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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행복을 그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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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즐거워 보였다.

콧노래를 흥얼댔다. 입술을 오므려 휘파람도 불었다. 가끔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미소를 되찾았다. "영감님. 괜찮아요?" 종종 그림 모델이 물었다. "그렇다마다요!" 르누아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에 시달렸다. 손이 심하게 뒤틀렸다. 독수리 발톱처럼 휘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지 않도록 붕대를 감아야 했다. 르누아르는 그런데도 그림을 그렸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붓을 묶었다. 통증이 심할 땐 아예 입에 붓을 물었다. 르누아르는 그런 꼴인데도 캔버스 앞에만 서면 실실 웃었다. 또 뭘 그려볼까 하며 들떴다. 그가 덜덜 떨며 그린 그림은 화사했다. 기쁨과 설렘, 행복만 있었다. 고통도, 통증도 없었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영화 르누아르(Renoir·2014) 예고편 캡처.

"툭 까놓고 말하겠소. 존경하는 선생을 위해서요."

어느 날, 화상(畵商)이자 그의 후원자인 이가 르누아르에게 물었다. "솔직히 선생이 그리 유복한 삶을 산 건 아니잖소." "그렇지." "젊은 날엔 조롱도 많이 받고, 위기도 많이 겪었잖소." "그렇네만." "심지어 지금은 휠체어에 파묻혀 마음껏 움직일 수도 없지 않소. 병 때문에 숨소리도 거칠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르누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계속 나오는 거요? 어쩜 평생 이리도 화사한 그림을 끊임없이 그릴 수 있는 거요?" 화상이 질문을 던진 짧은 순간에도 이 늙은 화가의 손은 뒤틀렸다. "자네, 아는가. 내가 살아보니 말이야." 르누아르가 입을 뗐다. "고통은 다 흘러가지만, 아름다움만큼은 영원하더군." 르누아르는 느릿느릿 말했다. 젊은 날을 곱씹는 듯했다.

지독한 가난에서 예술혼 꽃피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뿌리개를 든 소녀

르누아르의 아버지는 프랑스 리모주에 허름한 양복점을 둔 재봉사였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푼돈을 보탰다. 1841년 르누아르는 이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 무렵에 부모님과 함께 파리로 이사했다. 대도시로 왔지만 부모의 벌이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르누아르도 결국 13살쯤 도자기 공장에 취직했다. 소년공이 된 그는 용돈을 직접 벌었다. 르누아르는 도자기에 문양을 그려 넣는 일을 했다. 양치기 소년이나 목장 소녀의 모습, 마리 앙투아네트 등 유명 귀족의 옆얼굴, 꽃망울 등을 표현했다. 르누아르는 일을 꽤 잘했다. 인정도 받았다. 그 또한 적성에 맞았다. 하품을 달고 사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혼자 신나게 작업했다. 늦은 밤 야간 학교에 있을 때도 머릿속은 온통 문양에 대한 고민뿐이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들

르누아르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공들은 훗날 이런 공장 일을 악몽으로 두고 잊으려고 애썼다. 르누아르만은 공장 경험을 남들이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된 계기로 간직한다. 르누아르는 어릴 적부터 예술에 재능을 보였다. 한 음악가는 르누아르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는 부모를 찾아가 "이 아이는 성악을 해야 한다"고 말한 일화도 전해진다. 르누아르의 어머니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돈이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르누아르에게 깃든 예술혼은 이런 일로 물러서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운명처럼 루브르 박물관에 이끌렸다. 그저 도자기에 새길 그림 공부를 위해 찾았는데, 점점 더 묘하게 명화에 관심이 쏠렸다. 특히 낭만주의 전성기를 연 와토와 부셰의 그림은 수백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앙투안 와토, 키테라 섬으로의 출항
프랑수와 부셰, 마담 퐁파두르

어쩌면 나도…?

성악가의 길을 채 걷지도 못한 르누아르는 화가의 상상하게 된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화혼에 휩쓸린 후였다. 르누아르는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저 살아가기' 이상의 목표가 생겼다. 바로 미술학교 입학이었다. 17살 무렵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장의 기계화로 실직했다. 그러나 쉴 틈도 없이 교회 깃발 채색하기, 여성용 부채에 삽화 그리기 등 소일거리를 이어갔다.

유복하지도 않은, 그렇다고 집안에 예술가가 있지도 않은 그가 왜 이렇게 미술에 매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둡고 축축한 그림에 심취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가 왜 밝고 행복한 작품만 좋아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네 그림은 늘 즐겁구나." 그 시절 르누아르의 습작을 본 이가 그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무슨 일이든, 즐겁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지요." 르누아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르누아르는 금방 철이 들었다. 빨리 의젓해졌다. 하지만 알고 보면 집안의 가난과 자신의 처지를 견디고 있었을 뿐이며, 알게 모르게 화사한 그림을 배출구이자 돌파구로 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렇게 행복을 찾고, 열심히 행복을 가꿨다.

모네·바지유, 무서울 것 없던 삼총사
샤를 글레르, La Danse des bacchantes

21살의 르누아르는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이 어렵기로 정평이 난 파리의 국립미술학교에 발을 디뎠다. 재능과 노력의 결과였다. 르누아르는 꿈에 그리던 정식 교육을 받았다. 그의 스승은 고상한 역사 화가였던 샤를 글레르였다. 그는 글레르를 따라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 당장의 가난은 떨칠 수 있는 길고 가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문제아(?)들을 마주한다. 어쩌다 보니 친해지고 만다. 아카데미풍 가르침에 반기를 든 모네바지유 등이었다. 모네는 르누아르보다 한 살 많은 22살, 바지유는 르누아르와 동갑이었다. 얌전한 편에 속한 르누아르가 당시의 반항아 무리와 의기투합한 건 그의 성격이 그만큼 긍정적이며 둥글둥글했다는 걸 방증한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르누아르는 글레르의 가르침을 점점 멀리했다. 통통 튀는 녀석들과 함께 일탈했다. 원조 문제아인 사실주의 거장 쿠르베, 떠오르는 괴짜인 인상주의 선구자 마네 등을 공부했다. 꿈 많은 젊은 시절, 마음 맞는 친구,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유…. 만년의 르누아르는 이 시절을 그의 삶 중에서도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추억한다. 에콜 데 보자르의 배반자가 된 르누아르는 친구들과 함께 인상주의에 심취했다. 삼총사는 외광(外光)을 종교처럼 숭배했다. 진짜 빛이 안겨주는 변화를 보기 위해 밖을 쏘다녔다. 빛에 따라 색채는 다양한 자태를 드러냈다. 때때로 사과는 빨간색이 아닌 노란색이었고, 활짝 웃는 아이들의 두 볼은 살색이 아니라 설렘이 깃든 주황색이었다. 활개 치는 인상을 잡아내는 데 여념 없었다. 이단아가 된 셋은 기억 내지 상상에 기대고, 가짜 빛 아래 작업실에 틀어박혀 붓을 들던 문화를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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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특히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르누아르는 인물을 은근히 사랑스럽게, 어딘가 모르게 환상적으로 그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가난을 끌고 다녔지만 그의 그림에선 그늘을 찾을 수 없었다. 동시대 화가 고흐가 슬픔을 슬픈 그림으로 털어냈다면, 르누아르는 슬픔을 행복한 그림으로 막아내는 스타일이었다. 모네는 시시각각 바뀌는 빛을 품은 풍경화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미 산과 바다, 해와 구름 묘사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바지유는 인물화와 풍경화를 모두 즐겼다. 그는 다만 둘보다는 전통에 가까운 화풍이었다. 친구에겐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바지유는 그림만큼 돈 없는 르누아르를 보살피는 일도 충실히 했다. 바지유는 르누아르에게만은 수호천사 같은 존재였다. 비교적 부유했던 그는 일부러 큰 작업실을 빌렸다. 밀린 집값에 시달리는 르누아르를 불러 함께 생활했다. 때론 물감과 캔버스를 빌려줬고, 돈을 꺼내 그의 습작을 구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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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모네, 바지유와 형제처럼 살았다. 모네는 영감을 줬다. 바지유는 여유를 제공했다. 여전히 풍요로운 삶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장 내일 뭘 먹고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소년공의 시절과 견줘보면 천국 같았다. 그런 르누아르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꾀죄죄한 애가 그림은 쓸데없이 화사하다"고 비꼬았다. 르누아르는 언젠가 이 풋내기 화가 둘과 파리에서 끝내주는 공동 전시회를 열 것을 상상했다. 실제로 약속도 했다. 하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1870년, 보불(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눈치 빠른 모네는 그쯤 영국 런던으로 피했다. 르누아르와 바지유는 꼼짝없이 입대했다. 붓만 들던 두 손에 총이 쥐어졌다. 르누아르는 10개월의 시간을 전쟁터에 쏟고 돌아왔다. 기진맥진한 그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바지유가 참혹한 현장 속에서 전사한 것이다.

인상주의展서 '눈도장' 보답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뱃놀이 일행의 오찬

르누아르는 그림에 더욱 몰두했다.

어릴 적 소년공이었을 때도 그랬듯, 그는 힘든 일을 맞닥뜨리면 예술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달동네에서부터 갈고 닦은 불굴의 의지이자 무너지지 않기 위한 생존 본능이었다. 르누아르는 모네와 함께 삼총사의 약속을 지켰다. 1874년. 둘은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 어울리던 젊은 화가들과 함께 그들만의 전시를 열었다. 이 행사는 훗날 역사책에 쓰인다. '인상주의'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사랑하는 연인, 천사 같은 아이, 청춘을 만끽하는 젊은 청년들이 담긴 그림을 내걸었다. 전시 결과는 처참했다. '그리다 만 그림만 내건 허풍쟁이들의 전시'라는 평이 따라왔다. 바보들의 행진이었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인상주의에 열광하는 건 이날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관람석

악평이 쏟아진 전시에서 딱 한 사람, 르누아르만은 나쁘지 않은 평가도 받았다. 르누아르의 한층 원숙해진 색채를 본 이들은 그의 작품 앞에서만큼은 살살 녹았다. 이들이 볼 때 르누아르의 그림 또한 모네나 드가 작품처럼 기법이 괴발개발이었지만, 무언가 느낌은 달랐다. 보불전쟁의 후유증을 잊고 싶은 파리지앵은 그의 그림으로부터 위로 내지 회복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르누아르가 이런 반응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또한 전쟁의 실상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이후 파리코뮌 때는 첩자로 오인당해 총살 당할 뻔도 했다. 르누아르는 그림 밖에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있는 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화가였다. 그 스스로가 전쟁과 광기에 대한 위로가 절실한 사람이었기에,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2년 뒤 어느 일요일. 르누아르는 몽마르트 언덕 꼭대기에 자리를 폈다.

르누아르는 이 작은 광장에 차려진 야외 선술집 '물랭 드 라 갈레트'의 풍경을 그렸다. 파리의 청춘들이 넘실댔다. 젊은 남녀는 서로 짝을 이뤄 미소 짓고, 춤을 추고, 술을 들이켰다. 수줍은 웃음, 경쾌한 음악 소리가 가득했다. 재봉사인 에스텔과 잔 마르고 자매가 각각 검은 드레스, 하늘색 스트라이프 복장을 한 채 찰싹 붙어 있었다. 이들의 정면에는 작가 조르주 리비에르가 있고, 바로 옆에는 화가 프랑크 라미와 노르베트 괴뇌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왼쪽으로 한 뼘 떨어져선 분홍색 옷을 입은 마그리트 르그랑이 카르데네스와 우아하게 춤을 추는 중이었다. 르누아르는 각자의 행복을 모두의 행복으로 섞고 버무렸다. 작은 행복이 모여 큰 행복이 됐다.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6개월여 동안 길바닥에서 바람을 맞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부지발의 무도회

"이봐, 적당히 좀 하고 나머지는 작업실에서 하게." 르누아르의 건강을 염려하는 동료들은 그를 회유했다. "아니야.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르누아르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완성했다. 따뜻한 동화, 훈훈한 영화 같은 그림이었다. 2년 전 자신의 스타일을 호평해준 이들에게 보답하고자 마음먹고 만든 작품이었다. "나는 고통을 말하지 않겠어. 꽃과 여인, 인생의 환희만을 그리겠어." 르누아르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철학이 통한 걸까. 르누아르의 다채로운 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는 배척자 만큼 지지자도 많이 거느리게 됐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려고 해외에서 오는 팬이 생길 정도였다. 후원자까지 등장했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털어냈다.

라파엘로 작품서 눈물, 화풍 바뀌다
라파엘로 산치오, 아테네 학당

1881년. 40대를 바라보던 르누아르는 돌연 이탈리아로 갔다.

후원금과 그림 판 돈을 긁어모아 고전의 본고장을 견학했다. 소년공 시절부터 이어지는 르누아르의 남다른 교육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르누아르가 어느 정도 여유를 찾긴 했지만, 그 시절 이탈리아 유학은 부르주아의 특권으로 칭해질 만큼 만만찮은 일이었다. 프랑스 도시의 1등 예술가를 뽑는 대회 포상을 이탈리아 체류권으로 내걸 정도였다. 낯선 땅에 온 르누아르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림은 예쁜데, 거의 다 비슷하지 않나?"라는 말을 듣고 매너리즘이 오던 차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르누아르는 라파엘로 또한 빛의 효과를 완벽하게 이해한 화가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단지 추구하는 게 달랐을 뿐이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목욕하는 여인들

르누아르는 이 불세출의 천재를 통해 자신이 인상주의에 묶일 필요가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인상주의에 얽매이지 않으면 더 찬란한 그림,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그 해부터 인상주의 전(展)에 작품 내기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여전히 인상주의를 추구하는 친구들과 다투기도 했지만, 그에게 이 정도는 고통도 아니었다. 르누아르는 3년여 고민과 연구의 결과물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내놓았다. 여인 세 명이 목욕을 즐기는 모습이 눈길을 끄는 누드화였다. 등장하는 이들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내지 요정 같았다. 붓놀림은 단정하고, 윤곽선도 뚜렷했다. 고전주의 색채가 인상주의 특유의 흐릿함을 억눌렀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전후로 인상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보헤미안

르누아르는 이쯤 눈을 더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이 여성, 특히 나부(裸婦)를 아름답게 표현할 때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게 행복의 절정에 닿아야만 보는 이에게도 최고의 행복을 안길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르누아르의 누드화는 화제가 됐다. 친구들은 그가 쉬운 길로 회귀하고 있다며 섭섭해했다. 소신껏 이어간 실험을 다 팽개치고 고전주의로 돌아가 버렸다고 했다. 대중도 술렁였다. 너무 야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도 이 그림의 아름다움,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아우라를 놓곤 양측 다 이견이 없었다. "가뜩이나 불쾌한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굳이 그림마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일부러 그릴 필요가 있을까." 다들 르누아르의 이 말에 또 스며들어갔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르누아르는 46살이 된 1890년을 평생 잊지 못했다. 드디어 프랑스 정부가 손을 내밀었다. 미술관에 전시하겠다며 '피아노 치는 소녀들(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을 사들였다. 그는 큰돈과 함께 정부 인증의 흥행 보증 수표를 쥐었다. 르누아르는 같은 해 모델 알린 샤리고와 결혼했다. 연인과 함께 재충전하고자 시골 마을 에소이(Essoyes)를 찾았는데, 특유의 소도시 감성이 주는 즐거움에 아주 혼절해버렸다. 르누아르는 부와 명예, 사랑과 평화를 모두 이뤘다. 평생 행복을 찾아다닌 그가 드디어 행복의 열탕에 풍덩 빠졌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있었다. 건강이었다.

그 무엇도 꺾지 못한 행복, 별이 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자화상
프레데리크 바지유, 르누아르의 초상

1898년. 57살의 르누아르에게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왔다.

병세는 계속 나빠졌다. 63살쯤 그의 몸무게는 50㎏이 안 됐다. 69살 무렵부터는 걸으려면 지팡이가 필요했다. 통증이 심할 때는 퉁퉁 부은 채 휠체어에 있어야 했다. 르누아르는 그런데도 그림을 그렸다. 붓을 물고, 묶고, 붙이는 등 난리를 치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그림은 항상 평온했다. 아름다운 삶의 단면들이었다. 지독한 운명에 대고 오냐, 내가 졌다며 절망 어린 그림을 찍어내도 이해될 법한데 끝내 그러지 않았다. 르누아르는 늘 옅게 웃었다. 이쯤부터 그는 거의 도인 같았다. 화사한 그림을 그리는 데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찍어누르고 제압한 듯했다. 1900년. 르누아르는 프랑스가 주는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평생을 견딘 그 마음에 대한 보상 같았다.

영화 르누아르(Renoir·2014) 예고편 캡처

"…그러니까, 훈장도 받았으니 이제는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소? 이대로 가다간 선생을 곧 잃을까 봐 두렵소."

화상이 주름투성이의 늙은 화가를 놓고 설득했다. 호소하는 듯도 했다. "내 그림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어." 르누아르가 응수했다. 계속 실험하고, 휴식 없이 작업하겠다는 뜻이었다. 비참한 가난, 참혹한 전쟁, 한때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던 단짝 친구의 죽음, 그림에 대한 모욕적인 비난도 그의 붓을 꺾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런 살과 뼈를 조여오는 질병쯤은 우스웠다.

르누아르는 많은 이의 염려를 무릅쓰고 작업을 지속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까지 끈질기게 활동했다. 심지어 아예 움직일 수 없을 때도 조수를 시켜 무언가를 빚고 그리려고 했다. 르누아르는 1919년 7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류머티즘성 관절염과도 20여 년 함께 하며 비교적 장수한 셈이다. 르누아르는 평생 그림 5000여점을 그렸다. 특히 말년에만 800여점을 남길 만큼 투혼을 불살랐다. "이제야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르누아르의 유언이었다. 끝끝내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이었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3)“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4)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5)“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의 맞수 (2022. 11. 5.)

6)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7)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영원한 라이벌 (2022. 9. 10.)

8)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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