노, '오르페우스와 하데스'

피에르 마르셀 베로노(Pierre Marcel-Beronneau·1869~1937)는 〈오르페우스와 하데스〉를 통해 이 장면을 그렸다. 저승에서 홀로 후광을 받는 오르페우스가 눈을 감고서 음을 만들고 있다. 그 위에 앉아있는 이가 하데스로 보인다. 그리고, 오르페우스가 악기를 들자 지하 세계의 모든 인간과 괴물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에우리디케를 돌려주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저희 부부가 나란히 죽는 걸 보고 승리를 기뻐하소서."

오르페우스가 노래를 마쳤다. 모든 이 또한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보. 아무리 명계의 신이라고 한들, 이처럼 처연한 사연을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어요."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의 음악을 듣고 너무 울어댄 통에 옷까지 다 젖어있었다. "금기를 한 번만 깨주세요. 부디 저 둘이 다시 이승에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페르세포네는 어느새 오르페우스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있었다. "…좋소." 하데스도 못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서부터 에우리디케가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왔다. 영문을 모르고 있던 그녀는 남편을 보자 백합처럼 활짝 웃었다. 둘은 손을 다시 맞잡았다.

피터 프리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피터 프리스(Pieter Fris·1627/1628~1706)가 이 장면을 표현했다. 제목은 〈지하 세계에 있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드디어 마주했다. 망자인 에우리디케는 여전히 창백하다. 자리에 주저앉은 남성은 하데스, 이들을 축복하는 듯 일어선 여성은 페르세포네로 보인다. 매달린 남자, 사람 탈을 쓴 새, 독수리와 두꺼비를 섞은 듯한 생물…. 프리스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처럼 저승의 모습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묘사했는데, 이 또한 뜯어보기에 흥미로운 부분이다.

"고맙습니다. 천수를 다하면 당연히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저리로 가면 이승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하데스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오르페우스여. 지상의 땅을 밟기 전까지는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보지 말게."

노래하는 영웅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 중 가장 특이한 남자였다.

오르페우스의 장기는 무예도, 지략도 아닌… 음악이었다. 특히 리라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다. 이를 연주하면 인간과 동물은 꿈결을 걷는 듯 혼이 쏙 빠졌다. 그를 향해 꽃과 나뭇가지도 몸을 기울였고, 지진과 태풍 등 자연재해까지 멈췄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르페우스는 적이든 위급상황이든 일단 맞닥뜨리면 목부터 가다듬고 있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룰란트 사베리, '오르페우스'
존 매컬랜 스완, '오르페우스'

룰란트 사베리(Roelant Savery·1576~1639)는 오르페우스의 연주에 지상 거의 모든 생물이 모이는 것을 그렸다. 존 매컬랜 스완(John Macallan Swan·1846~1910)은 그를 아예 요즘 시대의 아이돌처럼 묘사했다.

오르페우스의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선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이라는 말이 있다. 트라키아의 왕이자 하프의 명수 오이아그로스라는 설도 있다. 훗날 최후를 보면 신보다는 인간의 자식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어머니는 예술의 여신 무사이(뮤즈) 중 한 명인 칼리오페였다.

오르페우스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끼가 있었다.

아폴론마저 그의 소질에 탄복해 자기가 가장 아낀 황금 리라를 줬다. 칼리오페 또한 아들의 재능이 빛날 수 있도록 시와 노래를 가르쳤다. 음악에 가장 조예 깊은 두 신이 오르페우스의 과외 교사였던 셈이었다.

칼과 방패보다 강한 악기
도소 도시, 아르고호 원정대의 출발

"친구. 정말 그것만 갖고 이 배에 있을 생각인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또 다른 영웅 이아손이 오르페우스에게 재차 물었다. 리라만 달랑 챙긴 채 배에 올라타는 오르페우스를 보고 한 말이었다. 당시 이아손은 그의 빼앗긴 왕위를 되찾는 길에 함께 할 영웅을 잔뜩 모았다. 그게 바로 오르페우스와 썩 좋지 않은 관계였을 터인 헤라클레스부터 테세우스, 펠레우스, 악타이온, 아스클레피오스 등 신화 속 유명 인물들이 총출동하는 아르고호 원정대였다. 헤라클레스는 올리브 나무 몽둥이, 테세우스는 곤봉, 펠레우스 등은 검과 방패를 챙겨 승선했다. 훗날 의술의 신이 되는 아스클레피오스조차도 단단한 나무 지팡이를 챙겼다. 오직 오르페우스만 별다른 무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이아손은 오르페우스를 걱정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오르페우스가 없었다면 원정대 자체가 몰살당할 뻔도 했다.

아르고 호는 열심히 물살을 갈랐다. 그런데, 배는 망망대해 위 안테모사 섬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거기로 돌진했다. 그 섬은 이들의 목적지도, 경유지도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반인반조 혹은 반인반어로 그려지는 아름다운 님프,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홀린 탓이었다.

에드워드 아미티지, '세이렌'

유혹의 세이렌 무리는 노 젓는 일꾼에 이어 영웅도 하나둘 홀리고 있었다.

그렇게 넋을 잃게한 후 익사시키는 게 이들의 사냥 방식이었다. 이와 관련해선 에드워드 아미티지(Edward Armitage·1817~1896)가 세이렌의 치명적인 매력을 잘 표현했다. 〈세이렌〉 그림 속 나체의 세이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배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녀 뒤에는 이들의 음악을 위한 리라 모양 악기가 보인다. 그런 세이렌은 곧 본색을 드러내 이들을 하룻밤 양식으로 삼을 터였다.

아르고호 또한 꼼짝없이 끌려가는 이때, 오르페우스가 기지를 발휘했다. 리라를 든 오르페우스는 세이렌보다 더 크게 노래를 하고 나섰다. 갑자기 오르페우스와 세이렌의 음악 대결에 펼쳐졌다. 뜻밖의 맞수를 만난 세이렌도 악 소리가 날 만큼 온 힘을 쏟았다. 끝내 오르페우스가 승리했다. 매혹의 마법에서 풀린 영웅과 일꾼들은 그 덕에 물귀신이 되지 않고 그 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모험길 중 폭풍우를 옅게 하고, 맹수를 길들이고, 심지어 괴물용까지 잠재우는 등 일당백의 역할을 했다.

요정 아내를 허무하게 잃고
귀도 필립 슈미트, '오르페우스'
귀도 필립 슈미트, '에우리디케'

그녀는 들판 위를 폴짝 뛰는 사슴 같았다.

호기심 가득한 두 눈, 끊임없이 휘파람을 이어가는 작은 입술,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카락…. 사랑스러운 그녀는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였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붙임성 있는 그녀의 말투, 귀염성 있는 그녀의 행동 모두 황홀할 만큼 좋았다. 에우리디케도 자신을 지긋이 보는 오르페우스에게 호감을 느꼈다. 둘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제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뜯으면 에우리디케가 허밍하듯 가사를 얹었다. 그러면 숲속의 모든 동물과 곤충, 꽃과 나무가 하나같이 숨을 죽이는 식이었다.

둘의 결혼식은 이들답게 아기자기했다. 근사한 숲속 음악회 같았다.

결혼을 축복하는 신 히메나이오스도 두 사람의 행진 때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든 횃불이 매캐한 연기를 뿜는 탓에 주인공과 하객 모두가 기침을 해야 했다. "히메나이오스여. 두 사람을 위한 축복의 말을 해주소서." 많은 이가 이 신의 축사 내지 축혼가를 기다렸다. 이런 부탁에도 히메나이오스는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그는 횃불을 놓지 않은 채 슬픈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비극의 복선이었다.

히메나이오스가 보인 불길한 징조는 곧장 현실로 다가왔다. 결혼 직후 에우리디케는 친구들과 함께 산에서 꽃을 가꾸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폴론의 아들인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가 우연히 그 모습을 봤다. 아리스타이오스는 에우리디케가 새신부인 줄도 모른 채 치근덕거렸다. 기겁한 에우리디케는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애꿎게도 독사의 꼬리를 밟았다. 독사는 에우리디케의 발을 물고 말았다. 그녀는 비틀거렸다.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안토이네트 비포트, '뱀에게 물린 에우리디케'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상처 입은 에우리디케'

안토이네트 비포트(Antoinette Befort·1788 1868)는 이 장면을 〈뱀에게 물린 에우리디케〉로 그렸다. 아리스타이오스를 피하고, 당장은 화폭 오른쪽 아래 그려진 독사까지 따돌려야하는 에우리디케가 다급하게 뛰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하늘에선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도 〈상처 입은 에우리디케〉를 표현했다. 그녀는 자기가 곧 죽을 걸 아는 듯 외려 차분한 모습을 보인다.

요한 페터 크라프트, '에우리디케의 무덤에 있는 오르페우스'

이제 세상에는 겨울밖에 없었다.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너무 슬퍼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눈물겨운 가락에 풀과 나무 모두 녹색을 품지 못했다. 아침에는 서리, 밤에는 눈과 비만 후드득 내릴 뿐이었다. 요한 페터 크라프트(Johann Peter Krafft·1780~1856)는 〈에우리디케의 무덤에 있는 오르페우스〉를 화폭에 옮겨 담았다. 오르페우스와 리라 말고는 온 세상이 어둠에 갇혀있는 장면이다.

이렇게만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르페우스는 직접 저승을 찾기로 한 것이었다. 하데스와 담판을 벌여 죽은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올 요량이었다. "사랑의 신 에로스여, 제 노래를 들어주소서." 오르페우스는 우선 에로스부터 꼬드겼다.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한참을 운 에로스는 기꺼이 숨어있는 저승 입구를 알려줬다. 오르페우스가 그다음 공략한 건 뱃사공 카론이었다. 카론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가로지르는 스틱스강의 문지기 격이었다. 산 사람은 절대로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카론 또한 마법 같은 선율을 당해내지 못했다. "젠장…. 딱 한 번만 봐주겠소. 어서 타시오." 카론은 그를 저승까지 인도했다. 마지막 장애물은 머리가 셋 달린 잔혹한 개, 케르베로스였다. 아직 죽지 않은 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케르베로스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보였다. 물론 이 괴물 또한 오르페우스, 더 정확히는 오르페우스의 리라를 당해내지 못했다. 오르페우스는 그렇게 하데스 앞에 설 수 있었다.

“절대 돌아보지 말라” 하데스의 경고에도

"잘 따라오고 있소?"

"그럼요."

"당신이 앞장선다면 이렇게 계속 물어볼 일도 없을 것을."

"저는 아직 망자니까….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앞에 설 수는 없는 법이지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긴 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르페우스여,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는 하데스의 경고를 곱씹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날며칠을 걸었다. 에우리디케는 아직 영혼인 만큼 발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르페우스는 걷다가 지치면 주저앉아 리라를 연주했다. 그러면 그의 한 발 뒤에서 그리운 에우리디케의 노래가 들리곤 했다. 오르페우스는 거기에 힘을 얻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불안을 억지로 털어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 폴 뒤케이라르(Paul Duqueylar·1771~1845)가 고뇌에 젖은 오르페우스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딱 한 번만 돌아볼까…. 미간을 긁적이고 있는 그의 혼잣말이 들리는 듯하다.

폴 뒤케이라르, '오르페우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저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페우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다 왔소. 이제 다시 땅 위로 올라갈 수 있소." 그가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뒤에서 에우리디케의 목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에우리디케. 거기 있소?" 오르페우스는 재차 말을 걸었다. 뒤에서는 또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오르페우스의 마음에서 고개를 든 게 있었다. 그것은 의심이었다. 설마…. 하데스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에우리디케 흉내를 내는 가짜 정령을 붙인 건 아닐까. 오르페우스는 참지 못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에우리디케는 하도 울어 얼굴이 푹 젖어있었다.

그녀의 한쪽 발은 지상에 닿았지만, 나머지 발은 아직 지하에 있었다. 에우리디케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차오르는 감동과 안도감에 말을 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그녀는 두 발이 다시 숲에 닿는 그 순간, 오르페우스에게 와락 안길 생각이었다. "아, 아…. 안녕. 마지막 이별이겠군요." 에우리디케의 마지막 말이었다.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에우리디케를 낚아챘다. 그녀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줄리오 카르피오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조반니 안토니오 부리니,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조지 프레데릭 왓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워낙 극적인 순간인 만큼, 많은 화가가 이 장면을 저마다 방식으로 그렸다.

바로크풍 화가 줄리오 카르피오니(Giulio Carpioni·1613~1678)는 에우리디케가 여러 사신에게 붙잡혀 돌아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이 장면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듯하다. 조반니 안토니오 부리니(Giovanni Antonio Burrini·1656~1727)는 에우리디케가 케르베로스가 있는 저승 안쪽으로 빠지는 모습, 조지 프레데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1817~1904)는 바깥세상으로 딱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한 그녀가 다시 지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림 속 오르페우스는 뒤늦게 후회하고 있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후였다.

오르페우스는 맥 풀린 다리로 우두망찰 서 있었다.

그는 이내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오르페우스는 뱃사공 카론에게 싹싹 빌었다. "두 번은 안 돼." 카론은 단호했다. 오르페우스는 스틱스강 앞에서 사흘 밤낮으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당한 적 있는 카론은 자기 귀를 밀랍으로 꽉 막아버렸다. 결국 오르페우스는 아무 수확 없이 이승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비참한 최후

돌아온 오르페우스를 보고 몰래 웃음 짓는 이들이 있었다. 그를 오랜 시간 흠모했던 다른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짝 잃은 오르페우스를 작정하고 유혹했다. 그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억지로 술을 잔뜩 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목석 같았다. 그는 오직 에우리디케만 그리워했다. 다른 어떤 여인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르페우스는 외려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택했다.

요제프 버글러, '오르페우스와 마이나드'

요제프 버글러(Josef Bergler 1753~1829)가 오르페우스와 마이나드(디오니소스의 여성 추종자)〉로 당시 상황을 상상했다. 여성들은 몽둥이를 든 채 협박하듯 술잔을 권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칠 뿐이다.

"어…. 저기 오르페우스가 있어. 우리에게 모멸감을 준 그놈!"

어느 날,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위한 축제를 벌인 여인들이 홀로 있는 오르페우스를 발견했다. 포도주에 잔뜩 취한 이들은 이성을 잃고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여인들은 오르페우스에게 돌을 던졌다. 하지만 이는 오르페우스의 리라 소리 앞에 기가 꺾여 제대로 날아가질 못했다. 이제 그녀들은 소리를 질러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막았다. 이들은 오르페우스에 대한 사랑, 이에 못지않은 증오를 품고 그의 몸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리고 결국, 오르페우스를 잔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광기의 그녀들은 오르페우스의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렸다. 죽은 오르페우스는 바다로 천천히 흘러갔다. 저 멀리 레스보스섬의 주민들이 그의 머리와 리라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장 델비유, '오르페우스의 죽음'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장 델비유(Jean Delville·1867~1953)의 〈오르페우스의 죽음〉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잠든 듯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가 해변에 깔려있다. 반짝이는 노란 빛과 물결, 소라와 조개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레스보스의 주민들은 오르페우스를 알아보고 장례 의식을 행했다. 그 덕일까. 이후 레스보스에서는 그 무렵부터 뛰어난 음유시인이 줄줄이 태어났다고 한다. 아폴론이 준 오르페우스의 황금 리라는 하늘에 별자리로 깔렸다. 그게 바로 지금도 한여름 밤 북반구 하늘에서 볼 수 있는 거문고(리라) 자리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시즌 1 : 프로메테우스〉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

〈시즌 2 : 헤라클레스〉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

5)“절세미녀 셋이 있는 곳에 가쇼” 근육男은 공포에 떨었다…무슨 일

6)“너, 내 노예가 돼라” 살인죗값 다 치렀는데…이번엔 또 웬 날벼락

7)“나랑 3년 노예계약해” 여왕과의 동거…‘강제여장’ 굴욕까지 참았더니

〈시즌 3 : 테세우스〉

8)미모의 아내 “저 남자 죽여야해요” 남편 현혹…소름 돋는 ‘속마음’은

9)‘소 머리-사람 몸뚱이’ 아기 태어났다…‘폭풍성장’ 거듭, 끝내 최후는

〈특별 편〉

10)“제가 봤어요” 女납치 순간 밀고했다가…이렇게까지 ‘보복’ 당할줄은

11)“죽은 아내 돌려주세요” 꽃미남의 눈물 호소…‘비장의 무기’ 꺼낸 사연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또다시 1년간 문을 활짝 열었던 후암동 미술관이 다음주 토요일 임시 휴관에 들어갑니다. 지금껏 독자분들의 사랑과 관심, 응원 덕에 지치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한 주를 건너뛴 뒤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yul@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