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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해스님 머무른 설악산 4암자…거기 얽힌 이야기들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① 설악산 봉정암(하)
석가불사리 봉안한 성지(聖地)
내설악 절경에 숨은 4암자
곳곳마다 슬픈 이야기 간직
사찰은 불교라는 종교적 장소이면서 동시에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한국 사찰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 자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산에 오르고 사찰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전국에서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설악산 백담사의 부속암자인 봉정암입니다. 〈편집자 주〉

봉정암 대웅전 정면으로 펼쳐지는 설악산 정경
봉정암(鳳頂庵) 대웅전의 파노라마

봉정암은 백담사의 부속암자다. 석가불사리가 봉안되었다 하여 5대 ‘적멸보궁’(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법당) 하나로 꼽힌다. 매일 수백명이 찾는 불교의 성지순례지다. 644년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구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금강산을 헤매던 중 봉황새가 나타나 내설악 산정 이곳으로 안내해서 창건했다 전해진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자리에 부처의 형상을 한 거대한 석가바위도 있다. 봉황이 사라진 곳이 부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고 하여, 봉황과 부처의 이마(頂)를 합해서 봉정암으로 붙였다. 석가 바위 부근에 사리탑을 세웠다.

얼마나 많은 불자들과 산행객이 봉정암에 머물거나 지나가는지 느껴지는 공양간. 무료 커피와 음수대, 그리고 간이 의자들이 놓여있다. 11시 점심 공양시간이 한참 지나 걱정했는데 미역국에 밥 말아, 오이무침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무데나 걸터앉아 먹는 점심이지만 꿀맛이다.

깊은 산속 암자에 대한 머릿속 이미지와 달리 봉정암은 꽤 부지가 넓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깊은 산속에 몇 백 명이 숙식 가능한 암자가 있었다니 경이롭기까지 했다. 오늘은 대형 헬기가 공중에서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일용할 것들을 종무소 앞마당에 내려놓은 뒤, 인간이 산에 남긴 불필요한 것들을 잔뜩 거두고 굉음을 일으키며 산 너머로 사라져간다.

봉정암 경내. 제법 많은 건물이 모여있다.

앞마당에서 대청봉 가는 길로 몇십 계단 오르면 대웅전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 전면은 유리로 되어 멀리 설악산 암봉들이 훤하게 들어온다. 오른편엔 부부바위, 곰바위, 석가바위 등 거대한 바위들이 지키고 있다. 석가바위의 부처님 코가 유별나다.

정면엔 불사리가 모셔져 있는 산정의 5층 사리탑이 있다. 불상 역할이다. 법당과 사리탑사이 아래엔 몇 백명은 넉넉히 칼잠(?)을 잘 수 있는 숙소가 자리잡고 있다. 요사채, 공양간, 세면장 등 여러 건물들도 옹기종기 모여있다.

많은 불자들이 눈앞에 놓인 열망, 평생의 소원을 속에 품고 기도한다. 밤을 세워가며 소망하는 것들을 풀어 헤치며 목탁소리와 함께 열망들이 산사에 흩어져 나간다. 힘든 길 올라와 밤샘 기도하는 불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나는 무얼 열망하고 있나? 지혜를, 모든 이들의 행복을 기원해본다.

봉정암 불뇌보탑과 전망대
봉정암 사리탑(불뇌보탑)

봉정암 입구에 도착하면 좌측은 거대한 암석으로 꽉 차있다. 그 틈에 석가사리탑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사리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해서 ‘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사리탑 가는 200개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재물과 복을 기원하라는 ‘삼족섬’(세발달린 금두꺼비)과 산신을 봉안하는 ‘산신각’을 보게 된다. 오세암 내려가는 길도 만난다. 암반위에 곧바로 올려진 5층 사리탑이 설악의 여러 봉우리들을 발아래 두고 있다. 야간에는 사리탑이 노란 빛을 발하며 설악 백리 길을 밝게 비췄다. 한밤중에 법당에서 바라보면 사리탑만 선명히 빛난다.

등산 배낭을 옆에 두고 한 남성은 쉬지 않고 연신 절을 했다. 108배 기도를 하는 듯했다. 겨울옷으로 꽁꽁 중무장한 60대 여성 두 분도 봤다. 밤새 사리탑 앞에서 기도할 작정인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듯 기도하고 떠나가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리탑 참배 공간 뒤쪽 언덕에 오르면 확 트인 전망대가 있다. 설악의 암봉들이 발 앞에 펼쳐진다. 속초와 인제를 가르고, 외설악과 내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공룡능선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이름대로 공룡의 등이 연상된다. 우리나라 가장 으뜸의 비경으로 꼽히는 아름답고 웅장한 곳이다. 저 멀리 저 아래 조그맣게 울산바위가 보인다.

전망대 좌측으론 국가 지정문화재인 ‘용아장성’이 펼쳐진다.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20여개의 암봉들이 장성 같이 늘어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정암을 양옆으로 호위하는 듯했다. 소청대피소를 넘어가면 곧바로 대청봉을 만날 수 있다.

사리탑 앞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순해진다. 산바람 속에 잠시나마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어가는 나그네가 된양하다. 과객(過客)이기에 잠시 머물고 서둘러 다음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할 판, 깊은 산속 해는 짧기에 서둘러야 한다. 여름밤이라면 이곳에 누워 사리탑 불빛에 의존해 산기운 받으며 별과 달과(혹시 부처님도) 밤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묘미가 있을 것 같다. 봉정암을 둘러싼 비경에 반해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진 않는다.

만해 한용운을 품은 내설악의 암자들
소청봉에서 내려다 본 내설악 풍경

봉정암에서 2.4km. 2시간여 더 오르면 소청봉, 중청봉을 거처 설악산 정상 대청봉에 닿는다. 봉정암이 워낙에 깊은 산골에 있는 지라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예 세상과 단절된다. 그럼에도 이 산중엔 봉정암 외에도 여러 이야기가 깃든 암자들이 흩어져 있다.

봉정암 아래 800m 지점엔 오세암이 있다. 원래 관음암이었는데 오세동자(五歲童子)의 전설 때문에 암자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입산한 절로 알려지기도 했고 20여년 전 개봉한 영화 ‘오세암’에도 등장했다.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폭설로 돌아오지 못해 암자에 몇 달 동안 혼자 남겨져 버린 오세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살아남았다는 ‘오세암’의 전설을 통해 설악산이 얼마나 눈이 많고 고독한 겨울을 보내는지 가늠할 수 있다. (영화에선 오세동자가 관세음보살을 통해 엄마 품을 느끼며 성불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조선 초 생육신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보던 책들을 모두 태우고 머리 깎고 오세암에 입산했다고도 한다. 그때가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해 실패하자 18세에 오세암에 들어갔고 27세에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백담사와 오세암은 그렇게 만해스님과 연을 맺었다. 매년 만해기념사업이 열리고 기념관도 백담사 안에 있다. 만해는 오세암과 백담사, 영시암과 봉정암까지 4암자를 걷고 또 걸으며 ‘님의 침묵’을 완성시키지 않았을까.

백담사에서 봉정암 가는 길, 1시간 남짓 가다보면 만나는 암자가 영시암(永矢庵)이다.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김창흡이 부친이 사화에 연류되어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이후 ‘죽을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영시암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이곳에 머문 지 6년이 되던 해 일을 도와주던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그는 암자를 떠나고 절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영시암

이후 몇 번 중건 되어 봉정암과 오세암을 오르는 불자들, 대청봉을 오르는 산악인들에게 잠시 목을 축이고 쉬어가는 휴게장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염불소리는 산새소리 타고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지만 참배하는 불자는 보이지 않고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와 사탕 주변에만 옹기종기 모여 막간의 ‘쉼’을 즐기고 있다. 베풀기만 하는 영시암이다. 슬픈 역사와 연계되어 더욱 외로워 보인다.

다음을 기약하며 - 백담사와 오세암

내려오는 길은 봉정암에서 오세암길을 택하고 싶었다. 내설악의 4암자(백담사·영시암·오세암·봉정암)를 모두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너무 가파른 길이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체력적으로도 부담될 듯했다. 결국 오던 길로 내려갔다. 오세암에서 1박하고 봉정암에 오르는 분들, 봉정암에서 1박하고 오세암을 가는 분들도 꽤나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일치기로 오세암과 봉정암을 모두 들리고 산을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설화 속 오세동자를 만나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올라갈 때 지나쳤던 풍광을 내려가며 다시 한 번 눈에 담으며 속도를 좀 냈더니 영시암까지 2시간40여분이 소요됐다. 올라갈 때보다 40여분 줄였다. 이제부턴 데크길과 평탄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평이한 길이어서 더욱 재촉하는데 발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좋은 길인데 왜 이리 힘들게 느껴질까. 백담사 다리가 보이기만을 기다리며 재촉해 보지만 속도는 나지 않고 지쳐간다. 좋은 길(?)인데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었다. 우리 삶도 간혹 그런 것 같다.

백담사 내 만해 한용운 흉상

백담사에 도착해 만해기념관을 들리고 싶었는데 그냥 가야만 했다. 지친 몸이 그러라고 보챘다.

백담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애국지사 만해 한용운 선생보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에 유명세를 탔다. 신라시대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지만 8번이나 불로 소실되고 복구되면서 위치를 옮겨 다녔고 명칭 또한 바뀌었다. 기구한 절이다. 백담사라는 현재의 사찰명에도 전설이 있다. 조선중기 당시 주지승이 꿈을 꾸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터까지 웅덩이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 한다. 날이 밝아 꿈에서 들은 대로 세어보니 꼭 100개였다. 그래서 절 이름을 백담사(百潭寺)로 붙였다고 한다.

백담사 만해 축전 때, 만해 기념관도 보고 만해선사가 출가했던 오세암도 가서 오세동자를 만나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시인이자 화가 무산 조오현 스님의 흔적도 볼 수 있길 희망한다.

이른 아침

백담사 가는 길을 걸을 때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이어진 거미줄에

내가 평생 흘린 모든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왕거미 한 마리

내 눈물을 갉아버리려고 황급히 다가오다가

아침 햇살에 손을 모으고

고요히 기도하고 있었다.

〈정호승 시인 ‘거미’〉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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