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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질릴 때까지 작품 얘기…그게 너무 좋아” [인터뷰]
연출가 이지영ㆍ안무가 문병권 부부
뮤지컬 ‘라스트 파이어 이어스’로 호흡
집요하게 파고들고, 치밀하게 매만진 수작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부부 제작진 문병권 안무감독과 이지영 연출가는 “출퇴근도 없이 밥풀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일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너무 좋다”며 웃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실 한복판. 싱크대 선반으로 뚝딱뚝딱 만든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미니어처 무대를 두고 부부는 매일 같이 머리를 맞댔다. 두 남녀 배우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할 길쭉한 턴테이블 무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를 하나씩 피워냈다.

“어느 날엔 자다 일어났는데, 아내가 어떤 음악을 듣고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그걸 24시간 내내 듣는 거예요. 하나의 주제에 꽂히면 시도 때도 없이 그 이야기만 꺼내고요. 얘기를 하다 밥을 먹고, 그러다 밥풀이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또 일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전 그게 너무 좋아요. (웃음)” (안무가 문병권)

‘일로 만난 사이’는 ‘함께 사는 사이’가 됐다. ‘천생연분’, ‘환상의 짝꿍’, ‘영혼의 단짝’…. ‘연인’, ‘부부’를 수사하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조합해도 두 사람을 설명하기엔 조금 아쉽다. 심지어 MBTI마저 똑같은 소울메이트. ‘아이디어 뱅크’이자 ‘문제 해결 능력’이 탁월한 INTP다. 그러니 두 사람이 만나면 무슨 일이든 일사천리다. 연출가 이지영(45), 안무가 문병권(47) 부부다.

부부의 첫 만남은 2005년. 뮤지컬 ‘아이다’를 통해서였다. 문병권은 이 작품에 앙상블 배우로 함께 했고, 새내기 연출가였던 이지영은 관객으로 작품을 보러 갔다.

“그 때 제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반했다나 뭐라나요. (웃음)” (문병권)

남편의 이야기에 이지영 연출가는 “저뿐만이 아니라 정말 춤을 잘 춰 많은 사람들이 반했다”며 쑥스러운듯 웃으면서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이 작품의 연출가와 안무가로 재회한 뒤, 7년의 연애 끝에 2022년 뮤지컬계의 대표 부부가 됐다. 두 사람은 “베스트 프렌드이자 최고의 파트너”라고 입을 모았다.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부부 제작진 이지영 연출과 문병권 안무감독이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임세준 기자
집요한 연출가-안무가 부부의 수작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

두 사람이 한 작품을 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엔 더 특별하다. 아내의 ‘입봉작’이기 때문이다. 2003년 뮤지컬 신시컴퍼니 연출팀에 공채로 입사한 이지영 연출가는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통해 21년 만에 단독 연출을 맡게 됐다. 그는 그간 ‘아이다’, ‘마틸다’, ‘빌리 엘리어트’ 등 대작들의 ‘협력 연출’로 무대를 이끌었다.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초연(2003)을 보고 연출가의 꿈을 키웠는데, 이 작품으로 입봉을 하게 돼 무척 감사해요. 협력 연출과 단독 연출은 정말 천지차이더라고요. 내가 가보고 싶은 곳까지 마음껏 도달해 하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고, 그러면서도 저의 의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니 무거움도 느끼고 있어요.” (이지영)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4월 7일까지·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2인극이다. 주인공은 20대의 두 남녀. 별다를 것 없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특별하게 매만지는 것은 독특한 구성과 그것을 풀어내는 연출이다. 남자의 시간은 첫 만남부터 이별을 향해 순차적으로 흐르고, 여자의 시간은 이별부터 첫 만남을 향해 거꾸로 이어진다.

이지영 연출가는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로 사건도 없는 데다 결말을 보여준 채 시작해 자칫 밋밋해 보이지만 이 작품은 ‘감정을 사고하는 뮤지컬’”이라고 했다.

무대 곳곳엔 집요한 연출가와 안무가 콤비가 만든 ‘치밀한 전략’이 촘촘히 흐른다. 원작을 뒤바꾼 것은 이지영 연출가의 아이디어였다. 애초 원작에선 남녀 배우가 번갈아 등장하는데, 이번 무대에선 두 배우가 퇴장 없이 공존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브로드웨이 원작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엔 이지영 연출가의 ‘피, 땀, 눈물’이 녹아 들었다. 작품의 첫 출발이었던 번역부터 만만치 않았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공감’이다. 유대인 남성과 비유대인 여성의 만남이라는 설정부터 지우고, ‘한국인의 정서’에 맞도록 음악감독(양주인), 번역가(김수빈)과 매일 8~9시간씩 노랫말 작업을 했다.

“사건부터 감정까지 모두 가사로 설명돼 있는데, 영어 음절수와 한글 음절수의 차이가 크다 보니 이를 매끄럽게 작업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미국적 감정과 문화차를 어색하지 않게 매만지는 데에 중점을 뒀고요.” (이지영)

아내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은 든든한 조력자였다. 문 안무가는 “이지영 연출가는 굉장히 집요해 본인에게 납득이 되는 지점을 찾을 때까지 계속 파고든다”며 “세 사람의 작업은 한 번 시작하면 끝이 나질 않아 방에 틀어박혀 나가지도 못했을 때가 많았다”고 돌아봤다.

뮤지컬은 안무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아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처럼 화려한 칼군무의 장인이지만,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는 눈에 띄는 안무보다 모든 움직임에 스토리와 감정을 실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집요하기로 치면 아내 못지 않았다.

이 연출가는 “뮤지컬에선 배우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안무이기에 언제나 연출의 의도와 안무가 유기적으로 함께 해야 한다”며 “(남편은) 저 못지 않게 집요하고 철저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안무가이다 보니, 자신에게 보여지는 것이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다가올 때까지 파고 들어 수정해요. 턴테이블의 초수와 각도까지 계산하면서 안무를 짜더라고요. 정말 질려요. (웃음)” (이지영)

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주인공은 배우만이 아니다. 두 남녀를 비롯해 그들이 움직이는 동선, 그에 맞춰 이동하는 2개의 턴테이블 역시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여야 하는 댄서다. 문 안무가는 “각기 다른 시간대로 움직이는 두 남녀처럼 턴테이블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했다”며 “각각의 넘버마다 이 가사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270도를 돌리면 저 가사가 나올 때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때때로 초수가 맞지 않아 고생을 했다”며 웃었다.

배우들의 모든 움직임에 사랑과 이별의 감정, 스토리를 불어넣어 매만진 것도 문 안무가의 역할이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감정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연출가는 “현실적인 이야기와 음악 안에선 배우가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며 “보다 우리의 이야기로 마주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의 부부 제작진 문병권 안무감독과 이지영 연출가. 임세준 기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최고의 파트너…“휘둘리지 않는 창작자가 꿈”

거꾸로 흐르는 남녀의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딱 한 번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옷깃을 스치며 감정을 교류한다. 연인이라면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 장면에서다. 이 신의 연출과 움직임은 독특하다. “물 위에 떠있는 다리처럼 위태롭고 불안한 사랑”(이지영)을 그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섬이 만나는 것처럼 두 테이블을 연결했다. 이 연출가는 “첫 만남, 결혼의 설렘을 안무가 님이 너무나 예쁘게 담아냈다”며 “각자의 섬에서 이어져 하나가 되고, 다시 각자의 섬으로 남게 되는 과정이 아주 예쁜 사랑의 한 장면으로 담겼다”고 했다. 이 연출가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뮤지컬은 이들 부부에게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됐다. 이 연출가는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두 세계가 충돌하는 것”이라며 “이 작품을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을 돌아봤다. 이러다 ‘이혼하는 거 아니냐’ 할 정도로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했다.

“하나의 작품을 만날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로 인식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출을 하게 돼요. 어떤 작품이나 나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렇게 나 자신이 되고 나면, 관객들도 저처럼 느끼면 좋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돼요.” (이지영)

그런 아내에 대해 남편은 “늘 자신이 설득 돼야 다른 사람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언제나 본인 설득을 치열하게 한 뒤에 작품을 직조해 나간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최고의 아웃풋’이자 ‘최적의 파트너’다. ‘집요한 관찰’과 집중력은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남편의 이야기에 아내는 “남편의 단점은 없는 것 같다”며 장난스런 답변으로 응수한다. “그럼 내가 뭐가 되냐”는 남편의 말에, 이 연출가는 “(문 안무가는) 작품을 보는 눈이 뛰어나고 깊이 있게 분석하는 통찰력을 가진 뛰어난 안무가”라며 진심 어린 칭찬을 건넨다.

이 공연을 마치고 나면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간다. 남편 문병권은 ‘알라딘’, 아내 이지영은 “결정됐지만 공개 전의 작품”을 통해 다음 활동을 이어간다.“애석하게도 차기작은 찢어지지만”(이지영), “이혼은 무슨, 계속 같이 하고 싶다”(문병권)는 마음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과 마지노선을 알고 있어 허용 범위의 선을 결코 넘지 않는”(이지영) 찰떡이기 때문이다.

“전 열심히 살면서 게으른 안무가가 되고 싶어요.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요. 너무 많이 소비하듯이 끄집어내지 말고, 주어지는 대로 살면서 이 안에서 응축해 성심성의껏 우리 이야기를 꺼내놓자고요.” (문병권) “화려함이나 일회성 재미에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드라마를 전달하는 연출가, 안무가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눠요.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펼칠지 모르는 현장이니 소중하게 접근해야죠.” (이지영)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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