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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써주신 문장 하나하나 평생 꺼내볼게요”
취준생·직장인 생기부 몰린 까닭은
MBTI보다 더 정확·있는 그대로의 자소서
어린시절 추억·위로에 울컥, 인생 재정비
생기부 열풍 뒤엔 ‘전자정부’ 20년 역사

# “어려운 상황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개척하며 가족들과 주변 사람을 챙기고 사랑하는 진정으로 훌륭한 학생이다.” 취업준비생 정윤채(23) 씨가 꼽은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의 킬링 파트(가장 강렬한 부분)다. 정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다. ‘상담 때 지나가듯 드린 말씀을 다 기억해주셨구나’ 싶어서 놀랐다”며 “선생님에게 저는 반 학생 32명 중 1명에 불과했을 텐데 사소한 내용까지 기억해주셔서 감사했다. 선생님이 적어주신 모든 문장이 힘들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평생의 응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MZ세대에게 학교 생활기록부(생기부) 열람이 유행하며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울컥했다는 후기도 늘어나고 있다. 취업 준비 과정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열어본 생기부 속 따뜻한 시선에 용기를 얻었다는 20대부터, 잠시 직장을 쉬며 재정비의 시간을 갖던 중 위로를 받았다는 사례까지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생기부 열람 3개월만에 150만건=20일 교육부에 따르면 4세대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개통 이후 행정안전부 플랫폼 ‘정부24’를 통해 학교 생활기록부를 발급한 건수는 지난 6월 21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총 154만6408건에 달했다. 월별로 살펴보면 ▷7월 25만7615건 ▷8월 27만5051건 ▷9월 95만1211건으로, 이달 들어 특히 증가세가 가팔랐다. 지난해 7~9월 발급 건수가 46만7182건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무려 3.2배가 증가한 것이다.

통상 기업 공개채용 시즌인 4월, 9월이 되면 자기소개서 작성 등을 위해 생기부 발급 건수가 늘어나는데 특히 올해 증가세가 가파르다. 정윤지(24) 씨 또한 최근 자기소개서에 담기 위해 생기부를 발급받았다. 정씨는 “취업 준비를 오래 하다 보니 진짜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게 됐다. 생기부야말로 (내가) 꾸며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소개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열어봤다”며 “(생기부에) 반 체육대회 공연을 준비하면서 친구들 한명 한명을 찾아가 춤을 알려주고 이끌어 1등 성과를 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초·중·고교 내내 선생님들이 소외된 친구까지 챙기는 리더 역할을 잘했다는 평가를 남겨주셔서 자소서에 활용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취업준비생 구모(27) 씨는 최근 면접에서 탈락한 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생기부를 열람했다. 생기부를 보고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과 학창 시절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다. 구씨는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별명이 ‘호랑이’였다. 담임선생님으로 배정받았을 때 울었을 정도로 무서운 분이셨는데 이분이 ‘항상 밝고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고 나약한 입장의 친구들을 대변해줬다’는 문구를 쓰셨더라”며 “지금과 비교하면 달라진 모습도 있고, 그대로인 모습도 있다.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취업 준비하는 데에 힘이 됐다”고 말했다.

2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쉬고 있는 최모(26) 씨는 생기부를 보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 최 씨는 “고등학교 1학년 생기부에 적혀 있던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따뜻하다’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됐다”며 “선생님들이 생기부를 쓰실 때 진로상담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많이 반영해주셨다. 밝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장래를 스스로 기대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신민경(32) 씨는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중학교 시절 생기부를 열어봤다. 신씨는 “요즘 (성격유형검사인) MBTI보다 생기부가 정확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행”이라며 “생기부에 ‘창의력이 있고 표정이 밝다’는 내용이 있는데 지금의 저와도 많이 통한다. ‘성향이 오랫동안 바뀌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초심을 찾은 기분도 든다”고 말하며 웃었다.

온라인상에서 생활기록부 ‘인증’ 바람이 불면서 직접 학교를 찾아간 중년도 있다. 한모(51) 씨는 “인생의 다음 스텝을 준비하면서 서류를 준비하다가 생기부를 뗐다. 과거를 추억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며 “품성이 곧으며 책임과 봉사정신이 투철하다는 내용을 보고 힘을 얻었다. 나의 인생에 대한 타인의 기록을 보면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남은 인생도 살 만하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생기부 열풍 뒤엔 ‘전자정부’ 20년=생기부 열풍 뒤에는 전자정부 20년의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11월 최초로 나이스(NEIS)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전국 단위 온라인 학생 생기부 시스템 관리 체계가 마련됐다. 이전에는 각 학교에 구축된 자체 전산 시스템을 활용했다. 2003년부터 나이스에 생기부를 기록하게 되면서 2003년 이후 졸업자(1984년 이후 출생자)는 온라인을 통해 생기부를 쉽게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특히 올해는 4세대 나이스 개통과 함께 나이스와 행정안전부 민원 서비스 ‘정부 24’를 연동하면서 사용성이 크게 개선됐다. 2005년부터 ‘나이스 홈에듀민원’을 통해 온라인으로 생기부를 열람할 수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에 유행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나이스 시스템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6월부터 교육 관련 민원 서비스를 정부24와 통합해 운용하게 됐다. 사용자가 정부24를 통해 요청하면 나이스에 저장된 자료를 곧바로 받을 수 있다. 정부24는 백신 패스, 소득 확인 증명, 건강보험 자격 등 국민생활과 밀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더 친숙한 정부24에 나이스를 연동하면서 개선된 접근성이 뜻밖의 생기부 ‘열풍’으로 이어졌다.

박지영·박지영(사회팀) 기자

park.jiye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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