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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든, 오케스트라 피트 속 조물주…“지휘자는 지휘만 하는 사람 아니다” [인터뷰]
韓 최초 브장송 콩쿠르 수상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으로 국내 데뷔
지휘자 이든 [국립오페라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화려한 무대 아래, 드넓은 객석 앞쪽, 지하벙커처럼 숨어 들어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곳. ‘한국 최초’ 브장송 콩쿠르 수상자인 이든(36)은 ‘오케스트라 피트’ 속 조물주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음표는 선율이 되고, 선율은 음악이 되며, 음악은 드라마를 입는다.

이든의 길은 내내 예측 불가능했다. 성악을 하던 소년은 “막연히 음악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밀라노 ‘조기유학’ 길에 올랐다. 변성기라는 생의 전환기를 마주했을 당시 피아노를 배웠고, 덕분에 피아니스트와 성악가라는 매력적인 두 직업을 양손에 쥐게 됐다. 그의 선택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무대 위로 가장 먼저 걸어나와, 관객의 첫 박수를 받는 사람. 그날의 주인공이 아닌, 관객의 시선 밖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길을 택했다. ‘오페라 지휘자’로의 길이다.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오페라 지휘자’라는 판단이었다고 한다.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15편 가량 전막 오페라를 지휘한 이든은 지금 한국 관객을 만날 준비에 한창이다. 국립오페라단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2월 22~25일·국립극장)으로 국내 전막 오페라 데뷔 무대를 앞두고 있다.

“꿈을 묻는 질문에 어릴 땐 막연한 것들을 그렸는데 언젠가부터 달라졌어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것’을 꿈꾸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을 잘 마무리하면 또 하나의 꿈을 이루게 될 것 같아요.”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든 지휘자는 첫 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리허설을 준비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휘자 이든 [국립오페라단 제공]
韓 최초 브장송 수상…우승 트로피 수집한 ‘콩쿠르 사냥꾼’

이든에게 지휘는 ‘궁합이 잘 맞는 친구’였다.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는 그에게 지휘자로의 길은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노래에 흥미를 잃었을 때도 있었고, 그래서 성악가로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피아노 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아 피아니스트의 길은 원치 않았고요.”

이든은 “지휘는 항상 하고 싶었다”며 “매일 같은 것을 꺼내오면서도 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분야”라고 했다.

밀라노 베르디국립음악원에서 지휘로 석사 과정을 밟은 그는 수차례의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핀란드의 지휘 거장 요르마 파눌라(94)의 애제자가 됐다. 그는 “매년 핀란드에 가 선생님을 찾아뵈며 체크를 받는데, 늘 불같이 화를 내신다”며 웃었다.

“선생님은 지휘는 무엇이라고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기 보단 기본을 강조하며 나의 지휘법을 찾아가게 이끌어주세요. 종교, 철학, 과학에서 음악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야가 확장되는 것을 느껴요.”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후부터 이든은 각종 콩쿠르를 섭렵했다. 지금까지 나간 콩쿠르만 해도 7개. ‘콩쿠르 사냥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가는 족족 우승 트로피를 수집했다. 2021년 세계 최고 권위의 콩쿠르 중 하나인 프랑스 브장송 국제 지휘 콩쿠르에선 한국인 최초로 입상 소식을 알렸다. ‘지휘 콩쿠르’의 최고봉 격인 브장송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얻었음에도 지난해엔 플로브디프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 나가 또 하나의 우승 트로피도 챙겼다.

이든은 “어느 정도 수상 경력이 있다 보니 그 이상을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할 수도 있지만, (지휘자로서) 나아가는 길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콩쿠르는 지금 현재 내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시험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콩쿠르는 신진 음악가들이 자신을 입증하는 자리이자, 음악적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장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여러 콩쿠르를 섭렵한 그는 2021년부터 이탈리아 벨 오페라 페스티벌의 총예술감독과 지휘자를 맡고 있다. 이제 증명은 끝이 났다. 앞날은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 더이상은 나가지 않을 생각”이라며 웃는다.

지휘자 이든 [국립오페라단 제공]
“지휘자는 지휘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페라 지휘자’로서 이든의 강점은 이력에 있다. 이든은 “무대 위에 섰던 사람이기에 성악가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며 “성악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고 말했다. 성악가들 역시 이든의 지휘가 유독 편하다고 평가한다.

오페라 가수는 1인 2역을 해야하는 직업이다. 배우 못잖은 연기를 보여주며, 최고 수준의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 ‘생방송 무대’ 위에선 변수도 많다. 무대를 활보하다 보면 때로는 호흡이 딸려 플레이징(음악의 흐름을 유기적인 의미나 내용을 갖는 악구로 구분하는 일)이 짧아질 때도 있고, 반대로 컨디션이 좋아 기적 같은 고음을 뽑아낼 때도 있다. 때문에 오페라 지휘자에겐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순발력과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휘의 묘’가 요구된다.

“오페라 무대에서 성악가와 오케스트라가 맞지 않는 장면들을 볼 때가 종종 있어요. 무대 위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둔 것들을 계산적으로 끌고 갈 때 각자 따로 노는 상황이 만들어지죠. 때문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해요.”

오페라 지휘자의 꿈을 키워가며 이든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부분은 ‘언어의 뉘앙스’와 음악과 캐릭터의 케미스트리다.

그는 “지휘자는 지휘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오페라 지휘를 하면서 행복한 점은 테너가 노래하면 나도 테너가 된 것 같고, 소프라노가 노래를 하면 나도 소프라노가 된 것 같고, 합창단이 노래할 땐 단원중 한 명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라고 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땐, 많은 악기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리허설을 할 때도 백 마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준다. 성악가 출신 지휘자 답다. 그는 “지휘자는 소통이 중요하나 지휘계에선 ‘말 많은 지휘자가 가장 못하는 지휘자’라는 이야기도 있다”며 “일일이 호흡, 템포, 강세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노래 한 번 불러드리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잘 오르지 않는 로시니의 작품인데다, 초연 무대인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은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 이든은 “이 작품은 로시니가 자기표절을 하지 않은 가장 로시니다운 작품”이라며 “오페라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최지형 연출가, 100% 캐릭터화가 되기 위한 성악가들의 열망, 뒤에서 땀 흘리는 음악 코치들과 스태프가 모여 로시니다움을 살려나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사실 오페라를 지휘할 때마다 벽을 느껴요. 작곡가를 만나 직접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나게 큰 벽이에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게 맞나 끊임없이 의문이 들고요. 그럼에도 내가 찾은 정답을 보여주고, 만약 틀렸더라도 그것마저 잘 포장해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인 것 같아요. 그 길을 가기 위해 해야하는 공부가 참 많아요. 그런데 그 공부가 제겐 참 재밌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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