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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음하는 고래·위기의 치매 노인...현대사회의 오늘, 오선지에 그리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작곡가 아틀리에’
20~30대 작곡가 독창적인 음악 돋보여
최종 선발 1인은 내년부터 상주 작곡가로
2023 KNSO 작곡가 아틀리에에 선발, ‘고래’를 작곡한 조윤제(오른쪽)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신경질적인 관악기 소리가 위태롭게 뻗어나온다. 의도적인 불협과 반음, 난데없이 도약하는 음정들. ‘휘잉, 휘잉’. 고래의 신음 소리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을 검은 바다로 채색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초래된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는 현 인류가 짊어질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에 의해 고통 받는 자연의 생물들을 주제로 소리를 탐구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래’예요.” (‘고래’ 작곡가 조윤제)

고래의 고통이 악기의 파도를 타고 넘실댄다. 높이가 다른 두 음 사이를 악기들이 질주하듯 미끄러지고(글리산도 주법), 두 음을 빠르게 연주(트릴)하자, 고래의 비명이 심연을 채운다. 다비트 라일란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조윤제의 곡은 매우 탄력적이고 선명한 관현악 사운드가 장점”이라며 “때론 비실용적인 리듬을 사용하지만, 탁월한 창의성과 넘치는 상상력, 유기적인 음악적 구조로 작품을 잘 그려냈다”고 평가했다.

기후위기에 내몰린 고래, 고령화 시대의 치매 노인, 21세기 버전의 환상 교향곡…. 대범하고 재기발랄한 상상력들이 오선지에 펼쳐지자 기상천외한 ‘음악의 세계’가 그려졌다.

K-클래식의 미래를 짊어질 신진 작곡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미래 음악가 육성 사업의 일환인 ‘작곡가 아틀리에’ 2기에 발탁된 김은성(39), 김재덕(28), 노재봉(28), 이아름(34), 조윤제(33).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다섯 명의 작곡가들이 장장 10개월의 대장정을 거쳐 각자의 작품을 완성했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은 “작곡가 선발을 위해 독창성과 창의력, 오케스트레이션 능력, 똑같은 음을 새롭게 표현하는 역량을 중점적으로 봤다”고 말했다.

2023 KNSO 작곡가 아틀리에에서의 다비트 라일란트 감독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 20~30대 작곡가들의 ‘오늘의 이야기’…혁명을 일으키다

20~30대의 젊은 작곡가들의 음악은 ‘오늘의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지금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둘러싼 관심이 음악이 됐다. 다양한 주제는 시대 정신이기도 했고, 우리가 사는 현재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라일란트 감독은 “곡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이 곡이 하고자 하는 말, 이 곡이 할 수 있는 말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인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뒀다”고 귀띔했다.

노재봉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집에 가고 싶어’는 ‘고령화 시대’를 소재로 했다. 숨막힐 정도로 긴박한 한 편의 서사다. 현대음악은 어렵고 복잡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이것 자체로 다양한 상상력을 불어넣어주는 음악이다. 이야기의 소재는 치매 노인. 소리의 조각들이 기억을 잃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그린다. 치매를 겪는 당사자의 시점이 음악의 골자가 됐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노재봉은 “고령화는 모두의 앞날을 위한 중요한 논제거리이지만, 거대한 담론이 주는 무게감으로 크게 와닿지 않았다”며 “그러던 중 하나의 경험으로 이 곡을 쓰게 됐다. 클래식 음악으로 이에 대한 질문, 혹은 목소리를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곡의 강점은 설득력을 가진 ‘쉬운 음악’이라는 점이다. 조금씩 변형돼 반복하는 소리는 치매 노인의 기억 세계를 상징한다. 노재봉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피아노 소리를 원형으로 삼고, 그것을 왜곡하며 계속 등장시켜 기억을 잃는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다”며 “‘집에 가고 싶어’는 익숙한 곳에서 요양을 소망하는 이들이 힘겹게 꺼낸 한 마디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라일란트 감독은 이 곡에 대해 “매우 읽기 쉬운 음악적 구조를 띠고 있고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구성이 완벽하다. 나이를 고려할 때 큰 잠재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김재덕은 대범하고 과감한 ‘음악적 차용’을 시도했다.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를 가져온 것이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학을 시작한 2021년 7월에 유엔 제네바 본부에서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승격했다”며 “세계에서도 전례 없는 이 일을 보며 뭉클했던 기억을 담아 작곡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현대음악의 어법과 한국 장단이 조화를 이루다 애국가의 조성이 등장해 익숙함을 만들어낸다. 라일란트 감독은 “음악의 구조는 물론 국가적인 음악을 사용한 외적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칭찬했다.

2023 KNSO 작곡가 아틀리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 유리잔 연주·고무공 비비기…참신한 주법으로 새로운 소리 창조

신진 작곡가들의 음악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했다. 최신 경향이라 할 수 있는 현대적 주법들이 대거 등장해,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냈다. 최근 작곡가들이 많이 쓰는 ‘글라스 하프’ 주법도 종종 나왔다. 물 높이를 다르게 채워넣은 유리잔을 활용해 손가락 끝으로 연주하는 기법이다. 시멘트를 바를 때 쓰는 철제 도구인 흙손으로 현악기 줄을 긋는 방식이나 타악기를 고무공을 비비는 기상천외한 주법도 등장했다. 가장 많은 방식의 주법을 사용할 수 있는 타악 연주자들은 신진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에서 유달리 분주했다.

시공간의 차원에 대한 호기심을 음악으로 풀어낸 ‘아플라(aplat)’를 작곡한 이아름은 “현악기에 클립을 달면 배음들이 섞여 쇳소리처럼 들리는데, 이러한 방식을 활용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조윤제는 “자연의 사운드에 관심을 가지며 전자음악까지 공부하게 됐다”고 했다.

새내기 작곡가들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편성의 곡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작곡을 하면서 모든 악기의 소리와 그 소리의 조화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하되, 고도의 집중력으로 오선지에 풀어냈다. 그럼에도 작곡 과정에서 상상한 소리들이 완벽하게 구현되기 까지는 ‘현실적 어려움’이 따라왔다.

조윤제는 ‘플라스틱의 습격’을 받는 고래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유제품이나 생수통을 악기로 활용, 시각적 효과도 주려 했으나 음향 문제 등 여러 요인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아름은 “오케스트라 작업을 거의 해본 적이 없고, 혼자 방에서 작곡을 하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며 “소리의 압도감이 상당했고, 밸런스에 있어 상상도 못했던 부분들이 많이 드러났다. 특히 곡의 마지막 솔로에 콘트라바순을 아주 작은 소리로 내라고 적었는데,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서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2023 KNSO 작곡가 아틀리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 “작곡가 육성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오선지에 기록하는 것”

‘하나의 음표’가 음악으로 나오는 과정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만 만들어지진 않는다. 2021년 처음 시작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작곡가 아틀리에’는 신진 작곡가를 발굴, 육성하는 사업이다.

라일란트 감독은 “국립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미래 음악 인재의 양성”이라며 “우리가 가진 음악적인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의무는 우리 악단이 가진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다섯 명의 신진 작곡가들은 평가와 심사를 거쳐 한 명을 선발, 2024년부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가 된다. 이번 ‘작곡가 아틀리에’에서 멘토로 활약한 김택수 샌디에이고 주립대 교수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상주 작곡가를 거치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라일란트 감독은 새롭게 뽑힐 상주 작곡가와 함께 관객과 동시대 음악을 나누고 한국 음악을 세계 무대에서 알리기를 기대한다.

그는 “작곡가를 육성하는 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오선지에 기록하는 것과 같다”며 “작곡가의 역할은 우리가 품고 있는 사회 이슈와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동시대 작품을 소개하고, 대중을 위로하는 것이다. 상주 작곡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다시 돌아보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음악으로 전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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