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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년 만에 바뀐 강제추행죄 판단기준…대법관들도 격론
대법 전합, 강제추행죄 폭행·협박 정도 판단기준 완화
항거 곤란→불법 유형력 또는 공포심 일으킬 정도 협박
다수의견 낸 대법관들도 견해차…보충의견으로 논박
김명수 전 대법원장 퇴임 전 마지막 선고한 형사사건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과 12명의 대법관이 지난 2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 [대법원 제공]

[헤럴드경제=안대용 기자] 대법원이 판례를 변경해 강제추행죄에 규정된 ‘폭행·협박’의 판단기준이 바뀌게 된 것은 40년 만이다. 기존 판례는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에 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할 것’을 요건으로 봤다. 하지만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로 해악을 고지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로 강력할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판단기준을 완화한 것이다.

사촌동생 강제추행 혐의 A씨, 1심 징역 3년→2심 벌금 1000만원

28일 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등 혐의를 받는 A씨에 대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지난 2014년 A씨가 10대였던 사촌동생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안이다. 기본법인 형법은 강제추행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한 경우 처벌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성폭력처벌법 등 특별법도 이를 토대로 강제추행죄의 가중처벌 조항을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에 대해 대법원은 그동안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판단했다. 폭행행위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경우(기습추행형)에는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일 것을 요하지 않고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가 있는 이상 요건에 해당한다고 봤다.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수단이 된 경우(폭행·협박 선행형)에는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하는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요구된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하급심이 군사법원에서 진행됐다. 보통군사법원에서 진행된 1심은 A씨에게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고등군사법원에서 열린 2심에서 공소장 변경에 따라 A씨에 대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추행) 혐의가 추가됐다.

하지만 2심은 A씨의 물리적 힘의 행사 정도가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였다고 볼 수 없어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시간적 간격을 전제하고 있어 기습추행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위적 공소사실인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을 무죄로 판단하고, 예비적 공소사실인 위력에 의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위계 등 추행)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대법 전합, 파기환송…기존 ‘항거 곤란’ 법리 폐기
김명수 대법원장(가운데)과 대법관들이 2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앉아 있는 모습. [대법원 제공]

하지만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며 “상대방의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일반적으로 보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항거 곤란’을 기준으로 삼았던 기존 판례 법리를 폐기한 것이다. 전원합의체 재판장을 맡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과 대법관 11명의 판단이었다.

12인의 다수의견은 항거곤란을 요구하는 기존 판례 법리가 강제추행죄 범죄 구성요건에 부합하지 않고,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인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봤다.

또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 또는 협박은 형법상 폭행죄 또는 협박죄에서 정한 ‘폭행 또는 협박’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명히 정의돼야 하고, 이는 판례 법리와 재판 실무 변화에 비춰볼 때 법적 안정성 및 판결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다수의견은 “이는 종래의 판례 법리에 따른 현실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칫 성폭력범죄의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문제 인식을 토대로 형평과 정의에 합당한 형사재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으로 피해자의 항거가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을 요구하는 종래 판례 법리는 그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행위는 피해자 신체에 대해 불법한 유형력을 행사해 강제추행한 것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 판결에 논리와 경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강제추행죄의 폭행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밝혔다. 하급심이 군사법원에서 열렸지만 2021년 군사법원법이 개정되면서 향후 다시 열리는 항소심은 서울고법이 맡게 됐다.

별개의견을 낸 이동원 대법관도 이 사건에서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부분에 관해 무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해야 한다는 다수의견의 결론에는 동의한다고 밝혔다. 다만 기존 판례 법리는 여전히 타당하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이 대법관은 “종래 판례 법리는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평가된다면 강제추행죄가 성립한다는 취지이지, 구체적으로 피해자가 폭행·협박에 저항했는지 피해자가 저항에 실패하였는지 여부를 묻는 취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다수의견이 취하고 있는 ‘피해자 보호’라는 기본적인 방향성 자체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40여 년간 유지되어 온 종전 대법원판결을 변경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를 완화함으로써 형사처벌을 확대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범죄 피해자 보호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다수의견과 같이 무리한 법률해석보다는 비동의 추행죄 도입에 관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 후 국회의 입법절차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비동의 추행죄는 폭행·협박이 아니라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추행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입법이다.

다수의견 낸 대법관들도 견해차…보충의견 통해 구체화하고 반박도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들도 보충의견을 통해 더 구체적 입장을 밝히는가 하면 그에 대한 반박도 이어졌다.

안철상·노태악·천대엽·오석준·서경환 대법관은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엄격하게 제한한 종래의 해석론을 바꾸는 이상, 강제추행죄의 성립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는 강제추행죄의 ‘추행’에 대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정도에 이르는 경우로 엄격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까지 강제추행죄의 추행행위로 보게 된다면 그 처벌범위가 부당히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이러한 보충의견에 대해 민유숙·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다수의견으로 판례를 변경하면 강제추행죄 성립이 지나치게 확대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는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다수의견에 포함돼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다수의견과 실질적으로 배치되는 내용으로 보충의견으로 표명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다수의견은 강제추행죄의 폭행·협박의 의미를 명확하게 다시 정의함으로써 사실상 변화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현재의 재판현실과 종래의 판례 법리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려는 것이지 처벌범위를 부당하게 넓히려는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사건 주심인 노정희 대법관은 “성범죄를 규율하는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이나 판례법 등은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던 데에서 피해자의 ‘동의 부재(결여)’를 그 본질적 기준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며 “강간과 추행의 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유 내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피해자의 ‘동의 부재(결여)’에 있다는 점은 현행법상 범죄구성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1일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대법원 제공]
강제추행죄 폭행·협박 판단 기준 40년 만에 변경

대법원은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에 관해 1983년부터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고 한 종래 판례 법리를 40년 만에 변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판결이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이지 법 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의 쟁점이 폭행 또는 협박이 추행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경우에 대한 종래 판례 법리를 유지할 것인지 여부이고, 기습추행형 강제추행죄에 대해서는 다수 법정의견에서 쟁점으로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김 전 대법원장 퇴임식 하루 전인 21일 선고됐다. 김 전 대법원장이 전원합의체 재판장으로 참여하고 판결문에 이름을 남긴 마지막 형사사건이 됐다. 김 전 대법원장은 24일 공식 임기를 마무리했다.

한편 대검찰청 형사부는 26일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 및 내용을 적극 적용해 성폭력 사범에 엄정 대응하도록 전국 일선 검찰청에 지시했다. 다만 검찰은 이번 전합 선고 전에도 강제추행죄의 보호법익과 성폭력 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등을 고려해 실무상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의미를 보다 넓게 해석해 상대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 행사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해악 고지가 있는 경우 강제추행죄를 적용해왔다고 밝혔다. 하급심에선 이를 받아들여 유죄를 선고한 사례도 다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강제추행죄에서의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가 명확히 정립된 만큼, 새롭게 정립된 법리를 일반적·보편적으로 적극 적용해 성폭력 범죄에 엄정하게 대응하고 이를 통해 성폭력 범죄에 대한 일반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업무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dand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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