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작은거인’ 김수철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은 45년 음악 인생의 첫 전시” [인터뷰]
오는 1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
“우리 정신 담은 국악 널리 알리고 싶다”

싱어송라이터 김수철이 데뷔 45주년을 맞아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선보인다. 국악의 현대화, 대중화를 위해 뜨거운 사명감으로 평생을 바친 그가 오래 품은 꿈을 펼치는 자리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돌이켜 보면 ‘도전의 역사’였다. 무수히 많은 실패가 쌓아올린 ‘성공의 열매’였다. ‘거치른 벌판’(‘젊은 그대’ 중)을 달려 아득하기만 한 ‘일곱 색깔 무지개’를 찾아 헤매던 ‘작은 거인’ 김수철(66)의 음악은 언제나 ‘누구도 가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사람들은 성공한 결과를 기억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과정이에요. 그 안엔 13년의 실패가 있었고, 그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1978년 데뷔해 어느덧 45년. 무려 40장의 음반을 냈다. 누군가는 그를 ‘불세출의 천재’로, 또 누군가는 기타 메고 뛰어오르는 괴짜로 기억한다. 90년대생들은 그를 ‘슈퍼보드 아저씨’로 기억하기도 한다. 당시 아이들의 최애 만화 시리즈였던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가를 만들어서다. 45년간 세대를 넘나들며 대한민국 곳곳에 그의 음악이 있었다. 그는 “음악 작업을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고 했다. “JTBC ‘뉴스룸’ 보시나요? 그것도 제가 했어요.(웃음)”

녹슬지 않고 가동하는 ‘음악 공장’을 이끄는 동안에도, 그의 가슴엔 잠들지 않는 거인이 살았다. 15년간 놓지 않은 ‘하나의 꿈’이 있었다. 최근 서울 헤럴드경제 사옥에서 만난 그는 “동서양 오케스트라 100명을 모아 공연하고자 했던 꿈을 이제야 이룬다”고 말했다. 오는 11일 ‘김수철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세종문화회관) 무대다.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이자, 1980년 ‘국악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집대성한 ‘국악 현대화’ 작업을 보여주는 자리다.

40여년 묵묵한 '국악 사랑'…앨범 40여장 중 25장이 국악앨범

국악과의 ‘운명 같은 만남’은 40여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다. 1980년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난타’를 만든 송승환이 제 친구예요. 그 때 송승환을 비롯해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독립영화 ‘탈’을 만들어 프랑스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했어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한 단면을 담으며 영화음악에 제대로 된 국악을 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당시의 아쉬움은 국악을 시작한 동기가 됐다. 국악을 하고 싶었는데, “국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부끄러움은 그를 ‘탐구의 길’로 이끌었다. 국악에 대한 탐구는 특별한 방법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교과서를 뒤적이는 것을 시작으로, 한 발 한 발 묵묵히 국악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런데 음악 교과서를 다 뒤져도 국악은 없더라고요. 이미 그 때도 없었는데, 최근에 또 음악 교과서에서 빠진다는 논의가 나오니 참…”

불청객 같은 근심이 그의 얼굴로 문득 찾아왔다. 우리나라의 음악 교육이 ‘서양음악 위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1980년에도, 여전히 우리 음악이 홀대받는 지금도 김수철에겐 모두 안타까운 순간이다.

국악에 대한 관심은 이미 컸지만, 음악의 세계로 푹 빠지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수면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에게 국악은 ‘졸린 음악’이었다. 그러다 들었던 거문고 소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이었다. 전통의 음악에 매료되자, 걷잡을 수 없이 빠졌다.

그는 “국악은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며 “우리 소리가 이렇게 감동적이고 다양하다는 점에 매료됐다.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다. 내겐 국악이 그렇다”고 말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1년 뒤, 국내 최초의 ‘국악가요’가 등장했다. ‘작은 거인’ 앨범에 실린 ‘별리’였다. ‘국악가요’라는 장르도 그가 만들었다.

김수철은 “국악은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며 “우리 소리가 이렇게 감동적이고 다양하다는 점에 매료됐다.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없다. 내겐 국악이 그렇다”고 했다. 임세준 기자

“국악을 비롯해 전통 문화를 현대화하는 작업은 사실 어려운 일이에요. 40여 년을 했지만, 그건 지금도 힘들어요. 특히 국악은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특색있게 바꾸는 지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죠. 전통의 장르를 현대화하기 위해선 다른 장르 속에 있는 국악을 찾아 끊임없이 증명의 과정을 거쳐야 해요.”

김수철의 ‘국악 현대화’ 작업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증명하며 해답을 찾는 과정과도 같았다. 끊임없이 실험하고 실패하며, 실패 속에서 새로운 답을 찾았다. 지금까지 내놓은 40여장의 앨범 중 가요 앨범은 12장밖에 되지 않는다. 25장이 무려 국악앨범이다. 그 과정에서 국악가요, 국악 클래식, 국악의 현대음악화, 국악 뉴에이지, 기타산조 등 다섯 가지 장르가 탄생했다. 가요 앨범이나 다른 작업으로 돈을 벌면 그 돈을 다시 국악 앨범으로 투자했다. 흥행과 참패를 반복한 것이 그의 음악 여정이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기에, 그는 언제나 선구자였다.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장르를 개척했기에, 모두가 의문 부호부터 먼저 던졌다.

그는 “당시엔 장르의 구분이 엄격했지만, 내 안의 경계는 없었다”고 말했다. ‘탈장르 음악인’의 세계엔 ‘장벽’이 없었다.

“장벽이라는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새로움에 도전하고 실험적인 것을 시도할 땐 무엇이든지 어려움이 있어요.” 그럼에도 경계를 넘는 데에 두려움은 없었다. 하나의 음악을 만들기까지는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엔 연연하지 않았다. 후회도 상실도 없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그는 “누군가는 날더러 기인이니 천재니 할 수 있지만, 난 그저 나의 음악을 좋아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며 “대중의 사랑과 인기를 좇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하다 보니 실험적인 음악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서편제’의 엄청난 성공으로 영화 주제곡(OST) 음반이 당시 100만장 이상 팔려나가는 신드롬이 일었다. 이 음반에 담긴 ‘천년학’과 ‘소리길’은 ‘아리랑’ 다음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우리 소리라고 그는 자부한다. 김수철은 “‘서편제’의 성공 이전 13년 간 망했던 시간이 있었고, ‘서편제’ 역시 누구도 성공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국악은 ‘익숙하지 않아 듣기에 어려운 곡’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이 국악을 힘들어하는 것은 편안한 음악이 아니어서 그래요. 거장들이 그린 명화의 가치가 심플함에서 나오듯 명곡도 단순한 멜로디에서 최고의 음악이 나와요. 국악 공부를 시작하고, 대중화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쉬운 해석’, ‘단순한 접근’이였어요.”

지금도 전통음악의 현대화 작업은 한창이다. ‘전통의 세계’에서 외길을 걸어온 젊은 음악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도가 나오고 있다. 한국인조차 생경한 주술 같은 노랫말(악단광칠)로 세계를 사로잡고, 판소리와 팝을 접목(이날치)하기도 하고, 민요에 팝을 더해 ‘조선팝’(이희문)이라는 장르도 탄생시켰다. 1980년대 김수철을 필두로 한 실험과 도전이 날개를 펴 대중 안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방탄소년단 슈가는 ‘대취타’를 랩에 더해 전 세계에 ‘대취타 검색 열풍’을 몰고오기도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소리를 다양하게 들려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요. 국악의 현대화가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후배들의 도전과 실험은 격려해주고 싶어요. 다만 공부는 필요해요. 아이디어로 치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공부로 정면승부 해야죠. 공부를 하다 보면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요.”

‘오랜 꿈’ 동서양 오케스트라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소리의 향연”

동서양 오케스트라와의 만남은 오래 품은 꿈이었다. 다만 꿈으로 향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 막대한 제작비는 거침없는 거인의 발목을 잡았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문을 두드렸다.

김수철은 “사실 공연에 대한 꿈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공연의 규모가 크다 보니 후원해줄 여러 기업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기다린 응답은 없었다. ‘비주류 장르’에 대한 편견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모두가 알 만한 기업들을 찾아갔지만, 전부 거절 당했어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 후원은 돈이 되는 곳에만 모이더라고요.”

결국 자비를 들여 공연을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 공연은 극적으로 성사됐다. 김수철이 직접 세종문화회관에 제안했고, 세종 측에선 흔쾌히 받아들여 ‘공동 주최’하게 됐다. 재정난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포기할 뻔 했던 무대는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는 “인기와 관계없이 실험적인 음악을 해오면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공부도 하고 음악도 계속 할 수 있었다”며 “은혜를 갚고 보답하는 마음을 담은 공연으로, 영리 목적은 아니다. 환경미화원, 소방관 등 우리 사회의 힘든 곳에서 일하는 분들을 초대해 절반은 무료, 절반은 유료 공연으로 열 것”이라고 했다.

100인조 동서양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국악 공연은 김수철이 오래 품은 꿈이었다. 그는 “대중적 인기와 관계없이 실험적인 음악을 해오면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공부도 하고 음악도 계속 할 수 있었다”며 “은혜를 갚고 보답하는 마음을 담은 공연”이라고 했다. 임세준 기자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였지만 그는 ‘감개무량’이라거나, ‘감회가 남다르다’는 상투적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해온 일을 풀어놓는 자리라고 했다.

“이번 공연은 1000점의 작품을 그린 화가가 여는 첫 전시와도 같아요. 1000점 중 몇 백 점을 선보여 인정을 받으면 다음 작품을 다시 선보일 수 있고, 또 다른 작업을 하는 시간을 선물해주겠죠.”

고민도 많아 보였다. ‘결전의 날’이 다가올수록 그의 머릿속엔 무수히 많은 악기들의 소리와 그동안 악보를 채운 음표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공연은 시대를 초월한 ‘실험적 음악’과 ‘국악 대중화’를 위해 내놓은 그의 음악들을 라이브 연주로 선보이는 자리다. 음반에만 담겨있던 음악들을 세계 최초로 꺼내는 자리다. 당시 이 음악들을 녹음하기 위해 그는 “국악기의 소리를 서양 녹음 방식으로 담을 수 없어 가장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해 녹음했다”고 말했다. 까다로운 감각으로 다듬은 최적의 사운드를 들려주기 위해 동서양 타악기도 60개나 제작했다.

코리아모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 가야금, 아쟁, 피리, 대금은 물론 자체 제작한 타악기를 더한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오는 11일 그가 진두지휘한다. 그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편성과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1부에선 한 ‘팔만대장경’을 비롯해 영화 ‘서편제’의 주제가 ‘천년학’과 ‘소리길’, 88서울올림픽 주제곡 ‘도약’, 2002년 한일월드컵 주제곡을 들려준다. 2부에선 김수철의 인기곡을 양희은, 백지영, 이적, 성시경, 화사 등 동료 가수들이 출연해 선보인다. 그는 “모두 내가 좋아하는 선후배 가수들인데, 흔쾌히 오케이해줘 노 개런티로 출연한다”고 귀띔했다.

“전 세계가 K-팝, K-컬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스포츠, 영화, K-팝이 세계를 재패했지만 순수 우리 문화는 아직 그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봐요. 대중예술은 유행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순수예술은 시간이 흘러도 남아있죠. 우리 청소년들이 긍지를 가질 만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의 정신이 담긴 문화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