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웰니스 여행 영덕 장육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⑥경북 영덕군 장육사(莊陸寺)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여섯 번째 방문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운서산에 자리 잡은 장육사입니다. 〈편집자 주〉
장육사 대웅전과 왼편의 관음전

누가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다신교(多神敎)라 대답했다. 내가 신봉하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아집에 막혀 오히려 사람과 사회를 갈라치는 벽(壁)이 되는 것이 싫었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하듯,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최상인 양 규정하고 판단하며 남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는 게 현실이다.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 우리들에게 자꾸 오라고 손짓하는 열린 동해바다와 구름도 머물고 간다는 경북 영덕 운서산 자락으로 힐링 여행을 떠났다.

아니, 정확히는 웰니스(Wellness) 여행이다. 웰빙(well-being)과 행복(happiness), 건강(fitness)의 합성어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을 일컫는 이상적인 상태를 일컫는 신조어다. 맑은 공기, 청정환경을 내세우며 웰니스 여행지로 홍보하고 있는 영덕. 그만큼 외진 곳이다. 겨울비 내리는 날 장육사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만난 비구니 진수스님은 앞으로 ‘다신교’라 하지 말고 ‘열린교’라 말하란다. 아하.

200리 바닷길 따라, 장육사 가는 길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동해 바닷길 ‘해파랑길’은 50개 코스 770Km에 이른다. 동해와 접한 영덕은 해안 트레킹 코스 64km를 ‘블루로드길’로 조성했다. 고래불, 대진, 장사 등 9개 해수욕장의 하얀 모래밭이 해안선 따라 줄지어 있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00선에도 선정된 바 있다. 강구항, 창포항, 축산항, 경정항, 사진항, 대진항, 병곡항 등 한적한 포구가 동해 어촌마을의 정취를 잘 간직하고 있다. 우산을 펴기 힘들 정도의 비바람 속에 파도치는 동해 해안길에서 채호기 시인의 시구를 생각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영덕군 대진해수욕장에서 만난 새떼

울창한 산림과 청정한 바다가 어우러진 고장 영덕은 지난 2019년 한국환경정보연구센터가 주관하는 ‘친환경도시대상, 에코시티’에서 ‘맑은 공기’ 대상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영덕군은 친환경을 지자체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키우고 있다.

동해 바닷길을 따라가다 운서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있는 장육사로 들어섰다. 장육사는 주위에 칠보산(810m), 등운산(767m), 독경산(683m), 형제봉(704m) 등 높은 산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우렁찬 계곡물 소리와 함께 나옹왕사 기념관이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영덕군에서 조성한 ‘나옹왕사 역사문화 체험지구’에 들어선 것이다.

나옹왕사와 청산가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별칭이 붙은 운서산(雲棲山)은 520m 높이에 불과하지만, 깊은 골짜기와 울창한 숲을 품고 있다. 이곳에 도착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서산에서도 금계가 알을 품은 형상, 즉 금계포란(金鷄抱卵)형 명당자리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기념관 초입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나옹선사의 선시(禪詩) ‘청산가’다. 탐욕도, 성냄도, 번뇌도 욕심도 모두 벗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마치 내게 하는 이야기 같다.

나옹왕사의 청산가로 꾸며놓은 벽면

공민왕의 왕사였고 고승(高僧)이었기에 왕사, 화상(和尙)으로도 불리운 나옹은 이곳 영덕 창수면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에 장육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사는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자 문경 묘적암으로 출가했다.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며 깨달음을 얻었고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화상(중국과 한국에서 활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개성 신광사 주지를 하였고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하여 그곳에 부도탑이 있다. 그는 인도 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인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가르침을 쉬운 가사문학으로 풀어내 민중들을 교화하고자 했다. 많은 선시를 남긴 덕분에 불교 가사(歌辭) 문학의 시조로도 통한다. 나옹에게 법을 전한 지공화상, 나옹에게 선법을 이어받은 무학대사까지 지공·나옹·무학은 삼화상(三和尙, 세 분의 수행을 많이 한 승려)으로 꼽힌다. 그래서 세 인물을 함께 그린 화상(畫像)을 여러 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웅전을 보물로! 장육사
장육사의 경내. 차분하고 고즈넉한 정취가 있다.

운서산 깊은 골짜기에 나옹왕사 기념관과 힐링센터 ‘여명’를 좌우에 두고 중간에 장육사가 자리잡고 있다. 일주문은 계곡 넘어 멀찍이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운서교를 넘어 출입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흥원루(興遠樓)를 지나면 대웅전이 나온다. 육중한 흥원루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듯 색바랜 목재의 색감이 도드라진다. 절에는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대웅전과 관음전, 그리고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 범종각과 산내 암자인 홍련암이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 활용되는 탐진당과 육화당까지 여러 건물이 오밀조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탐진당(探眞堂)은 진리를 탐구해온 지공, 나옹, 무학, 임제, 평산 등 고승들로 방 이름을 붙였다. 육화당(六和堂)은 신화, 구화, 의화, 계화, 이화로 이름 붙여 있다. 꽃 이름일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불교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섯 가지 도리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육화(六和)였다. 몸으로 화합하는 신화공주(身和共住), 입으로 화합하는 구화무쟁(口和無諍), 뜻으로 화합하는 의화동사(義和同事) 계율로 화합하는 계화동수(戒和同修), 이익을 나누는 이화동균(利和同均) 바른 견해로 해탈하라는 견화동해(見和同解)가 육화(六和)이고 그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대웅전 천장에 그려진 주악비천상

보물 등재심사 중인 대웅전은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조선 세종 때 산불로 소실된 후 재건, 임진왜란 때 폐찰되었다 중건된 조선 중기 건물이다.

대웅전 내부 삼존불 뒤 탱화 영산회상도(영취산에서 석가여래의 설법 모습)와 우측의 지장보살도는 경상북도 등록문화재다. 그리고 우측의 또 다른 탱화, 좌우 벽면의 문수보살, 보현보살 벽화 그리고 천장의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하늘나는 선녀를 그린 형상) 등도 오랜 역사를 견뎌온 듯 빛바랬지만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다. 대웅전 전체가 장엄한 미술관이다. 이곳 대웅전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이다. 아마타불은 주로 극락정토를 재현한 극락전의 주불이고 대웅전은 석가여래불이 당연히 주불이라 생각했는데, 장육사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지 궁금했다.

관음전 내부. 가운데 금칠된 불상이 건칠관음보살상이다.

관음전에는 기본틀 위에 종이를 여러겹 덧붙여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금물을 올린 종이불상 ‘건칠관음보살상’이 있다. 이런 불상이 많지 않아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대웅전 뒤편 계단을 오르면 나옹왕사의 첫 수행지로 알려진 홍련암이 있다. 여기에는 지공대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각각 모셔져 있다. 대나무 숲에서 홍련암으로 부는 바람이 빗소리와 부딪히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친 여성들만 오라, 우바이 세상
장육사의 암자인 홍련암

깜짝 놀랐다. 흥원루 1층 종무소에 구경스님, 진수스님이 차담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장육사가 올해 초에 비구니 사찰로 바뀌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절이 유독 단아하고 정갈해보였다. 비구니 스님과 차를 마시는 필자의 어색함을 눈치 챘는지 진수스님이 가장(家長)의 무게에 짓눌려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처사(남자)들의 무거운 어깨를 걱정했다. 애틋하다 했다. 내 어깨가 조금 처지긴 했지만.

석가모니가 고향에 갔을 때 이모(양어머니라는 이야기도 있다)가 승려 될 것을 세 번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그 뒤 석가께서 바이사 알라성으로 옮겼을 때 이모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뒤 출가를 원하는 여성들을 이끌고 맨발로 걸어 석가모니를 찾아갔다. 이를 본 제자 아난이 불쌍히 여겨 석가께 세 번을 청해 출가를 허락받았고 이모는 최초의 비구니가 될 수 있었다.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에 대해 신중했고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구니로서 감수하기 어려운 팔귀경계(八歸敬戒, 비구니 스님들이 특별히 지켜야 할 8가지)를 지켜야 한다는 전제로 구족계(승려들의 계율)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여성은 업장(業障, 옳은 길을 방해하는 장애)이 더 두텁다 하여 지켜야 할 348개 계율을 부여했다. 남성은 250계 계율이다.

일부러 그랬을까?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여성비하적인 팔귀경계나 계율의 차등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여자로서 스님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구경스님, 진수스님과 함께한 차담

가장의 어깨만큼이나 비구니 스님들의 어깨도 무거워 보인다. 불가에선 ‘한 사람이 출가하면 아홉 친족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출가를 통해 그 공덕으로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하지만 무엇이 속세와 이별하고 삭발까지 하도록 했을까? 고행을 선택한 연유와 사연들이 궁금해진다.

진수스님은 “좋은 기운은 좋은 기운끼리 모이는 것이니 좋은 습관과 밝은 생각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전했다. 불교용어로 동업중생(同業衆生), 속세어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싫은 환경도 남 탓이나 불평하지 말고 자연스레 받아들이라고 한다. 어둠이 물들어가는 산사에 구경스님의 저녁 타종 소리가 맑고 향기롭게 퍼져나갔다.

장육사의 템플스테이는 ‘우바이 세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우바이(보살)와 우바세(처사)는 출가하지 않은 재가신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깊은 산 속 조그만 비구니 사찰이다 보니, 숙박형 템플스테이는 여성만 받는다고 했다. 삶에 지쳐있거나 새로운 활력을 위해 잠시 멈춤이 필요한 여성들이 마음 편하게 쉬고 명상하며 자신을 다듬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무거운 어깨에 휴식이 필요한 남성은 ‘여명’으로.

웰니스의 고장 영덕, 인문힐링센터 ‘여명’

장육사 지근거리에 영덕군에서 운영하는 인문힐링센터 여명이 있다. 우거진 숲속에 한옥 형식으로 만들어진 시설이다. 웰니스와 힐링을 테마로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조성됐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의 마음 단련을 위해 명상, 기공체조, 건강 음식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식당으로 사용하는 ‘정수당’, 강의를 위한 ‘심검당’, 숙소건물인 ‘운서관’과 건물 뒤편의 꽃나무 정원을 지나면 몽골 전통가옥인 ‘게르’가 있다. 명상을 위한 공간이다. 계곡 물소리가 청량하게 퍼져나간다. 주변에 둘레길, 명상길이 있어 자연을 벗 삼아 산책하기 좋다는데 어둠이 깔린 후에 도착하고, 새벽녘에 나오다보니 체험하지 못해 아쉽다.

인문힐링센터 여명 입구

명상을 직접 지도하는 이태호 여명 원장은 “여명은 여행과 명상의 합성어지만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 어둠 이 가시고 밝음으로 가는 중간 단계라는 의미가 있다. 여명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삶의 지혜를 밝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인도의 명상가들도 이곳을 찾았다 한다. 나옹화상은 인도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켰고 여명은 한국명상을 인도명상을 뛰어넘어 세계적 명상(K-명상)으로 발전시켜가길 기대해 본다.

필자도 이곳에 묵었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훌륭한 숙박시설이다. 단지 객실에 TV가 없고 휴대폰 전파도 닿지 않는다. 머무는 동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고 휴식(디지털 디톡스)을 취하라 한다.

한밤중에 깼지만 할 것이 없다. 볼 책이 머리맡에 있다면 다행이고(심검당엔 읽을 책들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멍하니 이불 속에서 뒤척일 수밖에 없다.

새벽 5시, 여명 문을 나와 잠시 장덕사로 발길이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별들도 잠들어버렸다. 괜한 발걸음에 절간을 지키는 강아지 짖는 소리만 계곡에 울려 퍼졌다.

여명이 밝기 전에 서울로 떠나야지. 어제의 비가 오늘은 눈이 되어 흩날렸다.

글·사진=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연재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