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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헨리 키신저와 오늘의 세계

‘당신은 그를 싫어할 수 있고, 악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건 그를 무시하는 일이다.’ 지난 11월 29일 100세의 일기로 눈을 감은 헨리 키신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그 누구보다 역사의 무대에서 오랫동안 활약했고, 많은 이들에게 찬사와 경외를 받았다. 나치 탄압을 피해 15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온 키신저는 하버드대학 교수를 거쳐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서 8년간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고, 정부를 떠난 이후에도 저술, 강연, 컨설팅을 정력적으로 수행했다. 각국의 지도자를 비롯해 세상은 마지막까지 그의 지혜와 조언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생전 공개 석상에서 “전쟁범죄자”라는 항의성 고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그렇다면 키신저 외교의 공과(功過)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키신저 외교의 가장 큰 공로로는 미·중 화해를 들 수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마오 주석의 손을 잡고 20년간의 적대관계를 종식시켰다. 사회주의 진영의 한 축인 중국을 소련에서 뜯어냄으로써 동서 냉전 구도가 달라졌고, 세력균형을 일거에 미국에 유리하게 변경시킨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반감과 국내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주도면밀한 계산하에 이루어진 키신저 지정학 외교의 승리였다. 또한 소련과도 긴장 완화라는 데탕트를 이루어 냈다. 미·소 핵 군비통제 협상, 정기적인 정상회담이 가동되었고, 이로써 냉전이 지나치게 과열되거나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을 낮추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셔틀 외교를 통해 아랍-이스라엘 화해를 중재함으로써 중동 평화를 위한 기반을 닦은 것도 그의 대표적 공로였다.

키신저 외교를 둘러싼 최대 논란은 베트남 전쟁이다. 비판자들은 닉슨과 키신저가 베트남 전쟁을 장기화함으로써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수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내몰았다고 비난한다. 키신저는 북베트남과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명예로운 철군’을 이룬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2년 뒤 결국 베트남은 공산화되고 만다. 어차피 남베트남을 지킬 수 없었음에도 미군 철군과 사이공 함락 사이에 “적절한 시간(decent interval)”을 번다는 명목으로 2만 1천여 명의 미군 병사들을 희생시킨 셈이다. 특히 1970년 캄보디아에 대한 대량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이는 150만 명의 대량 학살을 자행한 크메르 루주 정권 탄생을 초래한 격이 되었다. 또한 키신저는 칠레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도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사회주의 성향의 칠레 아옌데 정부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키신저 외교의 명암이 보여주듯이 그의 철학은 현실주의(realpolitik)에 기반해 있다. 도덕이나 가치를 무시한 건 아니지만, 그가 생각한 외교는 유리한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한 절제된 외교였다. 그는 질서와 안정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이 세계를 변혁시키려는 이상적 열망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전략적 파트너를 고르는 기준은 도덕이나 가치가 아닌 차가운 국익과 힘의 균형에 대한 계산이었다. 1972년 공산 세력의 독재자 마오에 접근한 것이나, 2018년 트럼프 대통령에 중국 견제를 위해 푸틴의 러시아에 접근하라고 조언한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그는 미국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세계를 바꾸려는 선교사적 이상주의를 경계했다.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자유주의 패권 외교는 성공하기도 어렵거니와 미국의 국익에 저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외교의 사명이란 유토피아적 비전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력균형, 절제, 신중함의 미덕으로 평화와 안정을 달성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그가 존경했던 비스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국제정치에 키신저 외교가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키신저 사상이 오늘날에도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활약하던 시대와 현재 상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상처, 반전 운동과 국내적 분열 등 미국의 힘이 약했을 때 키신저 외교는 빛을 발했다. 오늘날 미국은 민주주의 위기를 겪고 있고,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중국을 마주하고 있다. 냉전 종식 이후의 승리주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으며,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이상주의적 자유주의 외교는 상처와 자성만을 남겨 놓은 상황이다. 다시 절제의 외교, 세력균형에 기반한 현실주의 외교로 복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세계는 서방 진영과 중·러 진영으로 갈라지는 양상이고 이데올로기적 대립도 심해지고 있다. 키신저는 맹목적 대결과 경직적 동맹 시스템이 1차 대전의 비극을 낳았던 것을 상기시키며 이럴수록 냉철한 국익 계산과 신중한 외교를 강조해 왔다. 중국과도 재앙적 충돌을 막기 위해서는 모종의 합의와 세력균형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 키신저의 계속된 고언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전략경쟁, 그리고 대만해협과 한반도와 같은 지정학적 화약고를 생각하며 키신저가 남긴 유산을 다시 되돌아본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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