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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

약 20년 전 기자생활을 잠시 내려놓고 1년간 영국 중부의 셰필드로 유학을 갔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현지의 음식문화였다. 영국을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식문화는 당시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의외였다.

선진국이란 명성에 어울리는 멋진 레스토랑도 있었지만 거리를 장악한 것은 테이크아웃(take out·영국식으로는 take away) 음식점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음식을 사서 집이나 공원에서 먹었고, 직장인들은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사서 사무실에서 간단히 때우는 경우도 많았다. 점심때엔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나 중국음식 도시락 또는 생선과 감자튀김에 소금과 식초를 뿌려 종이나 일회용기에 담아 파는 ‘피시 앤드 칩스’를 먹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영국 사회의 일부를 본 측면이 있겠지만 당시 회식문화에 익숙했던 필자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거래처 사람들이나 직장 동료, 지인 또는 가족과 즐기는 회식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공원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외환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고도성장이 지속되면서 오늘 지갑을 비워도 내일 다시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가 그 밑바탕이 됐다. 국가는 막 가난을 벗어났지만 국민은 부자였다.

상황이 의아해 영국인 학생에게 외식을 얼마나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는 “일 년에 한 번이나 두 번?”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주로 집에서 먹지. 외식은 비싸서...”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영국은 부유한 선진국이었지만 국민은 많은 세금과 비싼 물가 때문에 가난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했던 것이다. 의료·복지 등 촘촘한 사회안전망과 이웃에 대한 배려와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경제력만큼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지는 못하는 듯했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 것은 지금 우리가 그때 영국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5~6년 전에만 해도 눈에 띄지 않았던 테이크아웃이나 배달음식문화가 보편화하고 있고, 편의점 간편식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10~20년 전에만 해도 열심히 일하면서 아파트를 청약하고 당첨받아 꾸준히 갚아나가면 주택을 장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 청년들에겐 아득한 꿈이 되고 있다. 물가는 한 번 오르면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저성장은 심화하고 있다. 지난해 경제는 2.6% 성장했지만 물가는 이의 두 배인 5.1% 뛰었고, 올해도 1%대 저성장과 3%대 고물가가 예고돼 있다. 취약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려면 세금을 더 내야 하고, 연금의 고갈위기를 막으려면 더 부담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해도 그 과실이 고루 돌아가지 않고, 물가마저 잡지 못하면 국민은 더 궁핍해질 수 있다. 특히 물가 상승과 양극화의 주범인 부동산 가격을 하향 안정시키지 못하면 국민의 심리적 가난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국가는 부자가 돼도, 대부분의 국민은 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이미 그런 국면에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경제 총량의 성장만이 아니라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때다.

hj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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