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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함 덜어낸 ‘심청가’…온전히 돋보인 소리와 소리꾼 [고승희의 리와인드]
10월 1일 폐막·국립창극단 ‘심청가’
화려한 연출 빠진 단출한 무대  
판소리의 본질 온전히 보여줘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로구나.”

심청의 여정이 구슬프다.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하는 열다섯 소녀의 마음에 비애가 쌓여만 간다. 깊고 검은 바다 한가운데 다다르자 애달픈 진양조 가락에 한이 서리고, 망망대해로 유유히 펼쳐지는 해안의 절경은 압권이라 야속하다. 애처로운 마음들이 쌓여 소리에 소리를 얹고, 웅장한 합창이 된 슬픈 소리가 애꿎은 치맛자락을 잡는다. “저기 가는 심소저야, 슬픔 말을 듣고 가라. 천추에 깊은 한을 하소할 곳 없었더니 오늘날 출천대효 너를 보니 오죽이나 음전허야.”

‘심청가’가 돌아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그 이야기’다. 영화, 연극, 발레를 통해 무수히 많은 변주를 만들어낸 ‘심청’은 이번엔 ‘전통의 얼굴’을 하고 무대에 섰다. 국립창극단의 창극으로다. 국립창극단에선 지난 2018년 초연으로 ‘심청가’를 선보였고, 2019년 재연 이후 4년 만에 다시 소환했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전통과 진화 사이의 줄다리기

지난 몇 년 사이 국립창극단의 색깔은 보존과 진화의 줄다리기를 이어왔다. 오랜 시간 이어온 긴 작업들은 성공적이었다. 전통 창극이 가진 고유의 색과 본질을 지키면서도, 동시대 창극으로 호흡하기 위해 ‘창극’의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작업을 시도했다. 올해 선보인 작품들은 국립창극단의 도약을 보여줬다. 무수히 많은 도전과 실험이 궤도에 올라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들었고, 창극 무대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콘텐츠라는 점을 확인한 작품들이 나왔다.

올초 여성국극단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인기 웹툰 ‘정년이’는 창극단 간판 스타인 이소연 조유아를 더블 캐스팅하며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정년이’는 창극이 전통 장르에만 갇힌 것이 아닌 연극, 뮤지컬과 함께 경쟁력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로 자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셰익스피어 희극 ‘베니스의 상인’을 각색한 ‘베니스의 상인들’을 통해 공연계 스타 창작진(연출 이성열, 극본 김은성, 작창 한승석, 작곡 원일)이 총출동해 ‘한국형 뮤지컬’로의 진화를 보여줬다.

2023년 세 번째 작품은 ‘심청가’라는 점에도 흥미롭다. 이 작품은 출발부터가 달랐다. 뮤지컬 무대를 압도하는 화려한 연출도, 전통 소리에 현대적인 기법과 서양 악기가 더해진 파격적인 음악도 없었다. 오로지 ‘창극의 본질’을 보여줄 작품이면서, 전통의 색채를 담아낸 무대로 ‘심청가’를 불러왔다. 도전과 실험이라는 키워드가 잘 어울렸던 국립창극단은 그간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겉치레를 덜어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심청가’는 단출하고 군더더기 없는 무대로 시작했다. 그간 국립창극단이 습관처럼 선보였던 ‘첫 신’과도 차별화됐다. 국립창극단 다수의 작품은 매번 연출자가 달랐음에도 공통점이 나왔다. 등장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압도적인 웅장함을 보여주는 합창 무대를 선보인다는 것이다. 관객을 ‘창극의 세계’로 이끄는 듯한 압도적 도입부는 상투적일지라도 창극이 낯선 관객들에겐 워밍업 같은 순간이었다.

반면 ‘심청가’는 극의 시작부터 경계가 모호했다. 이 무대의 독특한 특징은 무대와 객석에서 조명의 구분이 없다는 데에서 시작됐다.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거나,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때를 제외하곤 객석에도 조명이 환히 밝혀졌다. 마당놀이가 무대와 객석의 구분 없이 하나로 아우르는 것처럼, 창극은 배우와 관객의 경계를 두지 않고 이들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국립창극단이 ‘심청가’ 공연과 함께 ‘추임새 클래스’를 따로 연 것도 이러한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단출한 무대, 소리와 소리꾼을 위한 창극

무대는 자연스럽게 어느 고장의 여염집으로 향했다. 심봉사 부녀가 살고 있는 그 곳이다. 유난히 화사한 무대엔 단단한 나무 소재의 평상이 심청의 집을 상징한다. 장면이 바뀌어 심봉사가 빠지게 되는 개울가로 네모난 징검다리가 놓이기도 하고, 심청이 뛰어내려야 하는 인당수로 향하는 커다란 뱃머리가 되기도 한다. 단출한 무대가 보여주는 연극적 상상력은 고전이 품은 매력을 배가시켰다. 무대의 양옆으로 어른의 키보다 조금 높은 담장 너머엔 심봉사 부녀의 이야기를 엿보며 공감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관객의 역할이다.

이번 ‘심청가’는 총 5시간 분량의 ‘강산제 심청가’의 전체 사설 중 핵심만 추려 2시간으로 압축했다. 가장 염두한 것은 판소리의 기본 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연출을 맡은 손진책은 이 작품에 대해 “판소리의 근본 틀을 바꾸지 않고 소리가 두드러질 수 있도록 내용을 감추고 축약하고 생략했다”며 “가장 좋은 소리를 건드리지 않고 강산제 소리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연출의 방향성은 적중했다. 2시간 분량의 창극에선 국립창극단의 수준 높은 실력과 판소리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무대 뒷편엔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 피리 등 국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자리했고, 무대 앞엔 ‘판소리’의 음악적 특징을 강조하듯 고수가 앉아있었다. 창극 배우들이 홀로 소리를 할 땐 고수의 장단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부각했고, 그러다가도 적재적소에 ‘합창’을 쌓아 판소리가 가진 ‘소리의 힘’을 증폭시켰다. 이 무대에선 사람의 소리가 가장 화려한 악기였다. 범피중류 장면에선 심청의 구슬픈 소리가 선원들의 중저음 소리 위로 쌓여 비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가 됐다. 혼자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는 소리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하며 시너지를 발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우들이 쏟아내는 극적인 소리들은 ‘판소리 소품’을 만나는 것처럼 존재감이 강렬했다. 각각의 장면들을 따로 떼놓아도 하나의 작품이 될 정도로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었다. 해설자 역할을 하는 도창은 극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극의 분위기까지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줬다. 20대부터 심봉사를 도맡았던 유태평양은 4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 한층 농익은 심학규가 됐다. 그의 표정과 살며시 감은 눈의 무게는 봉사 심학규를 생생히 되살렸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계면조가 빚어낸 애절한 정서가 지배적인 ‘심청가’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꾸는 주인공도 있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심청가’는 해학보다는 장엄미가 더 큰 작품이라 시종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진다. 때문에 이 장면들은 더 귀하다. 국립창극단의 모든 작품마다 ‘신 스틸러’ 역할을 하고 있는 조유아다. 조유아가 연기한 뺑덕의 등장 장면은 고작 10분이 되지 않지만, 뺑덕의 기막힌 행실을 능청스럽게 들려주는 조유아 덕에 관객석에 웃음 바이러스가 퍼진다. 연기력도 압권이다. 심봉사와 함께 하면서도 만나는 사내마다 지분거리다 못해 고수부터 이웃집 남정네까지 유혹하는 ‘세계관 파괴자’의 모습으로 느슨한 유쾌함을 안긴다.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아쉬울 정도였다.

국립창극단 ‘심청가’ [국립극장 제공]

‘심청가’는 국립창극단의 ‘저력’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무대에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소리꾼들의 음악성, 어느 장면에서도 퍼즐처럼 맞아 들어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났다. 끊임없이 현대화를 요구받던 전통의 장르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소박하고 단출한 무대를 통해 온전히 제 가치를 입증했다. 파격과 실험으로 일군 창극의 진화를 만든 것은 국립창극단이 소리에 대한 본질을 놓지 않았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 작품은 소리와 소리꾼을 위한 무대이자 이들의 진가를 증명한 무대였으며, 그로 인해 ‘창극의 가치’가 빛을 발한 무대였다.

창극이라는 장르는 그 어느 때보다 변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쪽에선 진화를 미덕으로 여기고, 다른 한쪽에선 전통의 고수를 중요한 가치로 본다. ‘심청가’는 갈림길에 놓인 창극의 미래에 대한 답변처럼 보였다. 이 작품을 통해 ‘공존’이라는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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