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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니스트 30명의 베토벤 ‘운명’…“韓 음악 교육의 장점과 단점의 총체”[인터뷰]
내달 4~6일 경기피아노페스티벌
피아노 15대ㆍ연주자 30명 '장관'
김대진 총장·제자 피아니스트 정지원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포함한 한예종 교수, 강사, 재학생, 졸업생 30명이 한 무대에 선다. 서른 명의 피아니스트가 15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무대다. 사진은 한예종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아노 25대로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안경 하나만 그려주세요. 그 부분은 우리 진짜 서로 보고 합시다.”

총장님의 말에 교수들과 학생들은 일제히 악보에 안경을 그려넣었다. 공연 연습 현장이 마치 ‘피아노 사관 학교’를 방불케 했다.

“자, 늘 말하지만 처음에 할 때 정말로 잘 맞아야 해요. 다시 원, 투, 쓰리, 포.”

김 총장의 신호에 ‘60개의 손’은 일제히 ‘8개의 음표’로 향했다. 천둥 같은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메운다. 피아노가 만들어 낸, 포효하는 선율 뒤로 언제 그랬냐는 듯 네 개의 손이 산뜻하게 다음 마디를 이어간다. 피아니스트 이진상과 제자 김재희(한예종 23학번)의 손이 맞물려 솔로 연주가 이어지고, 그 뒤로 다시 60개의 손이 출동을 준비하며 ‘빰. 빰, 빰’. 서른 명의 피아니스트가 15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이게 바로 ‘피아노 오케스트라’였다.

“사실 피아노는 앙상블 하기에 정말 어려운 악기예요. 현악기는 활과 줄의 저항으로 소리가 나는데, 쳐서 소리를 내야 하는 건반과 타악기는 쉽지 않죠. 세 사람에게 다 같이 박수를 치자고 해도 잘 안 맞을 거예요. (웃음)”

‘쉽지 않은 도전’이라 예상했다. 그럼에도 시작했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 예술감독을 맡은 ‘2023 경기 피아노 페스티벌’에선 그랜드 피아노 15대, 피아니스트 30명으로 이뤄진 ‘피아노 오케스트라’(10월 4일·경기아트센터)가 무대를 꾸민다.

한예종 교수들과 강사, 재학생, 졸업생 등이 총출동했다. 페스티벌의 오프닝 무대가 될 이 공연은 한예종에 초빙교수로 와있는 아서 그린 미시간 음대 교수의 쇼팽 발라드 1번을 시작으로, ‘투 핸즈’, ‘포 핸즈’(문지수·정지원·김은혜·한문경) 등 피아니스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기발한 기획’이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예술감독을 맡은 경기아트센터의 ‘2023 경기 피아노 페스티벌’의 오프닝 공연을 통해 그랜드 피아노 15대, 피아니스트 30명이 무대에 오르는 ‘피아노 오케스트라’(10월 4일·경기아트센터)를 선보인다. 김 총장은 “‘피아노 오케스트라’라는 것 자체가 독창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다른 음색이 만들어지는 만큼 솔로와 합주의 차이가 생생히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경기아트센터 제공]
완벽한 연주를 위해 필요한 것은 ‘오랜 연습’

‘페스티벌의 백미’는 피아니스트 30명이 연주하는 베토벤의 ‘운명’이다. 이 연주는 지난 3월 한예종의 3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당시 서른 명의 피아니스트가 ‘운명’ 교향곡의 4악장을 들려줬다. 이번엔 전 악장에 도전, ‘피아노 페스티벌’이라는 축제의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무대를 보여준다.

연습이 한창인 한예종에서 만난 김 총장은 “숫자 30에 맞춰 뭔가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진부한 생각과 30명의 앙상블이라는 실험 정신이 합쳐진 무대”라고 소개했다. 전 세계 여느 피아노 페스티벌을 봐도 이런 연주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연주에 함께하는 피아니스트 정지원(한예종 20학번)은 “사실 ‘운명’ 전 악장을 피아노 15대로 연주한다고 했을 때, 이게 정말 가능할지 모두가 확신이 없었다”며 웃었다.

‘완벽’을 향하는 길은 오랜 연습으로부터 나왔다. 저마다 바쁜 일정에도 10월의 무대를 위해 두 달 전인 8월 초부터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각 선생님 별, 클래스 별로 사전 연습을 진행한 뒤, 30명이 모두 모여 리허설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김 총장은 “클래스 마다 연습을 한 뒤 다 함께 모여 첫 리허설을 했다”며 “사실 첫 날은 잘 맞지도 않았는데 미국에서 온 아서 그린 교수가 ‘처음 맞춰보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맞을 수 있냐’며 놀라워했다”고 귀띔했다.

오케스트라 대형으로 배치된 15대의 피아노에서 아서 그린 교수와 이진상 교수가 김 총장의 왼쪽, 오른쪽에 자리한다. 악단의 수석 역할이다. 아서 그린 교수의 옆자리는 정지원이 앉는다. 정지원은 연습 과정을 돌아보며 “해석의 다름으로 인해 미세한 차이가 나올 수 있는 부분까지 선생님들께서 세세하게 조율해줘 체계적으로 연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피아노 25대로 연주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제공]

서른 명의 피아니스트가 모두 모인 연습 현장은 ‘미리보기’ 무대처럼 장관이다. 연주자이면서 지휘까지 겸하는 김 총장은 스물 아홉 명의 피아니스트를 진두지휘하며 때론 매섭게 때론 자상하게 연습 과정을 주물렀다. 학교 수업도, 콩쿠르 준비 과정도 아니지만, 연습실의 공기는 일순 달라진다. 김 총장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음악은 기적처럼 변화의 순간을 맞는다. 가장 강렬한 ‘운명’의 시작부터, 옆자리와의 호흡이 관건인 ‘투 핸즈’는 물론 피아니스트의 숫자가 점차 늘어갈 때마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소리가 맞아 들어갔다. 60개의 손을 통한 오차 없는 정교한 연주가 관건인 만큼 연습의 방향도 자연스럽게 ‘칼박’, ‘칼연주’로 향한다.

김 총장은 “예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 연주는 그리 예술적 성취도가 큰 음악은 아니다”면서도 “페스티벌의 방향이 피아노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것인 만큼 시도 자체가 도전적”이라고 말했다.

연주는 서로를 향한 신뢰와 연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나란히 앉은 두 연주자의 호흡과 소통은 필수다. 한 학년에 12명 밖에 되지 않는 한예종 피아노과는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만큼 친밀하다. 그럼에도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재학생 중 선배 격인 정지원이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정지원에겐 지난 한예종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스물 다섯 대의 피아노가 연주한 ‘봄의 제전’(스트라빈스키)이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었다. 그랜드 피아노 수십 대가 올라오는 공연 경험이 없어 당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하중을 염려했을 정도다. 정지원은 “고등학생 때 본 ‘봄의 제전’(스트라빈스키)을 보고 너무 멋져 이런 무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재학생 중엔 선배 위치라 후배들을 잘 독려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연습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연주회에는 ‘관전 포인트’가 많다. 30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운명’은 사실 ‘연탄곡’으로 편곡된 버전이다. 이 버전을 서른 명이 ‘밀당’하듯 들려주며 오케스트라 효과를 만든다. 정지원은 “오케스트라에 솔로도 있고, 작은 앙상블도 있는 것처럼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파트를 만들어가고 있다”며 “15대의 앙상블을 보는 재미와 피아노로는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음색이 만들어진 부분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총장은 “‘피아노 오케스트라’라는 것 자체가 독창적”이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다른 음색이 만들어지는 만큼 솔로와 합주의 차이가 생생히 다가올 것”이라고 했다.

‘피아노 오케스트라’, 韓 음악교육의 장단점 투영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무대에 오르는 순간까지 ‘피아노 오케스트라’는 그것 자체로 ‘살아있는 교육’이다. ‘피아노 축제’를 준비하면서도 김 총장의 교육관과 고민이 곳곳에 묻어났다.

김선욱(35), 손열음(37), 문지영(28), 박재홍(24)과 같은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며, 한국 클래식 음악 교육을 일군 그는 “30명의 피아니스트가 완벽한 호흡으로 맞출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한국 음악교육의 장점이자 단점이 투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고, ‘절제력 훈련’을 강화하는 교육방식은 기술적인 부분에선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지만 ‘획일화’의 우려, 개성과 창의력 부족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김 총장은 “이 연주회는 탄탄한 실력을 기반하고 있는 한국 피아니스트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교육자의 입장에선 창의력 발현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음악 교육의 현재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걸림돌이 커진 요인엔 콩쿠르 위주의 교육 방식도 있다. 그는 “연주자가 자신을 알리는 방법 가운데 가장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이 콩쿠르이지만 그것이 목표가 돼버리는 건 큰 문제”라고 했다.

모든 연습 과정이 학생들에겐 끊임없는 ‘배움의 순간’이다. 혼자 하는 연주에 익숙한 피아니스트들은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팀으로의 동질감과 유대감”을 쌓는다.

김 총장은 “솔로 악기를 다루는 피아니스트의 성향상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에는 취약한 면이 있다”며 “이러한 연주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잘 듣는 것이 핵심이다. 피아니스트에게 부족한 부분도 채워줄 수 있어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있는 시도”라고 말했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경기아트센터 제공]

피아니스트들은 옆자리, 앞자리, 뒷자리에 앉은 교수, 선후배, 동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워간다. 정지원은 “초반엔 연습을 마치고 나면 앞자리와 뒷자리의 속도가 다르거나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며 “연습을 거듭할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 점점 더 좋은 소리로 발현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신기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피아니스트들은 대체로 혼자 연주를 하다 보니, 나만의 오케스트라를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러한 앙상블을 통해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연습 내내 김 총장은 ‘처음의 중요성’을 몇 번이고 언급했다. “처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의 처음은 지나갔으니 지금의 실수를 내일은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지원은 “선생님께선 늘 무대에선 한 번의 기회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다”며 “처음, 첫 소리, 첫 기회의 중요함을 강조하시기에 저희도 늘 무대는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번뿐인 이 무대가 결국 학생들에겐 ‘교육의 장’이 되리라는 것이 김 총장의 생각이다. 그는 “연습할 때 패널티킥을 넣지 못하는 학생은 없다”며 “현장에만 가면 개미 소리를 내거나, 속도가 빨라지고 느려지는 학생도 있다. 이 다양한 성향의 아이들이 함께 하며 각자의 상황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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