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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듯 그렸다” 26살, 시력 잃은 화가…그녀의 손끝은 붓이 됐다 [요즘 전시]
마뉴엘 솔라노, Mi Primer Beso, 2023. [Courtesy PERES PROJECTS, Berlin, Seoul, and Milan]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0년 전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그녀는 시력을 잃었다. 그녀의 주변은 암흑으로 뒤바뀌었다. 화가인 그녀는 칠흑 같은 어둠의 세상에서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었다. 오로지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본다. 섬세하게 기억해 낸 심상(心象)에 의해서다.

“제가 가진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녀는 추상화가 아닌 회화를 그린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쉽게 그리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녀가 1년에 그리는 작품은 10점이 채 되지 않는다.

마뉴엘 솔라노, Pijama, 2023. [Courtesy PERES PROJECTS, Berlin, Seoul, and Milan]

아름답고 찬란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캔버스 위에 펼친 그녀는 마누엘 솔라노. 독일 베를린에서 작업하는 멕시코 출신 작가다. 그녀의 국내 첫 개인전이 지난 달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열렸다. 전시 대부분은 솔라노의 신작으로 구성됐다. 전시는 내년 1월 14일까지.

이번 전시 주제는 솔라노의 유년 시절을 엿볼 수 있는 ‘파자마(Pijama)’다. 그녀가 생생하게 떠올린 행복한 기억 속 장면이 작품으로 구현됐다. 3살이었던 솔라노가 자신의 몸보다 큰 헐렁한 붉은 격자무늬 셔츠를 입고 부모님 침대에서 노는 모습, 가장 친한 친구와 처음으로 귀여운 입맞춤을 나누는 모습, 장난감과 사탕이 가득 든 피냐탸와 싸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빛이 바래진 필름 사진을 보듯 솔라노의 작품 속 시간은 과거다. 하지만 손끝으로 찍어낸 형상과 흐릿하게 표현한 색상 곳곳에서 정작 솔라노의 과거가 아닌 미래가 엿보인다. 연약해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탐구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흔적들의 총아다.

작가 마뉴엘 솔라노가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답변을 하는 모습. 이정아 기자.

솔라노는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나쁜 기억이 있으면 그림에 투영된다”며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한다”고 했다. 솔라노가 영감을 얻는 원천으로 유머와 자기애를 꼽은 이유다. 그녀는 “마음 속 내가 투영돼 있다”며 “관람객들이 제 그림을 보고 저마다 자신의 일부를 보거나 자기 모습을 떠올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작가의 예술적 감정과 함께 투지, 행복, 설렘, 만족 등 활기찬 감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시력을 잃은 솔라노가 자기 파괴적인 작품을 미친듯이 그렸던 시기도 있었다. 그녀는 그림의 배치나 대칭, 길이 등을 두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 완벽하게 그려낼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러나 지금의 솔라노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는 오히려 자신이 가진 한계를 독특한 창작법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3년 전부터 트랜스젠더가 된 그녀는 자전적 이야기와 대중문화 이미지 사이에서도 균형을 맞추며, 대중의 공유된 경험을 풀어내고 있다.

시력을 잃은 마뉴엘 솔라노가 작업을 하는 모습. [뉴욕타임즈 T 매거진 영상 캡처]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열린 한국 첫 마뉴엘 솔라노 개인전 ‘파자마(Pijama)’ 전경. [페레스프로젝트 제공]

솔라노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캔버스를 틀에 매지 않고 벽 위에 바로 펼치고 작업을 한다. 이후 핀과 압정, 못을 캔버스에 꼽아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다. 실이나 끈을 이용해 핀과 압정 등을 서로 연결해 선을 만든다. 이렇게 영역을 나눈 뒤 손끝에 물감을 묻혀 채색을 한다. 이따금씩 그려진 그림의 상태를 음성으로 설명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이나 보조 작업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녀는 혼자서 작업을 한다.

솔라노가 단편적인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데는 모든 것을 사진 찍듯 기억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Photographic Memory)’를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 솔라노의 어린 시절에 줄곧 방에 걸려 있던 사진과 시력을 잃은 솔라노가 그려낸 작품이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한다. 솔라노는 “나는 어린 시절 수줍음이 정말 많았다”라며 “그런데 무언가를 탐구하고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고 덧붙였다.

작가 마뉴엘 솔라노가 30일 서울 종로구 소재 페레스프로젝트에서 오프닝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 이정아 기자.

전시 기간에는 작가가 어릴 적 사용한 몬테소리 교구를 활용한 퍼포먼스도 진행된다. 이날 진행된 퍼포먼스에서 솔라노는 흩어져 있는 서로 다른 크기의 몬테소리 장난감을 하나의 작은 탑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솔라노는 “30대가 됐는데도, 어린 시절 배운 감정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라며 “먼 과거의 기억이지만 오랫동안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한편 솔라노의 작품은 미국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도 영구 소장돼 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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