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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닷길이 열리고 닫히는 서해 간월암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⑤ 충남 서산 간월암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다섯 번째 방문지는 충청남도 서산시 앞바다에 있는 독특한 암자인 간월암(看月菴)입니다. 〈편집자 주〉
간월암의 모습. 서해의 바닷물이 빠지면 암자와 뭍이 이어지는 길이 드러난다.

사람살이가 좋은 일과 굿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기에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해넘이를 보며 지난 시간들을 더듬어보고 잘 마무리하고 싶어진다. 부족했던 모습들과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번뇌는 모두 지는 해에 실어서 바다 속에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인지 모르겠다. ‘비워야 채워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해돋이를 보며 꿈과 희망을 설계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도 벅찬 일이지만, 맞이할 새날들을 기약하고 잠시 반성하고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해넘이 또한 좋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작은 섬에 암자가 있다. 수덕사의 암자인 간월암(看月菴)이다. 사실 섬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크기라, 조그만 암초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린다. 바위섬 전체가 암자다. 물이 빠지면 암자까지 50m 정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지만 물이 차면 암자는 바다에 갇힌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정경은 신비롭다.

절은 응당 산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산사(山寺)라고 한다. 참선을 행하는 수행공간으로서 의미가 강하고 한국의 독특한 역사와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간월암도 지금은 관광지이지만 간척사업을 벌이기 전엔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에 있어 참선도량(선법을 닦으며 수행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바닷가 절은 산속 절과는 다른 이색적 분위기다.

서해바다의 해넘이는 주변 섬들이 배경에 어우러져서 유독 아름답다. 서산 앞바다의 암자에서 노을을 보며 자신을 비우는 경험을 하는 건 분명 귀한 일일 것이다. 처마에 걸친 낙조가 갈매기, 귀항하는 낚싯배 등과 어우러진 황금빛의 그림 한 폭을 상상하면서 이달 초 간월암을 찾았다.

간월암 경내 안내도. 사진처럼 바닷물이 차면 물 한 가운데에 둥둥 뜬 형상이 된다.
간월암과 원통전(관음전) : 바다 건너 만난 관음보살

물 빠진 바닷길을 건너면 ‘조용히 해달라’는 작은 안내판과 함께 곧바로 일주문이 나온다. 문을 통과하면 암자의 모든 요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난감 같은 정원연못, 종무소, 원통전, 용왕각, 산신각, 해수 관음상 그리고 최근 건립된 범종각까지. 그리고 절 마당에는 석탑 대신 보호수인 수령 150년(높이 12m)이 넘는 팽나무와, 무학대사 지팡이라는 250년 수령(높이 3.5m)의 사철나무가 먼저 반겨준다.

간월암 경내로 입장하는 일주문

간월암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 대신에, 관음보살을 모시는 ‘원통전’이 중심을 차지한다. ‘어떤 이야기라도 다 들어준다’고 하는 관음(觀音)보살은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자비의 화신이라 한다. 보통은 일주문에 있어야 할 간월암 현판은 원통전에 걸려 있다.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주원융통(周圓融通, 두루 막힘이 없는 상태)하게 씻어준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관음보살을 모신 건물을 관음전이라 칭하는 절들도 많다.

원통전엔 충남 유형문화재 ‘목조보살좌상’을 비롯해 무학대사, 만공선사, 벽초대사(만공의 제자로 알려졌다)의 영정이 놓여 있다. 목조보살좌상은 나무와 종이로 틀을 제작한 뒤 금칠을 입힌 불상으로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간월암의 경내

산사에는 민간의 신앙을 받아들여 절 깊숙한 곳에 산신을 모신 산신각도 있는데 이곳 바다 암자에서의 산신각의 어떤 의미일까. 용을 타고 있는 용왕을 모신 용왕각, 바다에서 파도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켜주는 해수관음상이 원통전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사방이 딱 트인 곳에 놓인 범종각 난간에서 바라보면 고요한 서해가 앞마당인양 펼쳐졌고 멀리 고깃배 한 척이 한가롭게 지나갔다. 해넘이 시간이 가까워지니 간월암을 배경으로 하늘과 바다를 온통 물들였던 붉은빛이 안면도 섬들 사이로 사그라드는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오른편에는 간월도항 방파제와 빨간 등대가 있다. 어두워진 하늘에 방파제와 등대, 포구에 불이 들어온 야경은 또 다른 장관을 선사할 것이다.

아래쪽 테라스 같은 공간에 인자한 모습의 관음상 얼굴이 새겨진 기둥이 줄지어 있다. 그곳에 소원연등이 걸렸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갖가지 소원문들이 석양빛에 빛을 발한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들으며 지는 해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지친 몸과 마음의 무거운 짐들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했다. 나의 소원문은 무얼 써야할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간 기둥에 미소짓는 관음상 얼굴이 새겨져 있다.

옛 선사 달보고 깨우친 간월암에, 잔잔한 염불 소리 울리면

바닷새, 파도마저 소리를 낮추고, 지나던 나그네는 발걸음도 조심한다네

간월암에서는 입과 마음을 잠시 쉬고, 마음의 평안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며

귀한 시간, 귀한 걸음 헛되이 하지 마소서 〈간월암〉

‘정주영 공법’으로 뭍과 이어지다

간월암 표지석에는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王師)인 무학대사가 조선 개국의 공으로 간월도와 인근 황도를 하사받아 절을 지었다는 유래도 전해온다. 그래서 간월암은 ‘무학사’란 별칭으로도 불린다. 이러나저러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피안도의 ‘피안사(彼岸, 깨달음의 세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웠고 물이 들어왔을 때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닮았다 하여 연화대(蓮花臺, 극락세계에 있다는 불보살이 앉는 자리)라고도 불렸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건하고 태조의 왕사를 지내며 한양천도를 주도했던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며 달을 보고 도를 깨우쳤다고 해서 현재의 간월암이란 이름이 붙었다. 무학대사 탄생 과정 등이 담긴 ‘설화 기념비’가 서산시 인지면에 있어 이곳과 연을 맺은 듯하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법어로 유명한 성철스님도 만공스님이 권해서 간월암에서 수행할 정도로 스스로를 가두고 수행정진하기 좋은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천수만의 작은 섬이었던 간월도는 1984년 간척사업 덕에 육지와 연계되어 뭍이 되었다. 서산방조제가 세워지면서 간월도 앞 바위섬(간월암)도 뭍과 연결되었다. 하루 두 번은 배 없이도 오갈 수 있다. 그래서 간월암 홈페이지 통해 물때를 미리 확인해야만 한다.

간월암의 범종각. 서쪽으로 떨어지는 해의 붉은빛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방조제 건설 당시 9m에 달하는 서해의 조수간만 차와, 초당 8m에 이르는 조류로 공사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폐유조선을 바다 바닥에 가라앉혀 조수 유입을 막고 방조제 공사를 벌였다. 이른바 ‘정주영 공법’이다.

모세는 유대인들을 애굽(지금의 이집트 지역)에서 탈출시키고자 바다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을 행했다. 간월암은 방조제 덕분에 숨어있던 바닷길이 열렸다. 정주영 공법이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환생하여 길을 만들고, 바다를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간월암의 신비로움을 만든 셈이다.

여의도에서 출발, 서해안 고속도로로 2시간가량 가다 보면 좌측에 정주영 회장이 북한으로 1001마리 소떼를 몰고 갔던 서산농장을 마주한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홍성 땅에서 서산 간월도에 이르는 서산A지구 방조제의 쭉 뻗은 드라이브 코스를 만난다. 서산은 이래저래 정주영 회장과 여러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간척지에 정주영 회장의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소문을 최근에 듣기도 했다.

무학대사와 만공선사

무학대사는 간월암을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주장자(拄杖子, 수행승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를 뜰에 꽂았다. 그러면서 ‘이 나뭇가지가 다시 살아나면 불교가 다시 흥왕하리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절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간월암은 폐사됐다. 잊혀진 이름이던 간월암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건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다.

수덕사를 중창하고 마곡사 주지를 지냈던 만공선사(1871~1946)가 1930년대에 ‘간월암 고목나무가 다시 살아나 잎이 핀다’는 소문을 듣고 간월암을 찾았다. 그러나 암자는 흔적이 없었고 그저 고목나무에 새파란 잎이 돋아나 있는 것만 보았다. 이후 그곳에 머물며 암자를 짓고 손수 간월암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걸었다. 만공스님은 1942년 8월부터 3년 동안 이곳에서 조선독립을 기원하는 1000일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회황한 지 3일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간월암이 세간에 알려졌다 한다.

원통전(관음전) 안에 있는 무학대사와 만공선사, 벽초대사의 영정

만공스님은 일제강점기 만해스님이나 용성스님(민족대표 33인이자 조계종 범어문중의 시조)처럼 직접 독립운동 일선에 나서진 않았지만 선원에서 정진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선학원을 만들어 한국불교 말살 정책을 피던 조선총독부의 핍박에서 벗어나 독신 수행가풍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스스로를 인간 부처라 일컫고 근세 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괴짜 스님’ 경허대사의 셋째 제자로서 스승의 족적을 만인에게 알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조계종 최대 문중 가운데 하나인 덕숭문중(덕숭산 수덕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중)이 경허스님 만공스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조계종에는 법맥(法脈, 스승과 제자로 엮어진 인맥)을 통해 형성된 문중이 있는데 범어문중(범어사), 경봉문중(통도사), 효봉문중(송광사), 백파문중(백양사)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불교 초기 대표적 선승인 무학대사와 근대불교 선종(禪宗)의 중흥기 법통을 이은 만공선사의 정신이 간월암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선종은 대승불교의 하나의 조류이며 달마대사가 창시자)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을 비롯한 세 제자들을 중심으로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불교 이야기를 담은 최인호 작가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이나 유작소설 ‘할’에는 간월암의 여러 풍광이 묘사되기도 했다.

'서산의 절경', 다양한 즐길거리 가득
서산 간월도는 굴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주변엔 어리굴젓을 취급하는 맛집도 많다.

‘황해바다 석화야!, 석화야! 물결 타고 달빛 따라 간월도로 모여라. 황해바다 석화야! 석화야! 이 굴밥 먹으러 간월도 달빛 따라 모두 모여라 석화야….’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자역민들의 굴 풍년을 기원하는 간절함을 담아 제를 올린다. ‘간월도 굴부르기 군왕제’다.

과거 무학대사도 태조에게 간월도에서 난 어리굴젓을 진상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지역민들은 이 굴로 어리굴젓을 담가 먹었다. 어리굴젓은 육질이 단단하고 굴 특유의 바다냄새가 풍부하다고 한다.

서산방조제를 넘어가니 어리굴젓 굴밥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많이 보인다. 간월암 근처에는 스카이 워크와 어리굴젓 기념탑(간월도 굴탑)도 있다. 해질녘 간월암 부근에선 근사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간월암을 ‘서산 9경’ 중 3경이라 한다. 제1경은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의 아픔을 간직한 해미읍성, 2경은 ‘백제의 미소’라 하는 서산마애여래삼존상, 그리고 3경이 바다 위에 떠있는 간월암, 4경이 백제 의자왕 때 창건된 개심사다.

간월암 담벼락엔 유홍준 교수가 쓴 ‘문화유산 답사기’에 추사고택, 서산 마애불, 보원사터, 개심사와 더불어 간월암도 외국인이 꼭 봐야 할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으로 꼽힌다는 홍보문이 붙어 있다. 한국인이지만 서산 지역을 다시 올 땐 꼭 가봐야 할 곳들이 많은 것 같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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