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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석희 “너무 가볍지 않은 절제미”…‘미세스 다웃파이어’, 현지화 살린 ‘번역의 힘’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초월번역의 달인’ 황석희

오스카의 윤여정·사딸라·도비
한국화·현지화 살린 ‘밈의 향연’
번역가의 임무는 ‘원작의 의도 전달’
해석 뛰어넘는 자연스러운 대사 고민
“번역의 매력은 가공의 재미”
‘번역의 신’ 황석희는 요즘 뮤지컬계에서도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일 년에 영화 번역만 50~60편. ‘극장영화 번역’ 10년 동안 무려 500~600편을 번역했다. 뮤지컬은 ‘썸씽로튼’을 시작으로 ‘하데스타운’,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 여섯 작품째다. 그는 스스로를 ‘새싹 번역가’라며 “영화에서 번역가의 지분이 98.99%라면, 뮤지컬은 번역가가 50%”라고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공을 돌렸다. [샘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혼 후 아이들을 만날 수 없게 된 ‘철부지 아빠’는 여장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을 맡은 동명 영화를 무대로 옮긴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한 장면. 이 때 등장하는 넘버(음악)는 ‘메이크 미 어 우먼(Make Me A Woman)’이었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 최고의 손길로 완벽하게, 부탁해, 내 마지막 희망 (중략) 오드리 햅번, 프리다 칼로, 힐러리 클린턴, 오스카의 윤여정.”

‘오스카의 윤여정’이 관객의 귀에 꽂히자, 객석엔 ‘짜릿한 쾌감’이 감돌았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줄리아 차이들, 자넷 리노”. 다소 낯설 수 있는 여성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 원작에 완벽한 ‘한국어 패치’를 붙였다.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다 안다’는 ‘번역계의 아이돌’ 황석희의 작품이다.

‘번역의 신’은 요즘 뮤지컬계에서도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일 년에 영화 번역만 50~60편. ‘극장영화 번역’ 10년 동안 무려 500~600편을 번역했다. 뮤지컬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썸씽로튼’을 시작으로 ‘하데스타운’,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통해 경험을 쌓고 있다. 스스로는 ‘새싹 번역가’라고 말한다.

최근 경기도 일산에서 만난 황석희 번역가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원작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레플리카(Replica)’가 아니라 ‘논레플리카(Non-Replica)’ 작품이어서 모든 대사와 음악을 한국식으로 바꿔 설득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해외에서도 초연작이다 보니, 대본이 끊임없이 수정됐어요. 번역을 다 해놨는데 신이 편집되거나 추가되고, 노래가 바뀐 경우도 있었죠. 게다가 신을 통째로 들어내고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아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어요.”

1993년 개봉한 ‘추억의 영화’는 지난해 12월 미국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라이선스 공연(11월 6일까지·샤롯데씨어터)을 갖고 있다. ‘영화에 대한 향수’와 세 배우(임창정·정성화·양준모)의 능청스러운 변신은 보는 재미가 있다. 1막이 끝나고 나면 공연장에선 생생한 후기가 들려온다. 관객들은 “대본의 현지화가 탁월”하다며 감탄한다.

정작 황석희 번역가는 “뮤지컬 번역은 영화 번역과 달리 수정의 연속이고, 번역가의 공이 아닌 배우와 연출, 음악감독의 역량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번역가의 지분이 98.99%라면, 뮤지컬은 번역가가 50% 정도예요.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공이에요.”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샘컴퍼니 제공]

■ 한국 정서에 맞게 재탄생…현지화 살린 ‘밈(Meme)의 향연’

무대 공연의 번역은 영상 콘텐츠와는 또 다르다. 도리어 “더 까다롭고 어려운 과정”이라고 업계에선 입을 모은다. 자막을 통해 설명할 수도 없는 데다,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기에 단어와 표현의 취사 선택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다양한 연령대와 취향의 관객을 아우르는 만큼 불편하고, 불쾌하지 않은 대사 표현도 중요하다.

공연 번역의 중요한 과제는 ‘적절한 한국화’다. 원작에 등장하는 미국식 유머와 영국식 블랙코미디는 한국 정서에 맞는 표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할머니로 분장한 ‘철부지 아빠’ 다니엘이 아이들의 유모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전처와의 통화 장면은 압권이다. 이름을 묻는 대사에 머뭇거릴 때, 옆에서 들려오는 두 남녀의 대화 소리. “잘 생기면 다 오빠예요”. 다니엘이 위장한 ‘다웃파이어’의 탄생 비화다. 황 번역가는 “원작 영화를 봐온 세대였기에 작품을 의뢰 받았을 때부터 고민한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원작에서 ‘다웃파이어’라는 이름은 ‘경찰이 방화를 의심하고 있다(Police Doubt Fire Was Accidental)’는 신문 기사의 제목에서 가져왔다. 그는 “영화를 번역할 때 이런 말장난이 나오면, 주로 ‘얻어 걸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번에도 그렇다”며 웃었다. 물론 몇 가지 ‘옵션’이 있었다. ‘다 우파예요’도 후보군이었다. 퍼즐처럼 들어맞은 최종작은 ‘다 오빠예요’였다.

무대는 유행어와 밈(Meme)의 향연이다. 넷플릭스에서 콘텐츠를 재생할 때 들리는 소리 ‘두둥’, SNS에서 회자되는 ‘1초에 사딸라’(드라마 ‘야인시대’ 대사 패러디),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드라마 ‘모래시계’의 대사), 이효리의 ‘텐미닛’, 셰프 고든 램지와 백종원을 패러디한 유튜브 장면 등 한국에도 익숙한 K-유머 코드가 적재적소를 파고든다. 익히 알려진 K-대중문화 코드가 나올 때마다 객석에선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진다. 다니엘이 ‘해리포터’의 도비를 성대모사 하는 장면(“도비 이즈 프리.”)도 애초 원작에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흉내냈다. 황 번역가는 “다스베이더는 한국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며 “‘할리우드 레퍼런스’라는 문화색을 지우면 개그쇼가 돼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타깃으로 하는 관객들이 알고 있는 캐릭터로 해리포터의 도비를 찾았다”고 말했다.

30년 전 영화를 무대를 옮기며 ‘지금의 트렌드’에 맞아 떨어지는 밈을 사용한 것은 작품에 동시대 감각을 입히는 일이다. 황 번역가는 “원작에서도 툭툭 튀어나오는 밈이 있어 어느 정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동연 연출가와 황 번역가의 고민은 ‘균형감’을 맞추는 데에 있었다.

“밈 범벅, 유행어 범벅이 되면 공개 코미디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모든 대사를 다 웃기게 쓰면 너무 가볍지 않을까 고민이 있어, 억지로 쓰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전략은 적중했다. 그는 “절제의 미덕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지화가 잘 됐다는 반응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사실 이 부분의 절반 이상은 배우들의 아이디어와 역량 덕분이에요. 배우들도 이 타이밍이 웃음 포인트가 된다는 것을 알고 적재적소에 아이디어를 주고, 애드리브를 해줬어요.”

‘미세스 다웃파이어’ [샘컴퍼니 제공]

■ 번역가의 임무는 자연스러운 대사 고민·원작의 의도 전달

황석희 번역가에게 뮤지컬 번역은 ‘도전과 배움’의 연속이다. 뮤지컬 번역의 어려움은 영화와 달리 같은 역할을 여러 배우가 한다는 점에서도 나온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만 해도 주연 배우가 세 명이다.

그는 “영화를 번역할 땐 자막에서 캐릭터성이 나와야 하고, 캐릭터가 한 명이기에 그 자막은 고정이 된다”며 “그런데 뮤지컬은 배우마다 캐릭터성을 살릴 수 없어 애를 먹기도 했고, 대사 한 줄 한 줄 마다 고민했다”고 말했다.

작업을 이어가는 과정에선 “부질없는 고민”이라는 점도 알게 됐다고 한다. “대사를 써두면 배우들이 자신에게 맞게 소화하고, 변신하더라고요. 그런 점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밌더라고요. 이런 경험이 제게도 아카이빙처럼 쌓이고 있어요.”

전혀 다른 세계의 작업이지만, ‘번역의 세계’ 안에서 황석희 번역가의 원칙은 ‘장르’를 넘어서도 확고하다. ‘번역가로의 임무’를 지키는 것이다.

그는 “영어를 조금만 할 줄 알면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 안다”며 “번역가가 할 일은 그 대사를 재밌게 표현하는 말투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냥 한국어로 옮기는 것은 해석”이고, 번역가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바꾸는 것”이라는 생각이 작업의 제1원칙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게 담으려 하는 것은 “원작자의 뉘앙스를 옮겨오는 것”, “주제와 밀착된 대사를 살리는 것”이다.

“영화 번역을 주로 하다 보니 연출자의 의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새로 리라이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전 각색가가 아니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번역가는 기술자예요. 번역가의 본질적인 임무는 연출가의 의도,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하고 적확하게 전달하는 거예요.”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도 황 번역가의 원칙이 반영된 대사가 있다. 극중 다니엘의 대사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게 너희들이야”라고 번역된 부분이다. 그는 “평소엔 직역투를 좋아하지 않고, 나의 번역관이라면 자연스럽게 써야 했다”며 “하지만 직역투를 쓰더라도 명확한 메시지가 있는 경우 그대로 쓰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황석희 번역가의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16년 ‘데드풀’을 통해서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영화 번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현재 일주일에 한 편씩 영화 번역을 하는 사이 뮤지컬과 드라마 번역도 하고 있다. 애플TV ‘파친코’도 황석희 번역가의 작품이다. 곧 영화 세 편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한 드라마 ‘파친코’ [애플TV 제공]

황 번역가는 엄격하게 구분돼 있던 ‘번역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첫 주자다. 그는 “영화 번역가는 영화 번역만 하고, 뮤지컬 번역가는 뮤지컬 번역만 해야 한다는 업계와 번역가 스스로가 가진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점차 그 벽이 허물어지는 때가 됐다”며 “번역가들의 활동 반경이 점점 더 넓어지고 업계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제2의 황석희’를 꿈꾸는 후배들도 적지 않다. 황 번역가는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이름이 알려진 건 시대를 잘 만난 해프닝 같은 것”이라며 “가끔 후배들에게 쓸데없는 환상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사기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알려진 번역가가 돼서 다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어요. 번역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굶어 죽지 않는 거예요. 현실적인 번역가의 삶을 견딜 수 없다면, 번역 천재라도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대학교 3학년 때 번역을 시작해 올해로 17년차가 됐다. ‘잡다한 문서’와 다큐멘터리를 시작으로 케이블TV 드라마를 8년간 번역했다. “이틀에 한 편씩 번역해야 생계 유지를 할 수 있던” 시절을 거쳐, 2013년 ‘웜 바디스’로 영화 번역에 입문했다. 오랜 시간 ‘영화 번역계의 안테나 뮤직’으로 불렸다. 감독주의, 예술주의 영화를 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직업을 통해 얻어지는 재미 때문이다. 물론 늘 재밌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 잘 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관절염이나 시력 저하, 물리적으로 번역을 못할 때까지 번역을 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며 “최적의 작업 환경을 통해 마우스와 키보드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며 웃었다. “키압이 다른 키보드가 무려 네 대”나 있다.

“제가 느끼는 번역의 매력은 가공의 재미예요. 번역은, 가공이에요. 유를 가공해 또 다른 유를 만드는 거죠. 멋진 원석을 보석 세공사처럼 예쁘게 다듬어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작품으로 보여주는 사람, 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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