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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수 엉망으로 망친다”…이신자의 작품 흐름이 ‘韓 섬유예술의 변천사’
韓 섬유예술 거장 이신자 회고전
1970년대 태피스트리 첫 소개
한국 ‘섬유예술의 거장’ 이신자 작가.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자수하는 분들이 그랬어요. 발가락으로 한 거냐고.”

지금이야 한국 ‘섬유예술의 거장’으로 추앙받지만, 50~60년대엔 누구도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화여대 ‘자수과’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나와 홍익대에서 직물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은 이신자(93) 화백은 꿋꿋이 바늘에 실을 뀄다. ‘섬유예술’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한국 미술계에 새 장르를 개척한 그는 ‘선구자’이면서 산 역사였다.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50여년간 작업한 작품은 불과 90여점. 단 한 번도 상업적 판매를 한 적도 없고 지나간 세월도 묻어나지 않은, 이 보물 같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회고전 ‘이신자, 실로 그리다’(9월 22일~2024년 2월 18일)에서다.

이신자 화백은 그의 작품처럼 건재했다. 시대를 앞서갔고,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았다. 5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세월을 거스른 ‘세련된 감각’들이 그의 곳곳에서 묻어난다. 아흔셋의 거장은 회고전을 앞두고 ‘올블랙’으로 스타일링을 하고 오래전 자신의 작품 앞에 섰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한국에선 자수한다 그러면 으레 병풍이나 방에 거는 걸 생각했어요. 자수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혼자 하고 싶은 대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자수를 엉망으로 다 망쳐놓는다고 이야기하더라고. 전공했다면 아마 이런 작업을 못했을 거예요.”

1970년대 해외에서 다양한 자수 작품을 만난 것은 일종의 ‘시각 충격’이었다. 한국에선 비단에 실로 자수를 놓는 작업이 대세였던 당시, 이신자는 전통적 섬유 대신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 등의 ‘일상의 재료’를 예술의 소재로 가져왔다. 그의 작업은 노동집약적이다. 단순히 천을 메꾸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짜고, 감고, 뽑고 엮는 다양한 방법으로 캔버스를 채웠다. 실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한 땀 한 땀’ 손으로 모든 작업을 해내야 하기에, 일생동안 남긴 작품의 숫자도 100점이 되지 않는다.

네 아이와 태양을 표현, 긍정적 의미를 담아낸 작품에 ‘노이로제’(1961)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에선 1950년대 작가의 초기작부터 2000년대 최신작, 드로잉과 사진 등 아카이브 30여점을 연대별로 살핀다. 도화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이신자 작가의 변천사가 곧 한국 섬유예술의 변천사”라고 했다.

1950년대엔 추상 회화를 보는 듯한 다채로운 색상과 조형 감각으로 기존의 틀을 벗어난 작품이 많았다. 천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크레파스나 안료를 칠하거나 아플리케(Appliqué, 무늬에 따라 여러 종류의 헝겊을 오려 붙여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기법)해 자수와 염색을 한 화면에서 선보이는 대담한 시도를 했다. 네 아이와 태양을 표현, 긍정적 의미를 담아낸 작품에 ‘노이로제’(1961)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독자적 실험 기법에 대한 당대의 냉담한 평가에 대해 일갈한 작가의 답변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이 작가는 국내에 처음으로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는 직물)’를 알렸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벽걸이’(1972)가 국내 태피스트리의 시초였다.

같은 해 제작한 태피스트리 ‘숲’은 전통적인 태피스트리의 단조로움을 피해 올 풀기 방식으로 독특한 표면의 질감을 표현했다. 면천의 씨실(가로실)을 뽑아 그 실로 원형 주변에 프릴 장식을 하고, 가운데 세 개의 원 안에 솜을 넣고 바느질해 다양한 두께의 볼륨감을 담은 ‘원의 대화 I’는 아프리카의 전통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이국적이다.

이 작품의 원은 ‘순환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오래도록 병상 생활을 한 남편 장운상 화백의 건강을 기원하는 아내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작품 역시 당대엔 냉소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고운 명주실 두고 뭐 이런 거를 하냐고. 발가락으로 했냐고 하더라”며 웃었다.

가로 19m, 무려 3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한강, 서울의 맥’(1990~1993)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 독특한 작업 방식의 작품이 등장한다. 밀가루와 풀을 섞어 작업한 ‘작품I’(1979)이다. 이 작가는 “외국에선 쌀로 많이 했는데 그걸 쓸 수 없으니 밀가루로 했다”며 “재료를 밀가루로 하니 균열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작업을 마치고 보니 쌀로 한 거랑 비슷한 균열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 작업은 최근 글로벌 최대 이슈인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에 대한 해법을 담고 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하다. 환경에 해가 되는 재료가 아닌 친환경적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1970년대 작업엔 친환경 소재가 간간이 눈에 띈다. 도화진 학예연구사는 “당시 동대문, 남대문 구제시장에서 털실 스웨터를 비롯한 독특한 재질의 옷을 사와 일일이 빨아 실을 풀어 쓰는가 하면 염색을 재활용하는 작업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 섬유미술의 개화기’로 접어든 1980년대 이 작가의 작업은 경북 울진에 살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울진 앞바다의 일출과 석양, 산과 나무의 형상을 회화처럼 담았다. 이 시기에 작가는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는 태피스트리 작업에 매진했다. 태피스트리가 그가 구현하고자 하는 회화적 분위기와 서사를 재현하는 매개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1980년대초 장 화백과의 사별 이후 붉은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다룬 ‘메아리’(1985)를 통해 깊은 상실과 절망을 표현했고, 알래스카 빙하의 모습을 담은 ‘청아’를 통해 희망의 마음을 담았다.

가로 19m, 무려 3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 ‘한강, 서울의 맥’(1990~1993)도 이 시기에 나왔다. 1994년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한강의 물줄기에 따라 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워커힐 등 서울의 다양한 랜드마크가 담겨있다. 붓이 아닌 손으로 작업한 수묵화와 같은 작품이다. 이 시기(1984~1993)의 작품들은 작가의 작업이 절정에 이른 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말 작품에서도 실험은 계속 됐다. 작가는 이 때에 또 한 번 새로운 세계를 연다. ‘화면의 재구성’을 통해 이질적인 두 물질을 표현했다. 태피스트리에 금속을 배치해 3차원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로 다룬 주제는 자연이다. 자연은 이 작가의 모든 것이 스민 ‘모태 공간’이자, 삶을 아우르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산의 정기’ 시리즈에 대해 작가는 “어린 시절 울진 앞바다에서 본 바다 풍경과 아버지 손을 잡고 오르던 산의 정기엔 파도 소리, 빛, 추억, 사랑, 이별, 이 모든 것이 스며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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