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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박씨 물고왔던 ‘네덜란드 제비들’

지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박씨를 물고 온 강남 갔던 제비’를 붙잡지 않고 날려보내서 후회하는 일들을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조선이 네덜란드와 손잡을 기회를 놓친 일이 그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17세기의 네덜란드는 국제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그리고 무역통상국가로 최대의 번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네덜란드 황금시대’로 부른다.

16세기부터 서구 유럽 사회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등을 계기로 대항해 시대가 열리자 향신료와 금은보화를 획득하기 위해 앞다퉈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네덜란드도 이에 뒤질세라 1602년,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지금의 종합상사에 해당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진출의 첨병 역할을 맡겼다. 최초의 증권거래소로 평가받는 암스테르담증권거래소와 중앙은행의 전신인 암스테르담은행도 발족했다.

해외 진출을 위한 인프라를 갖춘 네덜란드는 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중국의 대만, 일본의 나가사키 등을 거점으로 삼아 향신료, 도자기, 은, 비단 등의 중개무역과 삼각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17~18세기에 걸쳐 아시아 무역패권을 장악, 엄청난 부(富)를 축적했다.

이 시기에 조선 땅을 밟은 두 명의 네덜란드인이 있었다.

일본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하자 조선 땅에 상륙했는데 한 사람은 1627년(인조 5년)에 표착한 얀 얀세 벨테브레이고, 다른 한 명은 그로부터 27년 후인 1653년(효종 4년)에 온 헨드릭 하멜이었다. 두 사람 모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개명한 조선 이름은 ‘박연’이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뛰어난 총기 제조기술을 인정받아 훈련도감에 배치돼 후한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조선 땅에서 여생을 마쳤다.

반면 하멜은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으며 온갖 박해에 시달리다가 기회를 틈타 가까스로 일본으로 탈출, 나가사키에 설치돼 있던 네덜란드 상관(무역관)을 통해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는 귀국 후 조선 억류 14년 동안의 체험을 토대로 조선의 정치, 외교, 교육, 종교, 문화, 사회상, 언어 등 광범위한 정세보고서를 작성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다. 이 보고서가 바로 조선을 최초로 유럽 사회에 알린, 일명 ‘하멜 표류기’다.

‘그자들은 도둑질이나 거짓말이나 남을 속이는 짓을 잘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을 너무 신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손해를 입히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거래하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이를 파기해버리는 습성도 있다.’

이 글은 조선에 대해 혹평을 가한 ‘하멜 표류기’의 일부다. 한 마디로 조선과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다.

부유한 고위층 가정 출신이며 교육 수준이 높은 하멜은 순수 기술자인 벨테브레보다 영향력 있는 통상전문가였던 듯싶다. 그런 만큼 그의 보고서 ‘하멜 표류기’는 네덜란드 측이 조선 진출을 검토하는 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통상관계 추진을 검토하는 과정에 청나라와 조선과의 관계, 일본의 부정적 반응 등을 고려해 통상을 단념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글로벌 통상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위상을 놓고 볼 때 하멜의 인색하기 그지없는 평가는 결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조선의 위정자들은 하멜의 진가를 몰라봤던가. 그리고 왜 그 당시 세계의 통상강국 네덜란드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그들과의 통상에 무심했던 걸까’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남는다.

반면에 이웃 나라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류에 매우 전향적이었다. 임진왜란 때 인질로 끌고 간 조선 출신 도공들이 생산한 규슈지방의 ‘사쓰마야키’ ‘아리타야키’ 등은 화려한 문양과 장식으로 유럽 왕족·귀족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유럽 시장을 휩쓸었다. 일본은 도자기 수백만점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했는데 일본은 생산 제조에서, 네덜란드는 중개무역으로 각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만약 조선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손잡고 우리 도공들이 제작한 도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했더라면 후기 조선 사회는 제조업이 뒷받침되는 통상국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면서 풍요로운 사회를 구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도래하는 19세기 서구 산업혁명과 근대화에 대비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때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다. 이번 방문기간에 ASML 등 노광장비 반도체 첨단 기술 분야에서의 제휴뿐만 아니라 금융, 물류 분야에서 네덜란드가 오랜 세월 축적한 통상의 노하우도 획득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지난 17세기에 조선 조정이 범했던 실책을 거울삼아 ‘소프트파워의 강국’ 네덜란드와 보다 밀접하고 폭넓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를 기대해본다.

장준영 헤럴드 고문(전 항공대 초빙교수)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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