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시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미국의 공격으로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군 고위사령관 피살 4주기 기념식에 참석해 손짓을 하고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이란에서 3일(현지시간)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을 겨냥해 자행된 테러로 100명 가까이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의심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공격 특성을 볼 때 이란 내에서 활동하는 반정부 극단주의 무장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해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날 AFP통신, 월스트리트저널(WSJ),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이란 케르만주 케르만시에서 발생한 테러의 배후를 자처하는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란 정부는 공격 주체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은 채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성명을 통해 배후를 특정하지 않은 채 ‘악의적이고 범죄적인 적들’을 비난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도 성명에서 “가해자들과 범죄자가 곧 확인돼 그 행동에 따른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에서는 구체적 정황은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소행일 것이라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에 가까이 연계된 소식통들은 NYT 인터뷰에서 특정 테러단체가 배후를 자처하더라도 이란 군부와 정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소행이라고 신속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스라엘은 이번 사건에 대해 별도의 공식 언급을 하지 않은 상태다. 자신들의 소행이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이 같은 암살 공작에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WSJ은 이스라엘이 동맹국들에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작전이 아니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스라엘의 작전에 능통한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은 그간 이스라엘 공격과 패턴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란에서 발생한 테러는 가셈 솔레이마니 전 이란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에 참여하는 이들을 무더기로 노렸다. 이란 관영 매체에 따르면 가방에 담겨 길가에 설치된 폭발물 2개가 원격 조종으로 연달아 터지면서 추모 행렬에 중 최소 95명이 숨지고 211명이 다쳤다. 애초 사망자는 103명으로 발표됐다가 조정됐다.

사건 과정을 비교해보면 이스라엘은 이런 무차별 공격보다는 이란 군부나 핵 프로그램과 연계된 개인을 더 정밀하게 타격하는 방식으로 작전을 해왔다.

미국 정부도 이란에서 발생한 이번 폭발에 자국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이 배후라는 정황도 없다고 주장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솔레이마니 추모식에 폭력 사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없었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부인하는 상황에서 그간 이란 안보를 위협해온 극단주의 무장세력이나 반정부세력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특히 중동 전역에서 테러를 일삼아온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는 과거 시아파 맹주 이란에 수차례 공격을 가했다.

앞서 IS는 2018년 이란혁명수비대 행진을 겨냥해 자행된 공격 때 배후를 자처한 바 있다. 이란의 반관영 파르스 통신은 작년 9월에도 케르만시에서 IS와 연계된 핵심 공작원을 테러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이란 전문가인 알리 바에즈는 WSJ 인터뷰에서 이번 테러가 이슬람 성전주의자나 이란 내 분리주의자의 과거 공격과 성격이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한 고위 당국자도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IS가 과거에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테러인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로서는 그것이 계속되는 우리의 추정”이라고 말했다.

이란의 이번 폭발 사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으로 중동 내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전쟁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이란과 이스라엘의 갈등은 극도로 악화해 확전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레바논, 시리아 내부에 있는 친이란 세력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반격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달 시리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사이드 라지 무사비 이란혁명수비대 준장을 미사일로 살해했다. 이달 2일에는 대표적 친이란 국가인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하마스 서열 3위 격인 살레흐 알아루리를 드론(무인기) 공습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번 테러가 고조된 정세를 이용해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을 증폭하려고 자행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테러의 표적도 이란을 크게 자극할 수 있는 상징성이 짙은 곳이기 때문이다.

솔레이마니 장군은 이란의 역내 세력확장을 위한 해외 작전을 기획·주도하다가 2020년 이라크에서 미국의 드론 공습에 암살됐다.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이란 내 악감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이란은 솔레이마니 살해를 보복하겠다는 입장을 계속 밝혀왔다.

WSJ은 아직 증거는 없지만 이란 내부의 반정부 이슬람주의자들이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스라엘 작전에 정통한 이들을 인용해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