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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 깬 ‘지휘 거장’, “하마스 침공은 테러리즘…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인터뷰] 
세계적인 지휘 거장 비치코프 첫 내한
“하마스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테러리즘”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체코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음악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진작에 바꿨을 거예요.”

참혹한 시대엔 음악도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무고한 사람들은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린다. ‘행동하는 음악가’에게 오늘의 세계는 너무도 참담했다. 그가 긴 ‘침묵’을 깼다. 생애 처음으로 밟은 한국 땅에서다.

“그동안 전 이 전쟁에 대해 침묵으로 입장을 밝혀왔어요. 하지만 우리가 가져가야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에요. 수 세기의 역사 안에서 불의와 폭력, 억압, 절망의 경험에 대한 감정은 같으니까요.”

동유럽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악단 체코필하모닉을 이끄는 세계적인 ‘지휘 거장’ 세묜 비치코프(71)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에 대해 입을 뗐다. 공연을 하루 앞둔 지난 23일 오전 한국에 도착, 이날 오후 서울 삼성동 파르나스 호텔에서 만난 그는 “2주 전 하마스가 저지른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테러리즘”이라고 말했다.

냉전 시대 구 소련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 비치코프는 삶의 한복판에서 ‘전쟁의 비극’을 목도했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그의 외가는 나치에 의해 몰살됐고,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었다. 어머지는 나치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살아남았다. 비치코프의 시간이 쌓아온 배경은 인류의 상흔 앞에서 그를 언제나 동시대로 향하게 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틀째 되는 날엔 “악(EVIL) 앞에서의 침묵은 악과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규모 학살”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내기도 했다.

체코필하모닉의 수장인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비치코프는 신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는 “하마스의 침공은 군대와 군대 간의 전쟁이 아니다. 무장한 군인이 작은 마을에 가서 보이는 대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했다”며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인질로 잡는 행위는 동물도 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 인질을 잡는 것은 겁쟁이들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협상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치코프는 그간 말을 아낀 것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양측은 모두 감정이 격앙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2주 전 일어난 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오랜 역사는 분리해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었다.

“긴 역사를 볼 때 갈 곳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들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해봐야 해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음악가로 일평생을 살아온 비치코프는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금과옥조’를 깬 ‘발언하는 예술가’다. 하지만 그의 입은 ‘정치적 발언’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의 존엄과 실존 문제,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인다.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크린으로 현재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봤어요. 흑해를 지나고 있었고, 한쪽에는 (크림반도) 세바스토폴이, 다른 한쪽에는 튀르키예가 있더라고요. 아내에게 ‘비행기 안은 이토록 평화로운데, 지금 저 아래는 극악무도한 폭력이 가득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도대체 왜 사람들이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에 잠기더라고요.”

인터뷰 말미, 비치코프는 “다시 한 번 민감했던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희생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희생자들의 고통을 똑같이 공감한다”며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다른 국가에서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비극을 기뻐하는 것을 봤다.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좋아하는 것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며 참담해했다.

체코필하모닉의 수장인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비치코프가 이끄는 체코필의 내한은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 공연이다. 일정이 확정된 이후 각종 클래식 커뮤니티에선 비치코프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높은 기대감을 전했다. 그는 “그동안 한국에 올 기회는 없었지만 많은 한국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고 만나며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며 “한국 관객들이 어떨지 너무 궁금하고 흥분된다. 이런 기대를 품어줄지 몰랐는데, 정말 감동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건강도 아주 좋다”며 웃었다.

2018년부터 체코필을 이끈 비치코프는 단원들에게 ‘대디’로 불린다. 2017년 체코필을 오래도록 지휘한 벨로홀라베크가 타계한 뒤, 슬픔에 빠졌던 단원들이 비치코프가 이끈 공연에 감동해 그에게 “우리의 대디가 되어달라”고 요청한 일화는 음악계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체코필의 음악감독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며 악장이 단원들에게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주고, 우리의 아빠가 돼달라고 말했다”며 “어떻게 124명의 고아를 놔두고 거절할 수 있겠냐”고 했다.

내한 무대에선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보르자크의 작품으로만 꾸민다. ‘사육제 서곡’, ‘피아노 협주곡 G단조’(후지타 마오 협연), ‘교향곡 7번’을 거장의 지휘로 들을 수 있는 기회다. 참담한 시대에 마주하는 음악은 그것 자체로 위안이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음악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어요. 훌륭한 음악은 그것을 듣는 순간 우리의 내면에 작용해요. 연주회가 끝난 뒤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시간이 내면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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