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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지원만의 ‘카스타 디바’ 기대하세요”
거장 무티가 선택한 소프라노 여지원
伊언론 “풍성한 소리·입체적 연기” 극찬
오페라 ‘노르마’로 한국 무대 첫 주역
“로마 시대 이야기지만 현재와 오버랩”
▲ 소프라노 여지원이 2014년 이후 9년 만에 한국 오페라 무대에 선다. 그 사이 여지원은 세계적인 지휘자 리카르토 무티의 선택을 받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서며 유럽에서 인정받은 최정상 소프라노로 자리매김했다. [예술의전당 제공]

“소프라노의 컨디션이 안 좋아 공연을 못하게 됐는데, 급히 와줄 수 있습니까?”

지난 6월 이탈리아 남부 도시 바리의 페투루첼리 극장에서 오페라 ‘오텔로’의 연습에 한창일 때 여지원(비토리아 여·43)은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공연 시간을 4시간 30분 앞둔 오페라 ‘나비부인’의 알렉스 오예 연출과 로마 오페라 극장로부터다.

“예스(Yes)인지, 노(No)인지 빨리 선택해달라”는 다급한 목소리에 여지원은 고민 없이 “Yes!”라고 답했다. 무대에서 수없이 ‘초초’(나비부인 주인공)를 연기한 덕에 감정선을 잘 이해하고 있을 뿐더러 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원은 그 때의 감정이 여전히 생생한지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막 바리에서 기존 소프라노를 대체하기 위해 비토리아 여가 왔습니다. 이제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공연은 원래 정해진 시각보다 10여분 지체된 4시 40분에 시작됐다. 리허설도 없이 불과 4~5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페라 종주국’과도 다름 없는 이탈리아에서 올 한 해 엄청난 화제를 뿌린 ‘드라마와 같은 일’이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여지원은 “당시 알렉스 오예 연출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고, 극장에서도 몇 번이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며 웃었다. 이 인연은 또 하나의 커리어로 이어졌다. 여지원은 내년 6월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올리는 ‘오텔로’의 데스데모다로 무대에 선다.

그날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연출가 알렉스 오예(63),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69), 소프라노 여지원. 여기에 로열오페라하우스라는 ‘빅 프로덕션’이 손을 보탰다. 올 가을 ‘오페라 춘추전국’의 최고 기대작인 ‘노르마’ 이야기다.

여지원이 고국의 오페라 무대에 ‘주역’으로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4년 대구에서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의 려 역할로 한국 관객과 만났으나, 주역은 아니었다. 지난 9년간 그는 유럽에서 ‘비토리아 여’라는 이름으로 활동, ‘잘츠부르크의 디바’로 자리매김했다.

▶무명에서 ‘무티의 프리마돈나’로=“네가 왜 유학을 가?”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성악가는 아니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노래 실력으로 주목받은 가수도 아니었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도, 심지어 선생님들도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유학이라는 건 보통 한국에서 인정받은 친구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인데, 전 노래를 그리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실기 점수도 잘 나오지 않았고요. 한국에서 좋은 선생님께 배웠지만, 제 소리를 펼치진 못했어요.”

가슴 깊이 쌓인 갈증을 덜기 위한 선택이 누군가에겐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여지원은 당시를 떠올리며 “죽기 전에 내 목소리 한 번은 내보고 싶었다”며 “이게 내 목소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그만 두더라도 한이 덜 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난 2005년 유학길에 오른 이유였다.

이탈리아 모데나 음악원에서 스승으로 만난 소프라노 라이나 카바이반스카(89)는 소심한 여지원의 소리를 세상 밖으로 꺼내준 은인이다.

“네가 가진 것은 더 크고, 너만의 존재감이 있으니 자신감을 가지라는 이야기가 저를 깨워줬어요. 어딘가에 갇혀 나오지 못했고, 한국에선 늘 웅크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과 만나 한 걸음씩 가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인생의 전환점’은 리카르토 무티(82)와의 만남이었다. 2015년 세계적인 거장 무티에게 발탁돼 ‘에르나니’의 엘라비 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서 데뷔했다. 2년 후엔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의 주역으로 다시 이 무대에 섰다. 한국인 소프라노가 잘츠부르크의 주역이 된 건 여지원이 처음이었다. 그가 ‘무티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이유다. 자신의 이름처럼 ‘승리의 여신’이 됐다.

해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유수 악단과 함께 하는 여지원은 고국에서도 마침내 주역으로 서게 됐다. 이쯤하면 금의환향이라 할만 하다.

여지원은 “한국에 오니 참 좋다”며 “내 나라인 데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관객들에게 이탈리아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노래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너무나 좋다”고 말했다.

▶“최고의 ‘카스타 디바’를 만드는 게 목표”=빈첸초 벨리니(1801~1835)의 ‘노르마’는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소프라노에게 요구되는 가창력과 기교의 수준이 높다. 이번 오페라의 지휘를 맡은 로베르토 아바도는 “‘노르마’는 굉장히 어렵다. 한국에선 딱 한 번 공연된 걸로 알고 있다”며 “이 노래를 제대로 해줄 수 있는 완벽하고 놀라운 가수가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그간 ‘노르마’를 만들어온 ‘최고의 디바’는 전설적인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 몽세라 카바예였다.

여지원은 2019년 이탈리아 라벤나 페스티벌에 이어 ‘노르마’와 두 번째 만남이다. 당시엔 리카르토 무티의 아내인 크리스티나 무티 연출로 무대에 섰다. 그는 “‘노르마’는 감정을 억제하며 노래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 굉장히 어려운 오페라”라고 평했다.

이탈리아 현지 언론들이 “풍성한 소리로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고 평가하는 여지원은 이번 무대를 통해 ‘여지원만의 카스타 디바(정결한 여신이여)’를 만들어 낼 생각이다. 노르마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아리아다. 여지원은 ‘카스타 디바’에 대해 “무섭고 겁이 나는 노래”라고 했다.

“반주는 최소한이고 목소리만 들리는데, 노래가 굉장히 길어요. 관객들은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죠.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도 커요. 마리아 칼라스는 언제나 ‘노르마’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고, 몽세라 카바예의 표현은 공부가 됐어요. 거기에 저의 해석을 덧대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누르고 평화로운 듯 부르려고 해요.”

‘노르마’는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조국의 원수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고,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여사제 노르마는 나라와 종교 안에서 삶을 내던지는 주인공이다. 그는 “로마 시대 여사제의 이야기지만, 2023년에도 일어날 법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작품은 현대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접근, 관객에게 작품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던진다.

“노르마는 정해진 규범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강요받으며 키워졌다가 속박에서 튀어나간 삶을 발견한 사람이에요. 노르마가 겪는 감정의 혼란을 따라가면 재밌게 볼 수 있어요. 그 안엔 우정과 희생이 있고,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삼각관계도 있어요.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결국 종교도 규범도 극단적인 믿음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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