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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욱의 출발, 국심의 언박싱…막 올린 신년음악회 [고승희의 리와인드]
협연·오페라·발레까지 ‘국심’
백건우와 김선욱의 ‘경기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거장 백건우와 만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새 수장 김선욱,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아프리카계 캐나다 피아니스트 스튜어트 굿이어의 첫 내한을 성사시킨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1월 한 달간 이어지고 있는 국내 주요 악단들의 신년음악회가 마침내 막을 올렸다. 신년음악회는 국립은 물론 민간 오케스트라까지, 일 년에 한 번 전력투구하는 무대다. 새로운 해를 여는 무대인 만큼 쉬운 레퍼토리이면서 관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거나, 각 악단의 한 해 방향성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내 4대 주요 악단 중 먼저 출발한 두 악단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무대도 그랬다.

피아니스트 스튜어트 굿이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해오름극장 안 거대한 선물상자…국심의 콘셉트는 ‘언박싱’

정통 클래식홀이 아니라 깊고 넓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안으로 거대한 선물 상자가 자리했다. 이날의 콘셉트는 ‘언박싱’(개봉). 무대를 가득 메운 장막 위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징색인 녹색 박스를 묶은 분홍 리본이 풀어지며 막이 오르자 대형 스크린 아래 자리한 단원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선물 상자 속 기대했던 선물들처럼 ‘짠’ 하고 모습을 비추자 객석에선 의외의 등장에 놀란 듯 작은 탄성도 나왔다.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등장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는 정체성이 뚜렷하다. 오직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이기에 가능한 무대였다. 피아니스트와 함께 하는 협주곡부터 오페라, 발레, 국악에 이르기까지. ‘극장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강조해 온 국립심포니의 방향성을 볼 수 있었다.

신념음악회의 시작을 알린 것은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이었다. 왈츠 레퍼토리를 주로 하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가 세계적인 인기를 모으자 단골로 자리잡은 작품이다. 현악기들이 시원시원한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사랑스러운 플루트가 그 위에 얹어지니 객석으로 쏟아지는 모든 소리들이 귀를 정화했다. 폴짝 뛰어오르는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의 지휘에 맞춘 웅장하고 즐거운 서막이었다.

협연자인 스튜어트 굿이어는 지난 2012년 아프리카계 피아니스트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주인공이다. 그는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로 국립극장을 한여름밤의 재즈 페스티벌로 만들었다. 내한을 앞두고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거슈윈의 작품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대한 존경(homage)을 불러일으킨다”며 “1924년의 뉴욕의 광경과 소리는 거슈윈의 조화롭고 서정적인 언어로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묘사됐다. 작품에 녹아든 젊은 열정, 낙천주의, 에너지가 시대를 초월하게 한다”고 했다.

그의 연주엔 거슈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보랏빛으로 물든 도시의 빌딩숲을 담은 영상 아래에서 단단하고 경쾌한 ‘피아노 밀당(밀고 당기기)’이 이어졌다. 연주의 호흡과 리듬감이 도시인의 바쁜 하루를 담아낸 것처럼 꿈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첫 내한에 엄청난 함성을 끌어낸 굿이어는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오늘의 앙코르는 ‘파노라마’입니다”라며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소개하며 마지막 곡을 들려주고 떠났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이어진 2부에선 오페라, 발레, 판소리가 어우러지며 ‘맞춤형’ 극장 오케스트라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저력을 보여줬다. 그간 정기연주회는 물론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을 비롯해 다양한 국악 협업 무대를 선보였던 국립심포니가 선물하는 일종의 ‘갈라쇼’였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서곡으로 시작해 ‘밤의 여왕’ 아리아인 ‘지옥의 복수심으로 내 마음 불타오르네’를 소프라노 유성녀가 선보였다. 리프트를 타고 2층 높이 무대에 선 유성녀는 4옥타브 ‘도’ 음을 ‘발사’하는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를 흔들림 없는 소리로 이어갔다. 그 아래 오케스트라는 오페라보다 웅장한 연주로 아리아의 선율을 살렸다.

‘마술피리’의 또 다른 명장면이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아리아 ‘파, 파, 파, 파파게노’에선 상황극도 이어졌다. 무대로 나와 연인 파파게나를 찾는 파파게노 역의 베이스바리톤 조병익. 압권은 라일란트 감독과의 연기 호흡이었다. 서로를 보고 흠칫 놀란 장면에서 라일란트 감독의 외마디 대사 ‘오?’가 울려퍼지자, 객석도 이내 웃음이 터졌다. 자신의 휴대폰 번호라며 ‘010-1234-5678’이라고 알려주며 애타게 파파게나를 찾는 그에게 라일란트 감독은 구세주였다. 라일란트 감독의 도움으로 마침내 만나게 된 커플. 이들은 이내 ‘익살스러운’ 아리아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국립발레단 심현희 박종석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아리아를 마친 뒤엔 아름다운 발레 무대가 나왔다. 국립발레단 간판인 심현희와 박종석이 올라 차이콥스키 ‘백조의 호수’ 파드되(2인무)를 보여줬다. 오케스트라 앞의 공간을 무대 삼아 가로지르는 우아한 움직임을 배려하고 살려주는 온화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인상적이었다.

발레까지 마치자 라일란트 감독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포디움에 선 뒤 이색적인 무대를 꾸몄다. 판소리 춘향가의 백미인 ‘어사출두’를 작곡가 우효원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 국립창극단의 간판으로 떠오른 김수인과 함께 선보였다. ‘어사출두’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스펙타클한 질주가 일품. 오케스트라와의 조화에선 국악기의 거친 질감을 느낄 순 없었지만, 금관 악기와 현의 조화가 매끈한 선율 위에 시원한 판소리가 도드러져 독특한 매력을 더했다.

김수인은 이날 우효원이 편곡한 ‘아리 아리랑’을 소리꾼의 창법을 덜고 담백하게 소화해 더 큰 울림을 줬다. 아리랑의 주요 가사인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에선 양쪽 화면으로 ‘다함께’라는 자막이 안내 됐지만, 따라 부르는 관객이 없었던 것은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앙코르는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었다.

'새싹' 김선욱, 경기필 신고식 레퍼토리는 ‘처음’

데뷔 4년차 ‘새싹’ 지휘자 김선욱의 성장을 만날 수 있는 무대였다. 2021년 1월 KBS교향악단 무대에서 공식 데뷔하며 ‘지휘자 신고식’을 치른 이후 3년 만에 국내 주요 악단의 예술감독 자리에 앉은 김선욱의 ‘신고식’이 시작됐다.

김선욱은 새해를 알리는 신년음악회이자 취임 연주회를 통해 지휘자 김선욱과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자리(1월 5일, 경기아트센터)를 마련했다.

이날의 연주회는 공연 전부터 화제였다. 스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린 김선욱이 처음으로 악단을 이끄는 상임 지휘자로 시작하는 자리인 만큼 이날 연주회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초유의 매진 사태를 불러왔다. 게다가 협연자가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는 한국의 거장 피아니스트 백건우였으니 일찌감치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이 이어졌다. 스타 지휘자의 탄생을 알리는 자리였다.

실제 연주회 당일 경기아트센터는 ‘주차 대란’이 벌어졌다. 위치의 한계로 해외 악단 내한 연주회가 있을 때에도 빈자리를 적잖았던 이 곳이 전례 없이 대극장, 소극장 앞으로까지 주차 행렬이 이어졌다. 주차 자리를 찾지 못해 기어이 공연에 늦어버린 관객도 적지 않았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의 백건우와 김선욱(왼쪽)

레퍼토리는 ‘처음’의 의미를 살렸다. 브람스가 장장 20년의 세월을 걸쳐 완성한 첫 번째 교향곡 1번과 함께 백건우와 스크랴빈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김선욱과 백건우의 인연은 각별하다. 앞서 취임 간담회에서 김선욱은 “많은 관객과 음악인이 존경하는 피아니스트이자, 대구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로 데뷔했을 당시 처음 협연했다”며 백건우와의 인연을 밝히기도 했다.

취임 연주회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으로 시작했다. 신발에 바퀴를 단 듯 슬라이딩하듯 걸어나와 포디움까지 올라선 김선욱은 날렵하고 경쾌한 선율로 시작을 알렸다.

취임 첫 해, 첫 협연자로 선 백건우는 김선욱의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날아온 천군만마다. 러시아 작곡가 스크랴빈의 유일한 피아노 협주곡에서 그는 단단하고 묵직한 타건으로 가볍게 날아다니는 악기군의 중심을 잡아줬다. 2악장에선 고요한 바람을 일으키는 듯한 현의 아름다운 선율과 옥구슬처럼 맑은 피아노 터치가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들을 관조하듯 큰 그림을 그려갔다.

백건우는 온 힘을 실어 강렬한 터치로 객석을 압도하면서도, 때때로 지극히 섬세한 고음으로 투명한 음색을 만들며 압도적인 대비가 인상적인 순간들을 풀어냈다. 연주를 마친 뒤 백건우는 김선욱의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박수를 보냈고, 손을 토닥이고 얼싸 안으며 후배 음악가의 새로운 앞날을 응원했다.

이날의 진검승부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베토벤의 뒤를 잇기 위해 무려 20년의 시간을 들여 만든 이 곡에 담긴 브람스의 음악적 고뇌와 열정은 고스란히 김선욱에게로 향했다. 그의 브람스 1번은 동세대 어떤 지휘자보다도 고전적이었다. 가장 ‘정통’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의가 보였다.

느릿하게 시작한 김선욱과 경기필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악보 그대로의 해석을 하면서 한 음 한 음 소홀히 대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특히 1악장의 ‘언 포코 소스테누토(un poco sostenuto, 조금 음을 길게 끌면서)’를 충실히 지켰다. 다만 이런 시도는 경기아트센터 콘서트홀의 특성 탓에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이어져야 하는 소리가 분절돼 사라져 음악의 여운을 주지 못했다. 또 무대가 동굴처럼 쑥 들어가 있다보니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세 개의 벽에 가로막혀 터져나오지 못했다.

2악장의 백미로 꼽히는 바이올린 솔로는 아벨 콰르텟의 윤은솔이 맡았다. 그는 이날 경기필의 객원 악장을 맡았다. 가볍고 화사한 소리로 솔로 연주를 이어간 윤은솔의 연주는 음마다 길게 늘이던 악단 전체의 연주와는 선명히 대비됐다. 3악장에선 춤곡의 매력을 잘 살렸지만, 다소 빠른 연주로 호흡이 엉키는 점은 아쉬웠다. 마지막 악장에선 호쾌하게 막판 스퍼트를 올렸으나 기초 체력이 다소 부족해 보였다.

무사히 첫 공연을 마친 이후 다시 한 번 교통대란이 이어졌다. 이날 경기아트센터를 벗어나기까지만 무려 30분이 걸렸다.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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