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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첨단 기술이 인류를 구현할 수 있나…SF로 구현한 몸의 세계 “매콤한 마라맛”
‘현대무용 성지’ 벨기에 피핑톰 소속
안무가이자 무용수 정훈목 한국 신작
인간과 기술의 공존 다룬 무용 ‘야라스’
정훈목 예술감독의 신작 ‘야라스’ [옥상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새로운 날이 시작되면 무용수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대화의 시작’.

“오늘은 뭘 보여줄 거야?”

그곳은 언제나 새로움을 찾았다. 구태의연한 것, 예측가능한 것은 거부했다. 매일의 단련은 감각의 본능을 키웠다. 신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창의력으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움직임을 구현한다. 전 세계 ‘현대무용의 성지’로 무용계의 흐름을 이끄는 곳, 벨기에의 피핑톰 무용단이다. 이곳에 한국인 단원 정훈목이 있다. 2009년 입단해 올해로 15년째. ‘춤추는 사람’으로는 최고령 무용수인 정훈목은 피핑톰의 ‘터줏대감’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6개월 동안 ‘한국살이’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두 번째 신작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다. 2022년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난 ‘아난(ANON)’의 연장선인 ‘야라스(YARAS)’(1월 27~28일·대학로예술극장)가 공연을 준비 중이다. 내달 17일에는 벨기에에서 현지 관객과 만난다.

공연을 앞두고 최근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정훈목 주목댄스시어터 예술감독은 “코로나19 이후 외출과 파티가 줄어들며 단절된 생활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며 “인류학에 대한 담론이자, 휴머니즘이 바탕이 된 작품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SF같은 세계관이 무용 속으로…‘과학기술이 인류를 구원할까?’
정훈목 예술감독의 신작 '야라스' [옥상훈 제공]

온몸에 타투를 새긴 사람(?)들이 무리를 지었다. 로봇새와 소통하고, 아가미 머리로 숨을 쉬고, 위장으로 트림을 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존재들….

‘야라스’는 정 감독이 만든 신조어다. ‘야라’라는 개인이 모인 복수격으로, 이들이 모인 가상의 부족(종족)을 말한다. ‘야라’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제목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야라스의 세계관은 SF(공상 과학영화) 같기도 하고, 게임 같기도 하다. 진화한듯 하면서도 미개한 것이 꽤나 이중적이다. 최초의 모습을 그린 것처럼 원초적이면서도 고도의 기술로 가득찬 세계가 무대에서 공존한다. 인간의 몸을 사용하는 아날로그 장르를 ‘미래적인 상상력’으로 채운 것이다.

무대에선 전 세계 무용 최초로 정 감독이 도입한 ‘로봇개’가 등장한다. 전작인 ‘아난’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작품을 통해 정 감독은 ‘인간과 기술의 공존’, ‘트랜스 휴머니즘’을 화두로 꺼낸다.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발전이 장애, 질병, 고통, 노화로 인한 신체를 대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이 작품은 출발했다.

‘야라스’의 제작 기간은 꽤 길었다. 보통의 무용 작품은 길어야 4개월의 호흡으로 만들어지지만 ‘야라스’는 그보다 3~4배 긴 1년 3~4개월의 시간을 투자했다. 나노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꼼꼼한 J(계획형)인 정 감독의 지난 시간들이 촘촘하다. ‘제목을 정하는 것부터 작품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2022년 10월 ‘야라스’의 제목을 짓고, 본격적인 구상에 돌입했다. 이후 지난해 2월 오디션을 시작, 총 9명의 무용수를 뽑은 뒤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과 벨기에를 오갔고 세계 투어 일정을 마친 뒤, 6개월 전부터 한국에 머물며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무대에선 소품과 디자인을 통해 ‘왜곡된 신체’를 표현하고, 무용수들은 인간의 몸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만들어간다. 오디션에는 40~50명이 무용수가 지원했다. 그는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것은 10초만 봐도 스타일을 알 수 있다”며 “기본적으로 최고의 테크닉을 뽑아내되, 본연의 개성과 독특함을 갖추고 있고, 즉흥 춤을 풀어내는 신체 구현력이 뛰어난 무용수로 선발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의 창작 과정은 피핑톰에서 안무가이자 무용수로 활동해온 15년의 경험이 녹아들었다. 삶의 사유를 중력을 거스른 움직임으로 만들어낸 피핑톰에서 꽃 피운 시간들이다. 그는 “‘야라스’에선 인공지능 시대의 인류와 인간성을 고민하고, 이 과정을 한국인만이 가진 매콤함으로 표현한다. 진한 마라탕의 맛”이라고 말했다. 피핑톰에서 활동한 후 정 감독이 한국인 무용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라마다 기질이 있는데, 한국 사회는 감정과 의사 표현에 있어서도 절제하는 성향이 커요. 한국인 무용수들에게서 그것을 꺼내보려고요. 억누르고 있는 감정과 표현을 발산하는 매콤함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영화를 보듯 한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으로 남는 작품이 되기 바라고 있어요.”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정훈목은 현대무용의 성지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의 단원이자 한국에서 창단한 주목댄스시어터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옥상훈 제공]
벨기에서 억눌렀던 표현 마음껏 발산‘…“이젠 국내 무대 집중할 것”

한국에서 현대무용가로 활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에게 현대무용은 난해하고 낯선 장르다. 국내에선 주목댄스시어터가 창단됐지만, 대중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 그는 “피핑톰에 가기 전까진 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이었다”며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뭐하러 하나, 그런 생각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피핑톰은 아르헨티나 출신 가브리엘라 카리조와 프랑스 출신 프랭크 샤르티에가 2000년 창단한 무용단이다. 두 사람 외에도 단원들이 적극적으로 안무에 참여, 창작자로서의 역량을 키워간다. 정훈목은 지난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진예술가로 선정돼 유럽 공연을 갔다가 피핑톰 무용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 당시 정훈목과 함께 입단했던 무용수가 김설진이다. 김설진은 2014년 Mnet ‘댄싱9’ 시즌2에서 우승한 이후 국내를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한계를 느꼈던 한국 활동과 달리 피핑톰에선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현대무용으로 가는 모든 길은 벨기에로 통한다’고 할 만큼 벨기에는 예술적 성취가 높고, 작품 활동을 위한 인프라가 갖춰진 곳이다. 그만큼 창작자에 대한 기대와 요구도 크다. 그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처음 3년 간은 헤롱헤롱했다”며 웃는다.

지금까지 피핑톰에선 총 7개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보통 4개월의 제작 기간을 거친 뒤 1년 6개월간 투어를 하는 피핑톰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지난 15년간 그는 쉼없이 빽빽한 날들을 살았다. 하나의 작품마다 평균 100여회, 전 세계 43개국, 134개 도시로 투어를 다녔다.

정훈목은 “프로젝트 식으로 활동이 이어지고, 늘 보지 못했던 것을 찾다 보니 한 작품을 할 때마다 단물이 쪽 빠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사실 15년 간 피핑톰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만의 루틴으로 철저한 몸 관리를 이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훈목 예술감독의 신작 '야라스' [옥상훈 제공]

“7개의 작품 모두 각각 피말리는 작업이었어요. 처음 세 작품까진 신체의 움직임을 다양하게 구현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면, 네 번째 작품 이후로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달라졌어요. 아무리 훈련하며 노력을 한다 해도 나이가 차면서 느끼는 신체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오니까요.”

피핑톰의 활동은 정 감독에게도 잘 맞았다. 자기 감정과 표현을 절제하고 억눌렀던 한국과 달리 유럽은 마음껏 발산하는 문화였다. 그가 첫 작품으로 데뷔하자 무용단에선 “과묵한 친구가 춤 스타일에선 피핑톰이 해오던 것 이상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들었다.

피핑톰에서 활동하는 동안 변곡점이 된 작품은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의 세 에피소드로 구성한 가족 시리즈였다. 그 중 ‘어머니(Moeder)’(2016)는 정훈목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가브리엘라 카리조가 안무를 맡았다.

“다섯 번째 작품쯤 되니,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모든 걸 내려놓고 의식의 흐름대로 후회없이 해보자는 생각으로 작품에 참여했어요.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왔고, 중요한 장면인 ‘앵그리 신’을 만들게 됐어요. 작품을 하면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카타르시스를 마주하게 됐어요.”

이미 모든 것을 꺼내놨다고 생각했을 때, 무용수이자 창작자로서 또 한 번 중요한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어머니’와 그 이후의 작품은 지금의 ‘야라스’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됐다. 한국과 벨기에에서의 공연 후 ‘야라스’는 10분 분량의 댄스필름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정 감독은 2021년 댄스 필름 ‘우라가노’(Uragano)로 미국 할리우드 인터내셔널 골든 에이지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댄스 쇼트(Best Dance Short) 등 2관왕에 올랐다.

세계 무대에선 주목받고 있지만,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정훈목은 “6개월간 한국에 살면서 많은 걸 느꼈다. 피핑톰으로 향한 지 15년이나 됐지만, 한국 무용계는 여전히 경직돼있었다”면서도 “한국 무용을 비롯한 예술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이젠 한국 관객에게도 더 자주 찾아올 생각이다. 피핑톰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되 1~2년 마다 한 작품씩은 한국 무대에 올리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장애를 가져도 춤을 출 수 있고, 한계를 뛰어넘어 나를 표현할 수 있어요. 엄청난 드라마를 가진 작품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캐릭터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멋진 춤, 기가 막힌 춤, 공연을 마치면 누군가를 뒤흔들 수 있는 춤을 보여주는 것이 저의 지향점이에요. 저는 키도 작고 다리도 짧아요. 내세울 것 없는 몸이지만,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잖아요.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스토리로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제가 해나가고 싶은 이야기예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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