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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문대→대기업 취업했는데” 직장 관두고 독일간 그 청년, ‘韓현대사진’ 아이콘 되다 [요즘 전시]
구본창, 문 라이징 lll, 2004~2006.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공부는 제법 잘해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실업에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스물여섯 살의 그가 잿빛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6개월 만에 퇴사하고, 학비가 무료인 독일로 건너가 사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소년은, 50년 뒤에 이렇게 한국의 큰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죠. 그런데 막연하게 꿈은 꿨어요. 언젠가 나만의 전시를 하게 될 거라는…”

구본창, 자화상, 197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만난 작가 구본창 [연합]

13일 만난 작가 구본창은 “조금이라도 꿈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며 운을 뗐다. 그는 한국 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가다. 이미 1980년대에 있는 그대로의 사물 사진이 아닌, 작가 의도가 담긴 연출 사진을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에만 해도 객관적 기록이라는 사진의 역할을 뛰어넘어 회화, 조각, 판화 등 예술 작품의 속성을 반영해 사진에 주관적인 표현을 담는 방식은 국내에서 매우 생소했다.

14일부터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는 구본창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에서는 지난 1968년에 작업한 첫 자화상 사진부터 미발표작과 최신작까지, 작가의 70년 인생에 걸친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는 5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된다. 수집품과 관련 자료까지 더하면 무려 1100여점에 이르는 대규모 전시다. 특히 서울시립미술관이 서소문 본관 1~2층을 모두 사진작가인 그에게 내줬다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큰 전시다.

작가 구본창이 대영박물관 소장 조선백자를 촬영하는 모습.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우선 작가의 50여개 연작 중 43개 시리즈가 전시된다. 초기부터 최신작까지 작가의 작업은 조금씩 변화했지만, 바뀌지 않은 공통점이 있다. 익숙한 대상에 대한 선입관을 버렸다는 점, 그리고 대상을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표면 너머에 감춰진 본질을 포착해 담아냈다는 점이다.

전시는 그가 세상의 무한한 이야기에 귀 기울인 다섯 개의 방으로 구성된다. ▷호기심의 방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 ▷열린 방 등의 순이다. 작가가 나만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시작점부터 1988년 한국에 복귀해 시도한 실험적 작품을 거쳐, 여백을 담아 주관적으로 풀어낸 연작 시리즈를 지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정적이고 서정적으로 변하는 모든 과정이 담겼다.

구본창, 초기 유럽-컬러, 1983.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독일 유학 시절 구본창은 평소 흠모하던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를 만나 “유럽식 사고가 아닌, 한국 유학생의 사고로 사진을 만들어 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가 졸업 작품 방향을 ‘초기 유럽’ 연작에서, B컷 사진을 네 장씩 엮어 영화처럼 이야기 흐름을 만든 ‘일 분간의 독백’ 연작으로 전면 수정하게 된 배경이다. 특히 시선을 바꾸면서 사진에는 이방인으로 느끼는 소외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이 담겼다.

독일에서 6년 만인 1985년 서울로 귀국한 작가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긴 오후의 미행’, ‘열두 번의 한숨’ 연작에서는 그가 다시 이방인이 돼 느끼는 고독한 감정과 작가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작품에 투영됐다. 작가는 매체 실험을 거듭했다. 바느질로 이어 붙인 종이에 이미지를 인화한 ‘태초에’ 연작과 한지에 인화된 곤충 이미지를 표본처럼 구성한 ‘굿바이 파라다이스’ 연작이 대표적이다.

구본창, 굿바이 파라다이스, 1993.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익명자, 2019.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작가의 시선은 한국의 전통문화로도 향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사진 속 조선백자 달 항아리, 지화(紙花),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가 카메라 셔터를 통해 재생되고, 또 되살아나 말을 건다. 그는 “내 사진은 어느 측면에서는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작 행위”라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물과 사람의 여백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껏 몇십년 동안 이뤄온 것이 초라해 보일 때도 있었고, 자신감이 없어진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다고 느낀 순간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냥 삶은 진행될 뿐이고 평범한 한 작가의 일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95년 광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내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온 구본창 작가의 이번 회고전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나아갈 방향을 다시 한번 점검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3월 10일까지. 무료 관람.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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