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를 소재로 삶·용서 등을 다뤄
김풍년 연출가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세상’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를 던진다. “누룩이 익어 술이 되는 과정”을 보며 연극 ‘누룩의 시간’이 태어났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 애벌레를 보며 ‘터키행진곡’을 써내려갔다. “무림의 고수를 찾아 싸움의 방식을 배우는” 연극 ‘싸움의 기술 : 졸 2.0’에선 장기판에 앉은 뒷방 늙은이들을 다룬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작고 미천한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서캐’(‘강릉서캐타령’), 혹은 ‘누룩’(‘누룩의 시간’), 아니면 ‘애벌레’(‘터키행진곡’) 같은 것들.
“한 여름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었어요. 빨리 버스를 잡아야 하는데, 애벌레 한 마리가 있더라고요. 아스팔트에서 태어난 애벌레는 그곳을 탈출해 더 뜨거운 석양으로 뛰어들어요. 그래, 너는 나비가 돼 날아라. 그렇게 생각했어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세상’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누룩이 익어 술이 되는 과정”을 보며 연극 ‘누룩의 시간’이 태어났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 애벌레를 보며 ‘터키행진곡’을 써내려갔다. ‘터키행진곡’은 2022년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받았다.
201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경험한 머릿니의 투쟁이 창극 ‘강릉서캐타령’(2022)으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에선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거대한 세계로 던져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블랙홀에 던져진 하찮은 존재들의 삶은 치열하고 성실하다.
김풍년 연출가의 시선은 이제 장기판으로 향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협력 예술가로 선정돼 선보인 연극 ‘싸움의 기술 : ‘졸’ 2.0’. 지난 6월 초연 이후, 다시 막을 올리며 ‘버전업’ 됐다. 이 작품은 김풍년 연출가의 ‘싸움 시리즈’다. 무림의 고수를 찾아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이야기다.
‘의외의 장소’에서 김풍년 연출가와 만났다. 서울 송파구의 한 카페. 그는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만난 것은 뜬금없는 일”이라며 “우연과 불확실성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그 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조우하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무대에 담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 단체 작당모의를 이끄는 김풍년 연출이 담아내는 세상은 작고 특별하다. 누군가에겐 너무도 미미한 존재들이 주인공이 돼 자신들의 세상에서 살고 죽는다.
“도정일 작가의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는 산문집이 있어요. 책의 제목에 굉장히 많이 공감해요. 그런 것들은 가성비가 좋고, 조금만 잘해줘도 마음을 다 내어줘요. 가진 것 없고, 기댈 데 없는 그들이 가진 상상도 못할 정도의 이야기, 용서와 넉넉함이 있어요.”
연극 ‘싸움의 기술:‘졸’ 2.0’ [옥상훈 작가 제공] |
‘싸움의 기술:‘졸’ 2.0’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태어났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사람은 바로 김 연출의 할머니. 그는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한글을 배웠는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했다. 그런데 진척이 없었다. 미나리, 고구마, 어머니와 같은 받침이 없는 단어만 적었다”며 “할머니는 그래도 꾸준히 공부했다.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어 늘 답답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이긴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연극은 ‘장기판의 고수들’을 소환한다. 어쩌면 ‘뒷방 늙은이’이기도 한 무림 고수들. 탑골공원은 한 때 김 연출의 놀이터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다. 그는 “내무반(작당모의)에 장기 고수가 한 명 있어 초반엔 함께 다니며 장기 두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장기’를 둘 줄도 모르면서 장기를 가져온 연극은 각지의 ‘장기 고수’들을 관객으로 불러왔다. 싸움은 공연 이후에도 이어졌다. “저긴 저렇게 하는 게 아니다”는 보수파와 “연극적 뉘앙스로 이해해야 한다”는 온건파의 유쾌한 말승부도 나왔다. 김 연출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보려고 물리학 강의까지 들을 필요는 없는 것처럼 장기를 몰라도 연극은 충분히 볼 수 있다”고 웃었다.
무대는 장기 대국에 ‘생존의 기술’과도 같은 해설을 덧대며, ‘싸움의 기술’을 풀어낸다. 김 연출의 작품엔 언제나 ‘삶의 철학’이 있다. 장기판 앞에 앉은 뒷방 늙은이들이 살아온 시간도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이유로 “뒷방 늙은이라 폄하됐던 이들을 향한 헌사”라고 한다.
그는 “뒷방 늙은이들은 죽지 않고, 장기판을 펼쳐 길을 찾는다”며 “장기판을 펼치는 순간 이들은 전사가 된다. 그들에게 장기판은 오늘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싸움의 기술’ 끝엔 ‘용서’를 마주한다. “싸움은 가진 자가 피칠갑해 무력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연극 ‘싸움의 기술:‘졸’ 2.0’ [옥상훈 작가 제공] |
무대 밖 김 연출의 ‘싸움의 기술’은 ‘묵묵한 성실함’이다. 그는 “극작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극본 작업은 오래 걸린다”며 스스로 “산만하고, 불안하고,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종종 “내 작품은 후지다”고 생각하고, “어제는 너무 안 써졌는데, 오늘은 잘 써지는 날”을 반복한다. ‘오늘의 필력’은 ‘어제의 방황’의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다.
정답이 없는 길을 가기에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규정할 수 없다. 그는 “이 산을 올랐다가 이 산이 아니면, 다시 저 산으로 향한다”고 말했다. 그 길 위에서 질투와 경외의 대상들을 만난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지문을 쓰는 작가들의 글을 흉내 내려다 실패하고, 그 위에서 다시 “나의 것들을 다져간다”고 한다. 김훈 작가가 너무 멋져 “여름이면 오이지를 먹는” 그처럼, 김 연출도 여름엔 오이지를 담그지만, “맛은 되게 이상하다”고 말한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주목받지 않아도 성실하게 버텨온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을 위한 ‘찬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도 흥미롭다. 무대엔 김 연출가의 방대한 관심사가 소소하고 아기자기하게 자리한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과 판소리 ‘심청가’를 넘나들고, 기발하고 귀여운 소재와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장기판 승부에 이어 연작이 될 ‘싸움의 기술’은 고수들이 ‘이기는 법’을 알려주는 무대가 아니다. 싸움판인 세상에서 찾아내는 이 ‘기술’은 결국 ‘사는 기술’이다.
“산다는 것은 싸워야 하는 일이에요. 어제의 나와 싸우고, 오늘의 나, 내일의 나와 싸우는 거죠. 어제는 웅크려 있었지만, 오늘은 즐거움과 소중함을 찾아 나를 다독이는 거죠. 싸운다는 건 내 삶을 잘 살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일이에요. 예쁘게 옷을 입고, 칭찬해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 그것을 폄하하지 않으며 오늘을 사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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