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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로코코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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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그래서…. 예수는 어디에 그려져 있소?"

"없는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저기 있는 비너스 동상이 주인공인가?" "오른쪽 구석에 볼품없이 그려놓았는데, 주인공 느낌은 딱히 아니네요." "하늘에 날고 있는 아이들은? 천사큐피드 아니오?" "큐피드에 가깝겠죠? 그런데요. 큐피드의 상징이면 활과 화살인데, 훌훌 털고 그저 놀고만 있는 애들이 많은데요." "하…. 그래! 저기 가운데 선 남자! 이나 왕자를 그린 것 아니오? 아, 모자랑 망토, 지팡이를 보니 신의 뜻을 찾는 순례자겠구먼!" "다 아니래요. 그냥…." "그냥? 그냥 뭐?" "그냥 그렸다는데요. 아무 상징 없이 그냥 그린 그림이래요." "그러니까 이 그림이 신화화도, 종교화도, 역사화도 아니다? 그럼 뭐야. 아이고, 참!"

1717년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

원장 등 간부들이 원탁 테이블에 그림 한 장을 놓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원장이 소리를 꽥 지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러앉은 간부들도 골머리를 깨나 앓은 듯합니다. 원장이 지칭한 '그놈'은 얼마 전 "왕립 아카데미 입회작이라오!"라며 그림을 휙 주고는 사라졌습니다. 가입한 지 벌써 5년이 넘었는데, 인제 와서 뻔뻔하게 입회작을 내놓곤 이렇다 한 설명도 없이 퇴장한 겁니다. 그가 낸 그림의 내용은 당황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낼 거면 진작 낼 것이지…. 5년을 질질 끌며 괴롭히고, 이번에는 그림 분석으로 또 이렇게 못살게 구는군." 원장이 중얼댑니다.

'이 그림을 어느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깔끔할까….'

원장은 살면서 이런 그림은 처음 봤습니다. 간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이 그림의 장르를 무엇으로 둬야 하는지를 놓고 며칠째 입씨름을 했습니다. 신화화도 아니고, 정물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완성작도 아니었습니다. "인물화로 하죠. 사람이 많잖아요. 제발, 이제 끝내시죠. 쉽게 생각하자고요." "인물화는 무슨. 이봐요. 그림 속에 아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어요?" 술렁임이 또 커집니다. "산도 울창하고 물도 반짝이고…. 풍경화로 해요. 다들 이제 집에 좀 들어갑시다." "사람이 스무 명은 그려진 듯한데 풍경화는 무슨! 말도 안 돼요." 며칠째 이런 식이었습니다.

장 앙투안 와토, Nymph and Satyr

"우리, 장르를 새로 만듭시다."

원장의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집니다. "장르? 무슨 말이에요?" 간부들이 웅성거립니다.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우아한 연회·아연화)'는 어떻소? 우아하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 앞으로 이런 작품이 들어오면 다 '페트 갈랑트'로 묶는 거요." 원장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무시하고 간부들에게 재차 제안합니다. "종교화, 역사화, 풍경화 같은 대분류에 '페트 갈랑트'란 말을 새로 만들자는 말인가요?" "그렇소." 원장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원장님. 그냥 그놈을 다시 여기로 부르시죠. 자기 그림을 부연 설명도 없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주변도 없고 괴팍하기만 한 그놈이 무슨 말을 더하겠소. 당신네처럼 자존심만 센 인간인데!" 원장의 이 말에 아무도 반박을 못 합니다.

원장의 입장에선 그놈, 그러니까 이 화가가 보여준 무례한 행동보다 더 화가 치미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잔뜩 벼른 상태에서 본 이 그림이 보면 볼수록 너무 좋았던 겁니다. 모든 부분이 아름다웠습니다.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인정해야 할 지점이었습니다. 간부들도 내심 이 작품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전인미답의 명작임을 알기에 더 치열하게 토론한 겁니다. "원장님. 이참에 그 건방진 화가도 잘라버리지요? 그림이야 대충 깎아내리면 되지요"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 이유였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오. 솔직히 그림만 놓고 보면 잘 그렸잖소. 딱 요즘 스타일이란 말이오. 분하지만 인정하지 않소?" "그건 그렇지만…." "분명히 이 그림을 따라하는 이가 한 뭉텅이로 생길 거요. 미리 '페트 갈랑트'란 대분류를 만들어놓으면 혼란을 예방할 수 있소." 원장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합니다.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당혹감에 몰아넣은 이 화가의 정체는 장 앙투안 와토(바토·1684~1721)입니다.

격론 끝에 그림을 지칭하는 '새 장르'를 만들게한 와토의 문제작은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입니다. 평생 마이웨이로 산 와토는 빛나는 재능 하나만으로 페트 갈랑트, 더 나아가 로코코 미술 선구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종교화도, 역사화도, 풍경화도 아닌 ‘정체불명’ 작품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

먼지 냄새나는 옛 동화책의 삽화 같은 그림입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지고 있습니다. 꽃에 휘감긴 비너스 상이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큐피드가 하늘 위를 자유롭게 헤엄칩니다. 파티가 있었던 걸까요. 우아하게 차려입은 남녀 여덟 쌍이 서로에게 찰싹 붙어 있는데요. 맨 오른쪽 커플은 열심히 사랑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옆 커플은 서로를 끌어 당기면서 나란히 일어서려는 듯합니다. 여성은 뒷모습 뿐이지만, 얼마나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옆 커플은 이미 자리를 훌훌 털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남성의 손에 이끌리고 있는 연갈색옷의 여성은 못내 아쉬운 듯 뜨거운 사랑의 현장을 돌아봅니다.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일부 확대)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일부 확대)

언덕 아래 있는 커플 5쌍은 각자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합니다.

온도는 제각각이지만, 앞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건 확실해 보입니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남녀 한 쌍을 다른 모습 여덟 가지로 그린 것 아닌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가면서 사랑이 차츰 깊어지는 모양을 표현한 듯한데?"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뒤쪽 근육질의 두 남성은 이들을 뭍으로 이끌어줄 뱃사공입니다.

그림에는 딱히 알만한 인물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저 동화적입니다. 색채와 붓 터치 모두 부드럽습니다. 산과 바닷물은 은은하고, 나무와 꽃은 우아합니다. 땅과 풀도 스펀지처럼 손으로 누르면 쑥 들어갈 듯합니다. 옅은 안개 때문인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도 풍깁니다.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일부 확대)
장 앙투안 와토, 키테라(시테라)섬의 순례(일부 확대)

와토의 작품 '키테라섬의 순례'에서 키테라섬은 특별한 곳이긴 한데요.

키테라섬은 바다 거품에서 태어난 사랑의 여신 비너스 첫발을 디딘 전설의 땅입니다. 이 신화 덕에 키테라 섬은 사랑의 섬, 구애의 장소와 동의어가 됩니다. "키테라섬은 펠로폰네소스 남쪽에 있다는데, 그 섬에 가면 누구든 반려자를 만날 수 있대!"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그림 속 비너스 동상이 눈을 감은 이유, 그 아래 앉은 큐피드가 사랑의 화살을 비너스 동상에 묶어놓은 까닭이 이해됩니다. 다 알아서 사랑에 빠지는 곳인 만큼, 굳이 애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장 앙투안 와토, 이탈리아 희극 배우들

와토에게 영감을 준 건 연극입니다.

와토는 1700~1709년에 유행한 연극 '세 사촌'을 보고 키테라섬을 무대로 한 그림을 구상합니다. 특히 "우리와 함께 키테라섬으로 떠나시죠. 젊은 처녀들은 애인을 얻어 돌아옵니다!"라는 대사에 흠뻑 빠졌습니다.

와토는 이 그림이 미술사를 어떻게 발칵 뒤집을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반항적인 성격이긴 했지만, 이 그림은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그렸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오장육부가 편했던 겁니다. 상상을 그대로 옮겨 담다 보니 애초 무슨 장르로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신화화에 등장하는 신과 종교화의 핵심 소재인 순례를 뒤섞었습니다. 별다른 이야기도 없고, 특별한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특별한 형식도 없었습니다. 주제는 오직 사랑유희, 연극을 볼 때 느꼈던 그 두 감정뿐이었습니다.

‘태양왕’이 죽었다…귀족에게 ‘사치’를 허하라

와토는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창시자입니다.

로코코 미술은 우아하고 화려한 장식성이 돋보이는 화풍입니다. 대표적인 장르가 와토의 그림 '키테라섬의 순례'에서 파생한 '페트 갈랑트'입니다. 주요 소재는 우아한 차림새의 남녀, 사랑을 속삭이는 자세, 전원 등 한가로운 배경, 섬세하고 럭셔리한 소품 등입니다. 지금도 골동품 가게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그림체입니다. 로코코 미술을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한 게 "와토의 정원(그림)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그만큼 밝고, 가볍고, 유희적이기만 했다는 뜻입니다.

루이 14세 초상화(일부).

로코코 미술 탄생에는 와토의 개인기도 큰 영향을 줬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또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양왕'으로 군림한 루이 14세(1638~1715)입니다. 살아생전 루이 14세는 절대 왕권을 누렸습니다. 루이 14세는 예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웅장한 방, 더 화사한 옷, 더 반짝이는 장신구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죽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귀족들은 숨죽여 살았습니다. 감히 예술을 누릴 수 없던 시대였습니다.

베르사유궁 내부 모습. [@hyem_pics]
베르사유궁 내부 모습. [@hyem_pics]
베르사유궁 외부 정원 모습. [@hyem_pics]

1682년, 루이 14세는 파리의 왕궁 행정을 다 싸 들고 베르사유궁으로 갑니다.

왕권을 드높이다 못해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실현한 겁니다. 귀족과 병사 등 약 5만명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갑니다. 멀쩡한 고향 땅을 두고 낯선 베르사유, 또는 옆 마을에 둥지를 틉니다. 갑갑하게 부대끼는 생활 속에서 억지웃음만 지었습니다. 베르사유궁과 내부의 예술품은 그간 없던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어차피 왕의 소유일 뿐이었습니다. 침만 흘릴 수 있을 뿐 흉내 낼 수도, 흉내 내서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the swing
니콜라 랑크레, Marie-Anne de Camargo
프랑수아 부셰, Rinaldo and Armida

와토가 문을 연 로코코 미술이 인기를 끈 건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시기와 맞물립니다.

루이 14세의 위세에 억눌려 눈치만 보던 귀족들은 드디어 자유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태양왕'의 화려함이 부러웠던 귀족들은 참아온 사치심을 폭발시킵니다. 로코코란 말은 로카이유(Rocaille·장식용 돌 내지 조개 장식)에서 유래했습니다. 지긋지긋한 베르사유에서 떠나 파리로 돌아온 이들은 멋진 저택, 그 집을 꾸밀 짜릿한 장식품을 쓸어 담습니다. 반짝이는 돌과 조개는 약과였습니다. 밝고, 귀엽고, 상큼하고, 달콤한 것들을 끌어모읍니다. 이런 상황에서 와토의 그림은 귀족들의 취향에 딱이었습니다.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예상대로 와토는 '키테라섬의 순례' 이후 대세 화가로 뜹니다. 와토가 잘 나가니 와토가 창시한 '페트 갈랑트'식 예술품을 만드는 화가들이 줄을 섭니다. 로코코 미술 시대가 열린 겁니다.

카라바조(바로크 미술 선구자), Supper at Emmaus

로코코 미술이 유행하기 전에는요.

루이 14세의 취향이 곧 예술 잣대였던 시절에는 바로크 미술이 대세였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화풍입니다. 궁과 거리 등 큰 규모의 환경을 장식하기 위한 대작이 대부분입니다. 드라마틱한 격정적인 면이 있어 선전에도 잘 쓰였습니다. 루이 14세가 죽은 후 귀족들이 바로크를 곧이곧대로 이어받지 않은 이유는요. 공급의 문제, 취향의 차이 등과 함께 숨 막히던 그 인물, 루이 14세에 대한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니콜라 랑크레, 점심 식사

로코코의 시대가 낳은 문화 중 지금껏 이어지는 게 있습니다.

살롱입니다. 미술계에서는 바로크를 남성성, 로코코를 여성성에 빗대기도 하는데요. 귀족들은 집을 한껏 꾸미자 이를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사교성 좋은 귀족 부인들이 중심돼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모임이 생겨납니다. 가구와 벽지를 구경하고, 소품과 예술품을 감상했습니다. 대화 주제는 미술과 함께 문학, 정치, 음악, 과학 등으로 지적 유희를 즐겼다고 합니다.

와토의 신랄한 풍자…‘바로크’는 창고 속으로
장 앙투안 와토, 제르생의 간판

로코코 미술 시대의 화랑 장면입니다.

장 앙투안 와토, 제르생의 간판(일부 확대)

중앙에서 살짝 오른쪽에 선 두 사람이 원 모양 액자에 있는 그림을 뚫어져라 봅니다. 바로 뒤에 있는 화상이 이 누드화의 가치를 알려줍니다. 벌거벗은 님프가 목욕하고 있는 전형적인 '페트 갈랑트'입니다. 그 옆에는 덤덤한 표정의 한 여성과 새로운 작품을 꺼내놓는 여성이 있습니다. 한껏 치장한 여성은 예술품 수집가 같지요. "이런 건 이미 집에 다 있어요. 더 멋진 건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여점원이 이에 다른 장식물을 선보이는 모습입니다. 벽에 걸린 그림 대부분은 누드화입니다. 화가가 존경했던 반 다이크, 티치아노, 루벤스 등의 작품입니다. 위엄이 지배한 루이 14세 시대에선 보기 힘들었던 살굿빛 풍경입니다.

장 앙투안 와토, 제르생의 간판(일부 확대)

중앙을 기준 삼아 왼쪽으로 가볼까요.

한 남성이 철 지난 그림을 정리합니다.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상자에 처박히고 있습니다. 왼쪽 구석으로 몰린 엄격, 근엄, 진지의 초상화들도 곧 떼어질 것 같습니다.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이 이를 무심하게 봅니다. 가운데 선 남성은 그런 그녀에게 손 내밀며 "어서 오른쪽으로 가시지요"라고 말을 거는 듯합니다.

와토의 작품 '제르생의 간판'(1720)입니다.

와토는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달라지고 있는 예술계의 분위기를 풍자합니다. 봉인되고 있는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힘이 빠진 바로크를 뜻합니다. 사람들이 몰린 '페트 갈랑트'는 막 날개를 편 로코코를 의미합니다. 이는 1720년 와토가 화랑을 연 친구 제르맹의 부탁을 받아 고작 8일 만에 만든 작품입니다.

'제르생의 간판'이 걸려있는 화랑을 디지털로 재현한 모습. [Chromelight Studio]

이 그림은 제목대로 실제 간판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그저 간판으로 내놓기엔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습니다. 한 예술품 수집가가 한 달도 안 돼 삽니다. 화상 내 전시품이 아닌 간판을 떼간 겁니다. 그 시절 와토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사례입니다. 이 그림은 돌고 돌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품에 들어갑니다. 그 사이 작품은 일부 손상을 입는데, 캔버스를 다시 매는 과정에서 몇 인치가 날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극을 좋아한 ‘플랑드르의 아들’
장 앙투안 와토 초상화.

와토는 까다로운 개인주의자였습니다.

그의 그런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 게 '페트 갈랑트' 탄생과 관련한 사례입니다. 만만찮은 성격, 추종 불허 실력과 반짝이는 통찰력이 없었다면 진작 따돌림을 당했을 스타일(실제로 따돌림도 당했으나 '내가 너희들을 따돌리고 있는 것'이라는 태도로 맞받아쳐 주변을 당황케 함)입니다. 동양에선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는 그를 18세기대표하는 간판 화가로 거론합니다.

와토는 1684년 지붕 만드는 일을 업으로 둔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와토가 눈을 뜬 곳은 프랑스가 1678년에 정복한 발랑시엔입니다. 원래 플랑드르(벨기에)에 속했던 도시에서 나고 자란 와토는 성인이 된 후 '플랑드르 화가'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와토는 1702년에 프랑스 파리로 갑니다. 훗날 바로크와 로코코 미술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클로드 질로의 작업실에서 명작 모사와 연극 무대 장식 일을 합니다.

와토는 그다지 살가운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웬만해선 나서지도 않고, 모임을 드나드는 일도 싫어했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과 음악 등이 취미였습니다. 특히나 사교성이 강조되던 시대였기에, 와토를 놓고 주변 사람들은 공공연히 "특이한 인간"이라고 칭했습니다. 와토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정신적으로는 방탕해지고 싶은데, 도덕적으로 나는 너무나 조심스럽다"고 평가했습니다.

장 앙투안 와토, 프랑스 희극 배우들
장 앙투안 와토, 인생의 아름다움

고독한 와토의 뮤즈는 연극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치면 '연덕(연극 덕후)'였는데요.

특히 코메디아 델아르테(Commedia dell’arte)를 좋아했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이 연극은 대본보다 배우의 애드립을 중요시하는 즉흥극입니다. 와토는 이들의 아무 말 대잔치를 보고 즐기면서 '정해진 틀 바깥의 무언가'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느꼈을 겁니다.

그사이 와토는 특유의 섬세한 그림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고 있었지요.

1712년 프랑스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된 와토는 아카데미가 5년을 독촉한 끝에 입회작을 내는데요. 그게 바로 '키테라섬의 순례'입니다. 심사위원들이 종교화나 풍경화 등 정해진 틀에 욱여넣을 수 없어 새 장르 '페트 갈랑트'를 만들게 한 그 그림이요. 와토가 펄떡대는 코메디아 델아르테에 심취하지 않았다면, 이런 '깨는' 그림의 탄생 또한 더 늦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와토의 그림 자체가 감각적인 연극 무대 같기도 하네요.

‘병약미’까지 갖춘 그 화가, 루벤스를 품다

와토를 말할 때 다뤄야 할 이가 또 있습니다.

이른바 '바로크 미술의 왕'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입니다. 와토는 같은 플랑드르 출신의 대선배인 루벤스의 열정 어린 팬이었습니다. 그림을 이렇게나 잘 그린 분이 무려 동향(同鄕)이라니요. 와토는 자신이 플랑드르의 핏줄이라는 점에 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파리에 온 뒤에도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만 골라 만났습니다. 와토는 스승 중 한 명인 클로드 오드랑을 통해 루벤스의 작품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연작'을 봤을 땐 꿈결을 걷는 듯했습니다. 와토는 물 만난 고기처럼 루벤스의 흔적을 모사, 또 모사합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페테르 파울 루벤스, The Exchange of Princesses

그러나 와토는 당연히 루벤스의 화풍을 그대로 카피하지 않습니다.

루벤스의 요동치는 힘은 와토의 손을 거쳐 섬세한 리듬으로 바뀝니다. 루벤스가 맹렬한 칼싸움을 그렸다면 와토는 이를 우아한 춤 대결로 바꿔 그린 겁니다. 이는 와토가 루벤스에게 표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경의였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눈이 빠지게 연구한 끝에 완전히 '내 것'으로 소화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와토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습니다.

와토가 자신을 둘러싼 온갖 병 때문에 신경질적인 면을 갖게 됐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와토는 '키테라섬의 순례'를 출품하고 2년 뒤인 1719년에 영국 런던으로 갑니다. 단골 의사를 통해 악화하고 있는 폐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됩니다. 애석하게도 와토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던 와토는 결국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몇 안 되는 친구인 제르생의 집에 머물면서 '제르생의 간판'을 그려준 겁니다. 사실은요. 이 그림이 와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와토는 이를 완성한 뒤 급격히 몸이 나빠졌습니다. 1721년, 고작 37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죽습니다. 폐결핵이었습니다. 그토록 동경했던 루벤스의 딱 절반만큼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까운 천재가 또 그렇게 요절한 겁니다.

장 앙투안 와토, 사랑의 노래
장 앙투안 와토, 야외에서의 사교 모임

그래도 와토는 말년 10여년간 높은 명성과 상당한 상업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지금은 이보다도 위상이 더 높아져 18세기 프랑스 미술의 자랑으로 칭해집니다. 하지만 왕과 귀족의 사치에 반기를 든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와토의 남겨진 그림들이 본보기가 돼 핍박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당시 미술학도들이 그의 작품에 빵 조각을 내던지며 조롱할 정도였습니다. 와토의 생가 뒷마당에 그의 흉상이 들어선 해는 죽고난 뒤 144년 후인 1865년이었습니다.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8)“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9)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0)“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1)‘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2)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3)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4)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빈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5)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6)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심화편 (2022. 9. 3.)

17)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18)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야수주의·입체주의 심화 편 (2022. 9. 10.)

19)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0)“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1)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행위예술 대모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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