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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해 마무리는 서울 속 자연에서…북한산 승가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⑦ 서울 종로구 승가사(僧伽寺)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일곱 번째 방문지는 서울 북한산에 자리 잡은 승가사입니다. 〈편집자 주〉
승가사의 명물 ‘민족통일호국보탑’(9층 석탑). 승가사는 수도 서울 가까이에 있는 명사찰이다.
#승가사 #북한산국립공원 #북한산 #북한산가는길 #감성여행

올해도 잘 버텄다. 스스로를 다독여 주고 싶은 세밑이다. 급하고 정신없이, 곡절 속에 보냈을 한해였기에 위로가 필요할 때다. 아픈 마음들을 덮어주듯 눈이 수북이 쌓였다. 시인 엘리엇은 4월의 봄보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버리는 겨울이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고 노래했다. 고대 신들의 기념일이었던 12월 25일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로 바뀌었고 12일 동안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짓눌려왔던 규칙과 사회질서로부터 해방되는 바보 축제, 방탄한 축제로 열렸다니 예나 지금이나 연말을 맞는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다행히 스크루지 영감 때문에 ‘자선의 정신’이 살아나고 주위(이웃)를 돌아보는 날로 바뀌었다.

그래도 연말이 되면 작은 선술집에서라도 한 해의 고달픔을 달래고 싶어진다. 경쟁사회의 표상인 서울, 그리고 그곳의 상징 북한산을 지난 눈 덮인 성탄절에 올랐다. 전국에서 사고자가 가장 많은 산이라는 오명을 드러내듯 부산히 움직이는 119 산악대원들과 헬기의 굉음소리가 산사의 적막을 깼다.

오악(五岳) 북한산을 오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 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끌려가는 우국지사 김상현이 청나라로 끌려가며 부른 시조 ‘가노라 삼각산’이다. 삼각산(북한산)과 한강은 조국을 상징했다. 지금은 서울의 상징이다. 서울은 백제 위례성, 고려 남경, 조선의 한양으로서 1500여년 이상 우리 사회의 중심이었다. 국토의 0.6% 땅에 전체 20%의 인구가 살고 수도권으로 넓히면 인구의 50%가 밀집해 있다. 나라의 수도를 일컫는 ‘서울’이라는 보통명사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라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세계 6대 강국이 된 대한민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나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승가사로 이어지는 일주문

일전에 딱 한 번 북한산에 올랐었다. 암벽이 많고 경사가 있어 전망은 좋지만 난이도가 높아 정상은 엄두도 못 내고 비봉과 사모바위, 향로봉을 거쳐 진관사로 내려왔었다. 모든 등산로 길엔 절이 있을 정도로 사찰이 많은 산이지만 비봉에서 사모바위 가는 길에 승가사와 마애여래좌상 이정표를 보고 언젠간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서울 북쪽에는 북한산(837m), 도봉산(740m), 수락산(638m)이 남쪽에는 관악산(632m), 청계산(618m)이 수도를 감싸고 있다. 그중에 으뜸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거느리고, 궁궐(청와대)까지 감싸고 있는 북한산이다. 북한산은 백운대(837m), 인수봉(811m), 만경대(800m) 세 봉우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있어 삼각산이라 불렸다. 오행사상이 도입되면서 금강산(동악), 묘향산(서악), 지리산(남악), 백두산(북악), 북한산(중악)을 오악(五岳)으로 정해 국가가 제사를 지냈다. 특히 북한산은 도성이 가까워 진관사. 태고사. 흥국사, 도선사 등 큰 사찰부터 암자 등 수십 곳에 이르는 절이 있고 조선 건국, 한양 천도와 관련한 무학대사 전설들도 많다. 실제 이성계는 조선 건국 전에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권력의 꿈을 표출하기도 했다.

승가대사와 승가사

북한산 비봉(569m) 동쪽 430m 고지에 자리하고 있는 승가사는 통일신라시대 승려 수태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현재 조계종 직할 사찰인 조계사의 말사다. 당나라 신승(神僧) ‘승가(僧伽)대사’를 사모해서 바위에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해 승가대사상을 묘사하고 이름을 승가사라 했다.

승가대사는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 서역으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했다. 전란, 천재지변 등 현세의 재난을 막아주고 기우, 치병, 예언 등 기복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세칭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당나라와 교류했던 최치원 선생과 장보고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알려졌기에 경주 남산에 있는 ‘불곡마애여래좌상’도 승가대사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승가사의 대웅전

고려시대 나라의 난리나 재해가 있을 때 왕이 승가사에서 기도하고 국가의 안위를 기원했으나 부침도 많았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파괴되고 숙종 때 장희빈이 관련 죄인을 이곳에 숨긴 것이 발각되어 쑥대밭이 되기도 했다. 정조가 아들 문효세자를 세자로 책봉하자 청나라 건륭제가 축하 선물로 옥불(玉佛)을 보내왔다. 정조는 승가사에 장수전을 지어 옥불을 안치했다. 이밖에 조선왕실의 후원을 받아 승가사는 명성을 누렸으나 6·25전란으로 파괴되는 비운을 겪는다.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일주문을 지나면 여의주를 꽉 물고 있는 두 마리 용이 버티는 청운교의 기다란 계단길이 나온다. 중간 오른쪽에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가 있으며 계단의 끝엔 1994년 완성된 새로운 명물 ‘민족통일 호국보탑’이라는 9층 석탑이 마당을 점유하고 있다. 절의 위세를 자랑하듯 25m나 되고 탑신 밑에는 경주 석굴암처럼 감실(龕室, 작은 불상을 모셔둔 곳)을 만들어 석가여래를 봉안하여 기도할 수 있게 했다. 인도나 중국 등 동남아 불탑 같다. 경내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보니 저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와 능선이 9층 석탑과 어울려 환상의 비경을 연출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눈 쌓인 비경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게 된다.승가

승가사의 민족통일호국보탑. 1994년 세워진 현대적인 불교 석탑이다.
승가사 경내의 동종각. 북한산 줄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니 동종각(범종의 보금자리)이 북한산 줄기를 굽어보고 있다. 1층과 2층 6각형 정자식의 특이한 구조다. 앞마당 좌측엔 서래당(종무소와 주지실·공양간), 우측엔 100여명의 비구니가 수행 가능한 적묵당(선방)이 있고 정면 계단 위에 동종각과 마주하여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우측에 영산전 좌측에 명부전, 뒤쪽에 약사전과 향로각, 산신각 등 가파른 지형 좁은 공간을 계단식으로 10여동 건물이 요밀조밀 빼곡히 아름답게 잘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은 좌우에 보살들은 없고 석가여래좌상과 후불탱이 모두 금색이다. 영산전 석가3존상 도 모두 금색, 높은 벼랑 위에 산신각 산신탱도 모두 금색이다. 명부전도 불상은 없는데 지장탱이 금칠로 도배되어 있다. 1099년 대각국사 의천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당을 중수하고 불상을 모두 개금(改金)했다고 알려져 모두 금색으로 치장했지 않았나 추측된다.

승가사 약사전 안에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를 창건한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겼다고 한다.

대웅전 뒤 큰바위 및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이 나온다. 석굴에는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바위에 굴을 뚫어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긴 조각 ‘석조승가대사좌상’이 있다. 1000번째 보물이다. 조선 세종 때 왕비인 소현왕후 심씨의 쾌유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바위굴 내 승가대사상 옆에 약수터가 있다. 마실 수 있는 물이다.

약사전 앞에는 예전엔 탑이나 비석이 있었던 듯, 연꽃잎이 새겨진 널찍한 비좌(탑신)만이 놓여 있다. 비좌와 향로각 중간엔,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 순수비를 탁본하고 잠시 승가사에 들려 바위에 새겨넣 ‘가양심신(可養心神)’이라는 글이 있다. 이곳이 정신수양과 독서하기 좋은 길지라는 뜻이다. 마애불을 올라가는 입구에 향로각이란 돌로 다진 동그란 건물 안에 스님이 여러 사람들의 소원문을 읽으며 기도하고 계신다. 마애불이 향로각 내부 유리창에 가득히 들어온다.

추사 김정희가 19세기 초 승가사에 들러 새겨 넣은 문구, 가양심신(可養心神)

승려임에도 정현대부의 지위에 오른 성월선사의 부도탑과 탑비가 1802년에 조성되어 산신각 아래 통제구역 철창 안에 갇혀 있다는데 풍광에 취해 깜박하고 가보질 못했다.

절에 갈 때는 급하지 말고 마음도 쉬어가도록 여유 부려 보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번번이 어긋난다. 승가사는 경관과 조망이 뛰어나서 경승지로 불리고,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동쪽의 불암사와 더불어 서울 근교의 명승 사찰로 꼽힌다고 한다.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마애석불

향로각을 지나 마애불에 오르는 길은 연화교라는 배부른 다리에서 먼저 쉼 호흡을 가다듬고 장대하게 펼쳐진 108계단을 마주한다. 그 계단의 끝에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보물이다. 아름답다.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마애(磨崖)석불은 암벽이나 구릉, 동굴을 뚫고 조각한 불상이며, 여래(如來)는 부처의 여러 호칭중 하나다. 비봉 능선 사모바위의 바로 위인 듯하다.

이 마애불은 승가사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라서 승가사 대신 구기동 마애석불로 불린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고려 초기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고 한다. 머리 위에 팔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사모바위에 은거할 때 이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총상을 입었다 해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단단한 석벽에 부처를 새겨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길이 남기고자 한 것이 마애불인데, 거기 여러 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했다.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마애불은 우리나라에선 7세기 전후부터 나타나 200여개가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서 역사성과 차별성을 인정받은 국보만 해도 7개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충남 서산의 마애여래삼존불(국보 84호), 가장 높은 곳(600m)에 위치한 국보 월출산 마애여래좌상(144호), 석굴사원인 경주 단석산 마애불상(199호), 입체감 있는 불상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201호),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307호), 가장 아름답고 섬세한 ‘대흥사 북 미륵암 마애여래좌상(308호), 7분의 불 보살상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312호) 등이다.

이외에도 배꼽 비결을 간직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못난이 삼형제 ‘거창 가섭암지 마애불’, 누워 있는 ‘운주사 와불’, 머리가 세 개인 ‘석기봉 삼두 마애불’, 입체적인 ‘금오산 마애불’ 등이 소중한 가치가 있는 마애불이란다.

영국의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은 만물을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무심하게 보이는 바위도 의식이 있고 고유의 주파수가 있어 소극적이지만 외부와 정보 교환을 한다고 주장한다. 재미있지만 마애불에 기도하는 우리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기도 하고 가야 할 곳이 많아지는 느낌이다.

승가사 가는 길
승가사 적묵당 모습

북한산 구기동 비봉 공용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길은 여러 갈래다. 사찰만 편하게 가려면 러시아 대사관저 앞에 가서 사찰 셔틀버스로 일주문까지 갈 수 있다. 날씨에 따른 변동도 있어 운행 여부와 운행 시간은 사찰에 확인하고 가는 것이 필수다.

산행을 즐긴다면 북한산 금산사 방향 비봉코스로 올라가 비봉과 사모바위, 승가봉까지 등산하고 사모바위 옆길로 내려와 승가사를 들려 구기분소로 하산하는 방법도 있다.

눈길이라 빠른 등산코스를 택했다. 계곡길 구기동 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 박새교, 귀룽교, 우정교 등 아기자기한 다리와 청량한 계곡물 소리를 따라 50여 분 정도 올라가는 길이다.

구기분소에서 800여m 올라가면 ‘구기계곡 삼거리’ 쉼터가 나오고 대남문과 문수사 가는 방향과 승가사 방향으로 길이 갈린다. 여기서 700m 더 올라가면 승가사 일주문 앞길, 진흥왕 순수비 안내판과 비봉 올라가는 이정표도 보인다. 승가사에서 비봉까진 1km, 사모바위까진 500m란다. 봄날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높지는 않지만 눈길에 바위산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한 걸음씩 집중해서 걷게 된다. 추위에도 몸이 열기로 후끈해질 때쯤 일주문에 도착한다. 숨고를 틈도 없이 9층 석탑을 향한 경사 급한 계단길과 북한산 능선을 접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메가시티 서울에서, 하루하루 촌각을 다투며 긴장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자연에서 치유받는 기분으로 잠시 도심과 결별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오늘을 사랑하라. 어제의 미련을 버려라.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토마스 칼라일〉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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