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클라이번 콩쿠르 60주년 기념
최연소 우승자 임윤찬 탄생 다큐멘터리
“임윤찬, 연주도 삶도 겸손...자만심 없어”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 |
무대 아래의 임윤찬은 그저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다. 여린 몸짓의 소년에게 다가선 지휘자 마린 알솝(67). “내일이면 끝나니 즐겨. 내가 곁에 있잖아”라며 그의 작은 등을 매만진다. “무대 위에서 절대 내 성격을 보여주면 안 된다”는 스승의 조언을 새긴 소년은 피아노 앞에선 다른 얼굴이 됐다. 소년은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 별이었고, 거대한 우주에서 모든 음표를 삼킨 블랙홀이었다.
“우리는 임윤찬의 크레센도( ‘점점 크게’라는 뜻의 음악용어)를 봤어요.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모습이었죠.”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를 연출한 헤더 윌크 감독은 헤럴드경제와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레센도’는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6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로, 제16회 콩쿠르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담았다. 임윤찬은 1962년 시작한 이 콩쿠르의 60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 그의 콩쿠르 출전은 팬데믹과 맞물리며 기적처럼 성사됐다. 코로나19로 당초보다 1년 늦게 열린 덕에, 나이 하한선(만 18~31세)을 통과해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두 개의 시선을 공평하게 엮어간다. 서른 명의 참가자들의 도전기와 임윤찬이라는 ‘클래식 아이돌’의 탄생기다.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의 헤더 윌크 감독 [오드(AUD) 제공] |
헤더 윌크 감독은 “ ‘크레센도’ 촬영과 편집 과정에선 경연 참가자들의 무대 모습만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피아노에선 예술가이자 천재지만 무대 뒤에선 우리와 같은 사람인 이들의 내면, 경쟁을 떠나 서로를 지지하고 축하해주는 동료이자 친구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결전의 날’을 위해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모인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차세대 스타 30명을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난해 콩쿠르의 전체 참가자는 388명. 그 중 1차 본선에 이름을 올린 30명은 2차에서 18명, 준결선 12명을 거쳐 최종 6명으로 추려졌다. 영화에선 서바이벌 방식의 경연을 통해 살아남고, 사라지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았다.
콩쿠르 과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자극적인 스토리나 눈물 공세는 없었다. 담백하고 담담하게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써내려갔다. 윌크 감독은 “경연 참가자들의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 ‘크레센도’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했다.
음악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났지만, 이들이 가진 이야기는 저마다 달랐다. 출산을 석 달 앞둔 안나 지니시네(Anna Geniushene·31), “안마의자를 내 인생 최애 의자”라고 말하는 벨라루스 출신의 울라지슬라우 칸도히(Uladzislau Khandohi·20), 웨스턴 부츠를 신고 연습하는 일리야 슈무클러(Ilya Shmukler·27), 가정형편이 어려워 버려진 피아노로 음악을 시작했다는 ‘긍정의 아이콘’ 클레이튼 스티븐슨(Clayton Stephenson·27),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니며 음악을 배운” 임윤찬의 이야기가 촘촘히 직조됐다.
콩쿠르의 과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이 마냥 수월하진 않았다. 자신에게 잘 맞는 피아노를 고르고, 공연장의 음향을 체크하고, 경연 순서를 정하는 모든 일정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느 시간대에나 경연에 임할 준비가 돼야 하고, 이번 단계를 마치면 다음 단계로 향할 준비가 완벽히 돼 있어야 한다.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콩쿠르는 마라톤과 같고, 우승을 하는 것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콩쿠르에서의 임윤찬은 담대했다. 연주 순서 추첨을 앞두고 참가자 게오르기스는 “(선택이 주어진다면) 굳이 첫 순서와 마지막 순서를 뽑진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임윤찬은 30명의 참가자 중 서른 번째 순서를 골랐다.
의심할 여지 없는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세계 무대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당도하자, 영화는 의미심장한 내레이션을 덧댔다. “탁월한 재능을 만나면 모두가 정확히 알아본다”는 내레이션이었다. 1차 본선에서 임윤찬이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를 마치자, 콩쿠르의 생방송 진행자인 그레그 앤더슨(피아니스트)은 “내 평생 최고의 모차르트였다. 너무 불공평하다”며 감탄하고, 심사위원 앤 마리 맥더멋은 “예술, 드라마, 개성, 상상력 등 모든 걸 갖췄다. 이 세상 재능이 아니다”라며 “피아노 연주력의 극치를 들려줬다”고 말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오드(AUD) 제공] |
임윤찬의 매연주 장면은 윌크 감독에게도 인상깊게 다가왔다. 그는 “다음 라운드로 누가 올라갈지 예측은 매번 빗나갔지만, 임윤찬의 연주가 남다르다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다”며 “특히 결선 연주 후엔 그가 이 대회의 우승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영화는 한국 개봉과 함께 15분 분량이 늘어났다. 윌크 감독은 “관객들이 실제 공연에 있는 느낌을 주고 싶어 연주 부분을 좀 더 길게 보여 주고 싶었고, 그와 연결되는 임윤찬의 인터뷰도 추가됐다”고 말했다. 영화가 그의 인터뷰를 비중있게 다룬 것도 임윤찬이라는 한 사람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임윤찬은 “피아노를 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음악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고립돼 고민하고 외로운 순간에 음악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피아노를 칠 땐) 하늘에 계신 위대한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연주한다”고 말한다. 콩쿠르를 통해 임윤찬을 지켜봐온 윌크 감독은 “임윤찬은 연주도 삶도 겸손하다. 그의 연주에는 자만심이 없다”며 “자기 스스로를 음악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보다 앞선 위대한 예술가들로부터 수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윤찬의 결선 무대는 반 클라이번의 연주와 교차 편집됐다. 콩쿠르가 담고 있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강조하기엔 ‘화룡점정’의 선택이었다. 이 경연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인 1958년 열린 제1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1934~2013)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반 클라이번은 당시 콩쿠르에서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하며 국제적인 스타가 됐다.
윌크 감독은 “냉전 시대의 긴장된 순간에 반 클라이번은 국가, 언어, 문화 간의 간극을 메웠다.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할 때, 지금 우리의 시대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 전쟁) 실시간으로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며 “음악이 시간과 역사적인 순간을 넘어선 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음악가들에게 콩쿠르는 긴 여정에서 찾아오는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이 곳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콩쿠르를 마친 후 임윤찬은 ‘우승으로 무엇이 변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제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음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계속 연습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지내고 있어요. 연습하고 싶고, 위대한 작품들을 계속 배우고 싶으니까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