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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당신 존중해야 하나" 교사에 막말하는 학생들[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우리 상황을 이해해 주는 척 그만 하세요."

"왜 우리가 당신을 존중해야 하죠? 당신이 선생이니까?"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모른다고요.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당신이 내 삶을 바꾸기 위해 뭘 하고 있냐고요?"

199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롱비치의 우드로우 윌슨 고등학교 203호. 1학년 학생들은 새로 온 영어 선생님인 에린 그루웰에게 막말을 퍼붓습니다. 흑인 동급생의 튀어나온 입을 조롱하는 그림을 그린 학생을 혼내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소리치는 겁니다.

우드로우 윌슨 고등학교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학업 성취도가 최상인 엘리트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LA 폭동 이후 인종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우수 학생의 75%가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났죠. 학교엔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학생부터 발목에 위치 추적기를 단 학생 등 문제아로 낙인 찍힌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학교도 아이들을 대부분 포기했죠.

그루웰은 달랐습니다.

"텔레비전에서 LA폭동을 보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에 법대를 지원할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변호사가 되면 애들을 변호해 줄 때면 너무 늦겠구나, 진정한 변화는 교실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느꼈죠."

그러나 그루웰의 교단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엉덩이가 빵빵하다"는 성희롱 발언부터 학생들의 인종 패싸움까지 별의 별일이 매일 벌어졌죠. 학생들은 인종끼리 전쟁을 벌이듯 서로 으르렁 거렸습니다. 워낙 사회적으로 인종 집단끼리 갈등이 격화된 탓이었죠. 학생들은 자신의 인종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두려울 게 없어요. 적어도 동족을 위해 죽는다면 명예롭게 전사로서 죽는 거니까요."

그루웰의 아버지마저 그의 교사 생활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돈을 못 번다는 이유에서죠.

"세전 연봉이 2만7000달러랬나? 네 머리 정도면 대기업 경영도 가능해. 그런 머리로 '교도소'에서 선생을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구나. 그 놈들은 시위대가 아니라 범죄자야. 네 재능을 그렇게 썩힐 거야?"

공책 하나로 바뀐 아이들…"유일하게 희망 심어준 선생님"

'조롱 그림' 사건이 벌어지자 그루웰은 아이들의 행동을 '홀로코스트'와 비교하며 따끔하게 질책합니다. 그러나 정작 홀로코스트를 아는 학생은 단 한 명. 이에 놀란 그루웰은 아이들에게 홀로코스트를 가르쳐주기로 맘 먹습니다. 그리곤 학생들에게 공책을 하나씩 줍니다. 매일 글을 쓰라고 주문하죠.

"다들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하는 건 중요해. 우리가 하려는 건 이 공책에 매일같이 쓰는 거야. 쓰고 싶은 건 뭐든지 써. 점수는 매기지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진실한 이야기에 A나 B를 줄 수 있겠어. 안 그래? 너희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읽지도 않을 거야."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들은 공책에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숨진 어머니, 억울하게 소년원을 다녀온 사건, 거리에 널린 시체들을 보거나 사탕을 고르다가 총격을 받은 순간 등 15살인 학생들이 겪기엔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경험들이 담겨 있었죠.

그루웰은 아이들에게 홀로코스트의 현실을 보여주는 '안네의 일기' 책도 선물합니다. 이는 모두 사비로 충당하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퇴근 이후 백화점과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죠. 이를 두고 남편과 갈등도 생기지만 그루웰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유태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초청해 아이들과 만나게 하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도 데려갑니다.

그루웰의 정성 덕분에 아이들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학급 내 인종의 벽이 허물어지고, 책을 더 읽기 시작하고, 영어 시험 점수도 크게 올랐죠.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이들을 바꾼 겁니다.

새학기가 시작한 날, 한 학생은 공책에 이렇게 씁니다.

"날 작년에 가르쳤던 괴짜 영어 선생님인 그루웰 선생님은 나에게 희망을 심어 준 유일한 사람이다. 작년 영어 수업과 견학에 대해 친구들과 얘기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시간표를 받아보니 첫 수업이 203호 그루웰 선생님 수업이다. 교실에 들어오니 이런 기분이다. 내가 가진 모든 문제들이 별거 아니라는 느낌. 집에 온 기분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Freedom Writers Diary)'의 내용입니다. 초임 선생이었던 그루웰은 인종 갈등에 목숨 걸던 아이들에게 희망과 의지를 심어줬습니다. 그루웰은 나중에 학생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냈습니다. 그 책 제목이 바로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입니다.

고교 졸업조차 불투명했던 실제 학생들의 대다수는 대학 진학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이들의 가족 중 대학을 진학하는 경우는 처음인 사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루웰은 나중에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의 강단에 섰고, 프리덤 라이터스 재단도 설립해 여전히 교육에 힘쓰고 있습니다.

에린 그루웰(왼쪽)과 학생들. [프리덤 라이터스 재단 홈페이지 캡처]
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교실 공간

영화는 인종 갈등이란 소재로 교사의 헌신적인 노력을 보여줍니다. 학교와 온갖 냉대나 남편과의 이혼도 그의 학생을 향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루웰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실이 단순히 지식 전달의 공간이 아닌 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공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수십 명의 삶을 바꿨습니다.

우리나라 교사들의 추모 행동인 '공교육 멈춤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서울 서이초 교사의 49재에 맞춰 교사들이 모이는 날입니다. 전날 열린 교사 집회엔 주최 측 추산 20만명이 참여했습니다. 최근 또 다른 교사 2명이 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모의 열기와 교권 보호에 대한 교사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사들도 대부분 사명감 하나로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즘 마주하는 현실에서 그 사명감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교사들의 생존이 더 걱정되는 요즘입니다. 교사들이 본연의 가르침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교권 환경을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시점입니다.

그루웰의 교사 생활을 반대했던 친정 아버지는 그루웰의 아이들에 대한 진심 어린 모습들을 보고 맘을 바꿉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하죠.

"네가 그 아이들에게 한 일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훌륭한 교사라는 거야. 특별해. 너는 짐을 지는 축복을 받은거야."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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